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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히트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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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밤의 히트 스튜디오
夜のヒットスタジオ | Yoru no Hit Studio
파일:밤의 히트 스튜디오.png
방영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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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음악 방송
채널 후지 테레비
방송 시간 월요일 오후 10시 00분 ~ 오후 10시 54분 (밤의 히트 스튜디오)
수요일 오후 9시 02분 ~ 오후 10시 52분 (밤의 히트 스튜디오 DELUXE)
수요일 오후 10:00분 ~ 오후 10시 54분 (밤의 히트 스튜디오 SUPER)
방영 기간 1968년 11월 4일 ~ 1990년 10월 3일


<colbgcolor=#000><colcolor=#fff> 제작 이토 아키라, 후지모리 요시유키, 히키타 히카루, 이노우에 신고 등
작가 츠카다 시게루 등
출연 요시무라 마리, 마에다 타케히코, 미나미 신스케, 이노우에 쥰, 후루타치 이치로 등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역대 진행자2.2. 밤의 히트 스튜디오(1968~1985)2.3. 밤의 히트 스튜디오 DELUXE (1985~1988)2.4. 종영2.5. 특별 방송
3. 특징
3.1. 출연자의 다양성3.2. 오프닝 메들리3.3. 무대 연출3.4. 관객석3.5. 세션3.6. 수기 텔롭
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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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밤의 히트 스튜디오1968년 11월 4일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 방송된 일본의 음악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방송사는 후지 테레비.

TBS 테레비더 베스트 텐니혼 테레비의 노래의 톱텐[1], NHK렛츠고 영[2]과 함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4대 음악방송으로 손꼽힌다.[3] 당대 날고기는 유명가수들은 모두 출연하였을 정도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카메라 워크나 조명, 연출[4] 등 당대 방송기법으로는 거의 최첨단에 가까울 정도의 실험적 시도를 선보이는 등 최고로 평가받는 프로그램이었다. 줄여서 '밤히트 (夜ヒット, 요루히트)' 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역사

2.1. 역대 진행자

여성 진행자 중에선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가 최장기간 진행을 했었고, 남자 진행자 중에선 이노우에 쥰, 후루타치 이치로 순으로 장기간 진행을 했었다.
  • 1968년 11월4일 ~ 1973년 9월24일: 마에다 타케히코(前田武彦),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
    파일:N-maeda.jpg
  • 1973년 10월1일 ~ 1974년 3월25일: 출연 게스트에 의한 윤번 사회제
  • 1974년 4월1일 ~ 1975년 3월31일: 미나미 신스케(三波伸介),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 아사오카 유키지(朝丘雪路)
    파일:N-Asaoka.jpg
  • 1975년 4월7일 ~ 1976년 3월29일: 미나미 신스케(三波伸介),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

    • 파일:N-Minami.jpg
  • 1976년 4월5일 ~ 1985년 9월25일: 이노우에 쥰(井上順),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

    • 파일:N-Inoue.jpg
  • 1985년 10월2일 ~ 1988년 2월10일: 후루타치 이치로(古舘伊知郎),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

    • 파일:N-Huru.jpg
  • 1988년 2월24일 ~ 1989년 9월27일: 후루타치 이치로(古舘伊知郎), 시바 토시오(柴俊夫)

    • 파일:N-shiba.jpg
  • 1989년 10월18일 ~ 1990년 10월3일: 후루타치 이치로(古舘伊知郎), 카가 마리코(加賀まりこ)

    • 파일:N-Kaga.jpg

2.2. 밤의 히트 스튜디오(1968~1985)

1968년 신설되자마자 모리 신이치, 이시다 아유미, 오쿠무라 치요 등등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을 출연시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3월 17일 최고 시청률(42.2%)을 기록해 밤히트를 모르면 일본 음악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대박을 치며 전성기의 포문을 열게 된다. 1970년대부터는 컬러방송을 시작했으며 아이돌 붐이었던 당시 흐름에 발맞춰 내로라하는 아이돌들을 대거 출연시키는 등 어마어마한 인기와 입지를 자랑하였다.

1969년 '대면', '컴퓨터 연인 선택' 코너에서 이시다 아유미와 나카무라 아키코 등 여가수들이 통곡해 그대로 노래하는 해프닝이 속출, '울음의 히트 스튜디오 사건'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시청률이 급상승했다고 한다. 당시 높은 시청률 프로그램이 적었던 후지 테레비의 구세주적인 음악 프로그램이 되었다.

1973년 9월, 사회자인 마에다 타케히코가 참의원 보궐 선거에서 일본공산당 후보를 응원해, 그 후보가 당선 되었을 경우 당선 축하로 프로그램에서 만세를 외치겠다는 발언을 하였고, 해당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되자 프로그램 엔딩에서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 행위는 '반공'을 내걸고 있던 시카나이 노부타카 후지산케이 그룹 의장의 역린을 건드렸고, 사회에서 하차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잘나가던 마에다는 하차하게 되었고, 이어지는 2대 남성 사회자는 코미디언 미나미 신스케. 이 시대는 인기 가수에 의한 콩트 등을 담은 '가요 버라이어티'적인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5]

1976년에는 3대 남성 사회자로 그룹 사운드 출신[6]의 이노우에 쥰(井上順)이 기용됐다.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많은 일본 사람들이 기억하는 시기가 이노우에 쥰, 요시무라 마리(芳村真理)[7] 콤비 시기다.[8] 특히 이 시기는 "다른 TV에서는 볼 수 없는 아티스트가 유일하게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이라며 특이한 입지를 확립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텔레비전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던 포크, 뉴 뮤직계의 아티스트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활발히 하고 있던 대형 스타들은 무조건 출연했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데뷔 초부터 이 방송과 함께하여 1980년 은퇴방송까지 거의 전 연예생활을 이 방송과 보냈다.

2.3. 밤의 히트 스튜디오 DELUXE (1985~1988)

1985년 4월 3일부터 방송을 대거 개편하여 시간대를 월요일 밤 10시에서 수요일 밤 9시로 옮기고, '밤의 히트 DELUXE'라는 이름으로 방영하기 시작했다. 조명이나 연출 등에 더 많은 투자를 하여 보다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방송시간도 2시간으로 확대되었다.

리뉴얼 직후에 프랭크 시나트라티나 터너를 동시에 TV 라이브 출연시킨 것은 해외 음악업계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또 이 시기에 오토코구미, 야키 사오리, 하마다 마리, RAMU, 쿠와타 케이스케, 나카모리 아키나, 쿠보타 토시노부, 타하라 토시히코, 사카모토 후유미, CHAGE and ASKA도 출연했었다.

1988년 2월에는 제1000회 방송 '요시무라 마리 사요나라 특별 방송'에서 간판 MC 요시무라 마리가 하차했다. 제1회 방송 게스트 시마쿠라 치요코, 후세 아키라를 필두로, 총 300명 이상의 역대 출연 가수와 역대 남성 사회자가 출연했다. 일본 정규 음악 프로그램 역대 시청률 2위인 36.0%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2.4. 종영

1989년 일본에서는 더 베스트 텐을 포함한 대부분의 음악 방송이 종영했는데, 시기적 특성[9] 때문에 대부분의 음악 방송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밤히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1988년 1000회 방영을 앞두고 방송 초기부터 메인 여성MC 였던 요시무라 마리가 하차하는 등 시청률이 떨어지자 1989년부터 여러 가지를 개편해 '밤의 히트 스튜디오 SUPER'을 편성하여 방영했다. 하지만 기존의 방송에 적응되어 있던 시청층이 떨어져 나가며 적자를 막지 못해 결국 1990년 10월 3일, 특집방송 ありがとう&さよなら 夜のヒットスタジオ를 끝으로 종영되었고 이로써 22년간 방영되어오던 밤의 히트 스튜디오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5. 특별 방송

그 이후에도 밤의 히트 스튜디오는 특별방송을 편성하여 1996년까지 비정기적으로 방영되었다. 91년까지는 특유의 개성있는 자막을 썼지만 이후에는 곡 제목마저도 폰트로 처리하게 되었다.

3. 특징

3.1. 출연자의 다양성

경쟁 프로인 베스트 텐이 순위제라는 형식을 고수한 데 비해, 밤의 히트 스튜디오는 같은 인기 음방임에도 다소 자유로운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방송 출연에 적극적이지 않은 가수들, 순위제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던 가수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야자와 에이키치, 나카지마 미유키, 오자키 유타카, BOØWY, 블루 하츠 등은 베스트 텐에는 랭킹에 들었어도 출연이 없었던 데 반해, 이쪽에는 출연 이력이 있다.[10]

일본을 방문한 해외 유명 가수들이 직접 출연하거나 아니면 위성 중계로 나오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면, 조용필, 마돈나, 라이오넬 리치, 듀란 듀란, U2, 성룡, 조안 바에즈, 앤디 윌리엄스, 자넷 잭슨, 휘트니 휴스턴[11] 등등.[12]

3.2. 오프닝 메들리

사실상 이 프로그램의 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가수들이 뒤에서 한명씩 등장해 뒤의 가수의 노래를 짧게 부르고 곡 또는 다음 가수의 소개[13]와 함께 마이크를 넘겨주는 형식. 가끔씩 자신의 노래를 오프닝 메들리로 부를 때도 있다.[14] 노래는 대부분 해당 가수의 대표적 히트곡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방송의 시간관계상 한두 소절 쯤 부르고 넘기는 게 끝이었지만, 유명가수의 히트곡을 또 다른 유명가수가 부른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었는데, 일반 가수가 다음 차례인 엔카 가수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거의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15] 마지막 주자는 자신의 노래를 완곡할 기회가 제공되었는데, 그만큼 마지막을 맡는 가수는 유명가수들 중에서도 단연 톱이거나 또는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는 가수가 맡았다. 오늘날에는 당대 가요사의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영상자료로도 기능하고 있다. 게다가, 잊혀진 가요의 경우 거의 유일하게 음성과 영상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어 방송국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창고와 같다.

3.3. 무대 연출

같은 곡이라 할지라도 한 번 쓴 무대 연출은 절대 재활용하지 않았다. 생방송 도중 무대가 바뀌는 모습마저 무대 장치의 일부로 활용했기 때문에 노래가 시작되기 전 분주한 출연자들의 모습도 관전 포인트.[16] 또한 어두운 분위기나 도시 야경을 연출하는 데 특화되어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3.4. 관객석

가수가 가창 중에 무대 뒤 관객석에 앉아있는 가수들이 이를 응원했다. 보통 잔잔한 노래에는 양옆으로 몸을 흔들고, 신나는 노래에는 박수를 쳐주는 방식. 이는 '관객도 무대 소품의 일종이다'라는 밤히트만의 철학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3.5. 세션

쇼와 시대 후반 음악방송 중 가장 웅장하다고 평가받는 관현악단[17]이다. 상술했듯 이 관현악단마저 무대 소품의 일부로 활용하여 완벽한 무대를 구사하기 위해 매 방송마다 무대에 맞게 연주 위치를 바꾸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3.6. 수기 텔롭

원래 텔롭(자막)을 손으로 많이 쓰던 시대이기는 하나, 이 프로그램의 텔롭은 꽤나 특이하다. MC소개, 가수소개, 곡제목 등 중요한 부분은 수기 텔롭을 쓰는데, 그 글씨체가 촌스럽긴 하지만 굵고 직선적인 형태라서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반면 더 베스트 텐은 컴퓨터로 작업했다.

4. 기타

  • MBC에서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이 프로그램을 완벽히 카피한 '밤의 히트쇼'를 방송한 적이 있다. 방송 제목부터 세트 구성에 오프닝 메들리까지 거의 같은 프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하다. 사실 MBC와 후지 테레비와 제휴 관계이기 때문에 방송 전에 합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5. 관련 문서



[1] 1986년 4월 7일~1990년 3월 26일. 총 180회[2] (レッツゴーヤング, Let's Go Young) 1974년 4월 7일부터 1986년 4월 13일까지 전 572회로 방송했으며 핑크 레이디가 이 프로그램으로 데뷔했다.[3] 이뿐만이 아니라 후지 테레비는 뮤직 페어라는 방송도 동시에 하고 있었다.[4] 특히 밤하늘이나 도시의 밤 같은 테마를 주제로 한 무대의 연출을 기가 막히게 잘 했다. 이름값[5] 이 구조는 나중에 전원집합에서 그대로 이어받아 대호평을 얻는다.[6] 일본 그룹사운드의 시초격인 The Spiders(ザ・スパイダース)의 멤버[7] 일본 최초의 모델 클럽인 TFMC(도쿄 패션 모델 클럽) 소속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잡지의 커버 걸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로도 활동범위를 넓혔으며, 70~8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방송진행자로서 전성기를 누렸다.[8]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음악방송의 남녀콤비가 두드러졌다. 경쟁프로였던 베스트 텐이나 뮤직페어가 이런 류였다.[9]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음악 시장의 개편이 어느정도 완료되기도 했으며, 당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소비심리가 위축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쇼와 덴노가 사망하여 사회적 분위기가 잠시 좋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10] 반대로 마츠토야 유미는 베스트 텐에 출연한 적이 있으나 밤의 히트 스튜디오 에는 단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11] 중계 출연[12] 당시 버블경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돈이 워낙 넘쳐나던 시기라 그런지 해외 올로케나 위성생중계 등 큰 돈이 드는 방송을 거리낌 없이 시도한 시기였다.[13] 방송 작가가 지정해준 멘트를 외워 말한다고 하지만 애드립을 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14] 마지막 가수는 대부분 앞 가수가 부른 마지막 가수 자신의 노래를 이어받아서 불렀다.[15] 예를 들어 고 히로미미야코 하루미의 노래를 부르는 식이다.[16] 보통 노래가 끝난 후 광고 시간에 스탭들이 튀어 나와 무대를 정리한다.[17] 단 이케다와 뉴 블리드(ダン池田とニューブリード)라는 관현악 밴드가 연주를 전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