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7 18:12:02

배려

1. 2. 3. 칼럼니스트 한상복의 소설

1.

배려() [배ː-]「명사」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표준국어대사전
남의 흉한 일을 민망히 여기고, 남의 좋은 일은 기쁘게 여기며, 남이 위급할 때는 건져주고, 남의 위태함을 구해주라.
명심보감
배려() / consideration, regard, care, solicitude, consider, be considerate

위에서 보듯이 한국어 '배려'에 꼭맞는 영어 단어는 없다. arrange에 consider를 섞어서 한국어 배려의 늬앙스를 살리는 방향으로 단어들의 의미의 주변부를 깎아내서 문장으로 표현하자. 꼭맞는 영어 단어가 없는 것은 그들의 실생활에서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배려를 잘한다는 오해가 있으나, 공감은 논리적 사고의 결실이다. 만약 가정 불화가 지속되는 친구가 있다면, 그 고민을 듣는 사람 역시 안타까운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별 일 아닌 일을 가지고 진심으로 끙끙댄다면 듣는 사람이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으니 주변 사람으로서는 이해를 해 줄 필요는 있다. 따라서 배려는 공감이 전제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설령, 이해는 안 가지만 힘들어 보이니 걱정해야 한다고 억지 공감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공감이 아니라 단순한 동조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공감이라고 쓰이는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편가르기식 억지 공감에 해당한다. 그러다보니 억지 배려를 강요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대표적인 예시가 아주라. 냉정한 의견을 제시하면 너는 누구편이야?? 라고 발끈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억지 배려를 강요하는 경우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업맨처럼 듣기 좋은 말을 골라 해야 하는 직종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갑과 을 사이에서 을이 갑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기에는 우리나라 사회는 아직 성숙치 못하다. 하청 업자가 본청 담당자에 직설적으로 대꾸하다가는 다음부터 계약이 끊겨도 할 말이 없다.

또,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시의적절한 상황 역시 중요하다. 가령 누군가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필수적으로 사람들이 다녀야 할 곳이므로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피우지 않게 해야한다. 이것이 배려이다. 허나 자리가 충분히 많은 버스 안에서 덥거나 갑갑해서 창문을 열고 있을 때 그사람 뒤에 굳이 앉아서 창문을 닫아달라 하는것은 배려 강요, 즉 억지 배려에 해당한다.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을 본인의 입맛대로 요구하는 셈이다.

단, 공격적인 어투와 직설적인 어법은 다르다. 악플러들은 다양한 어법으로 악플을 다는데, 제 딴에는 일침이라고 무례한 말투를 구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만, 그것이 꼭 직설적인 어법은 아니다. 완곡어법으로도 충분히 악플을 달 수 있기 때문. 대표적인 예시가 결혼은 하셨는지.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이 절대적인 올바름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경우, 이러한 악플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이 점은 배려보다는 자아성찰이 모자라다고 봐야 한다. 거기다 명백히 악의를 품고 악플을 다는 경우는 더 이상 배려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배려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행정적 지원 등 객관적인 필요성에 의거해서 행해져야 하며, 배려를 행하는 주체 역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행해짐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자리를 배치할 때 키에 맞춰서 배석하는 것 역시 키가 작은 학생들을 배려한 조치인데, 객관적인 필요성과 주체 모두 만족한다. 반면, 어떤 사람이 애인을 특별한 이유 없이 차 놓고는 어째선지 하루종일 울고 있다면, 개인이 그 사람을 위로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혹여 건강상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필요성) 구급차를 부르면 된다. 주변 사람은 구급차를 부른 것으로 객관적인 주체를 만족시킨다. 물론 현실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면 냉혈한 취급을 받을 뿐더러, 자기가 차 놓고 운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다. 즉 배려를 강요하고 있는 것. 본인은 의도치 않았을지도 모르나, 사람을 차 놓고 심란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창작물에서는 배려없이 자신만 생각하는 캐릭터도 나오고, 배려를 하다가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손해를 입히는 캐릭터도 있으며 심지어 그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캐릭터들도 있는데, 창작물과 현실을 헷갈리지 말자. 두 극단 모두 나쁜 것이고, 상대방의 인내심과 상대에 대한 예의를 고려하여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배려=좋은 것'으로 생각하다보니 당연한 권리가 배려로 포장되어 남용되기도 한다. #(윗 설명대로라면 노약자석은 당연한 권리가 아닌 국가라는 객관적 주체에 의해 행해진 약자들의 교통이용 편의성에 따른 배려라고 보아야 한다) 반대로 배려를 당연한 권리로 포장하여 남용하기도 한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전제와 달리 반강제적으로 요구되기도 한다. #

규정화된 '사회적 배려'가 오히려 편법적 특권 승계를 정당화하는 용어로 쓰이기 쉽다. 삼성가 이재용의 자녀는 한부모 가정 전형으로 국제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전여옥 의원의 자녀는 다자녀 가정으로 자립형 사립고에 입학하였는데, 이런 사례도 모두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여겨졌다. # 비경제적 분야의 배려가 확대되면서 경제적 분야의 배려 입학은 오히려 줄었다는 조사 결과도 존재한다. ##

2.

배려() - 「명사」배반되고 어그러짐.

3. 칼럼니스트 한상복의 소설

1인칭 시점으로 배려가 낳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소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제대로 안나오고 모두 별명 혹은 성+직함으로만 부른다. 삽화는 파스텔 톤의 만화풍.

유능하지만 냉정하고 이기적인 주인공[1]이 회사 내의 구조조정과 관련된 음모에 휘말리면서 겪는 사건,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배려'를 배우고 내적인 성장을 하는 이야기이다.

꽤 잘 팔렸으며 어린이용으로도 나왔다. '어린이를 위한 배려'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테마가 회사 구조조정에서 반장선거로 바뀐 것이 특징. 여기서는 주인공이 '배려'의 주인공인 위의 딸인 것으로 보인다.[2] 성이 같은 점이나 삽화에서의 묘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의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줄 때 자신도 예전에는 남을 짓밟고 무시하는 성격이었다고 조언하는 것 등으로 볼 때 가족관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 이름은 나오지 않고 '위'라는 성씨로만 서술되며, 작중 등장인물들에게는 '위 차장'으로 불린다. 아내와는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배려를 배우고 남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화해하지만.[2] 이름이 '위예나'로, 전작의 주인공이 위씨이고 전작에서도 딸의 이름이 예나였음을 생각하면 확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