<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8년 3월 29일 |
경상북도 예천군 제고면 신리동 (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1] | |
사망 | 1945년 8월 13일 (향년 37세) |
만주국 신징특별시 사도가 신경감옥 (현 중국 지린성 창춘시 난관구 장퉁로61호)[2] | |
본관 | 반남 박씨[3]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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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08년 3월 29일 경상북도 예천군 제고면 신리동(현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에서 아버지 박승경(朴勝經)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숙부 박승원(朴勝原)에 입양되었다.일찍이 가족들을 따라 중화민국 봉천성으로 이주해 동변도(東邊道) 무순현(撫順縣) 동사촌(東社村)[4]에 있던 공립 소사국민우급학교(小社國民優級學校)를 졸업하고, 베이징 중국의숙(中國義塾)에서 수학하면서 중국어와 영어를 습득했다. #
그 뒤 1934년 7월 단재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의 취지에 감화되어 김시현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에 입단했고, 독립군 양성을 통한 항일 투쟁을 위해 중화민국 충칭시와 만주국 봉천시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러나 소위 '중국 남경군관학교 설립 및 독립군 양성 사건의 배후 주동자'라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일본으로 소환되어 나가사키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9년 1월 출옥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김시현·권애라(權愛羅)·김봉년·권혁준 등과 함께 충칭으로 망명했고, 1940년 6월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을 비롯한 주요 임시정부 요인들이 가진 회합에 참여했다. 이때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 취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독립군 1개 사단 병력을 편성해 독립군의 무력을 증강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뒤 1941년 9월 만주국 치하 봉천시에 잠입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간도성(間島省)[5] 및 길림성 반석현(磐石縣)[6] 등지로 활동 범위를 확장하며 독립군 병력을 증강할 목적으로 지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비밀감옥에서 1년 여의 혹독한 고문 끝에 '재만 항일 결사 105인 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신경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신경특별시 사도가(四道街)에 있던 신경감옥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8.15 광복을 불과 이틀 남겨 놓던 1945년 8월 13일, 관동군 헌병대에 '장기수형자'라는 명목으로 연행된 뒤 총살되어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향년 38세.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996년 10월 26일 출생지인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 314번지에 직계 후손 및 일가 친척들에 의해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애국지사박봉필선생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 반남 박씨 숙천공파 집성촌이다.[2] 난관구(南關區) 장퉁로(長通路)[3] 숙천공(肅川公) 임정(林楨)파 25세 서(緖) 항렬. 족보명은 박심서(朴心緖, 朴尋緖).#[4]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푸순현(撫順縣) 상마진(上馬鎭) 관내에 있었다. 1956년 다훠팡(大伙房)저수지 축조로 인하여 수몰되었다.[5] 1934년 12월 1일 만주국에서 신설해 길림성 연길현(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왕청현·혼춘현(현 연변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화룡현(현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과 봉천성 안도현(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도현) 등을 소속하게 했다. 이후 1943년 연길현 연길가(延吉街)를 간도시(間島市)로 승격시켰다. 같은 해 10월 1일 목단강성(牧丹江省)·동안성(東安省)과 합병되어 동만총성(東滿總省)이 신설되었다.[6]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판스시(磐石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