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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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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07년 8월 17일
전라북도 진안군 탄전면 가막치
(現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주평리[1] 원가막마을 506번지)
사망 1988년 3월 3일
전라북도 진안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77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7년 8월 17일 전라북도 진안군 탄전면 가막치(現 진안군 상전면 주평리 원가막마을 506번지)에서 아버지 박용덕(朴瑢德)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이 2명, 남동생 1명이 있었다. 이후 진안면(現 진안읍) 군하리로 이주하였다가 홀로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계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73-3번지에 거주하였다.

진안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년간 고향에서 소일하다가 홀로 상경해 경성부 사립협성실업학교(現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상과에 입학했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다수의 한국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등 탄압을 받게 되자, 그는 이것을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으로 규정하고 각지의 학생들이 전개하는 동맹휴학 및 시위운동에 호응하여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29년 11월 16일 같은 학교 학생인 정윤희(鄭允熙)·이세원(李世遠) 등과 함께 약 1백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학원의 독립', '만세, 피압박 민족' 등의 문구를 적은 깃발을 각각 선두에 들고 교문을 나서, 종로파고다공원,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익선동을 지나 창덕궁을 거쳐 봉익동으로 각각 시위 행진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1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검사가 이에 공소하였으나, 같은 달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검사의 공소 이유 없음을 판결받고 징역 8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1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되어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88년 3월 3일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2년 12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