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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튼 베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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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양대학교와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을 설립한 고봉 김치선 목사와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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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튼 베어드
裵偉良 | William Martyn Baird
파일:Baird.jpg
한국어명 <colbgcolor=#ffffff,#191919>배위량(裵偉良)[1]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생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주 클라크 카운티 찰스타운[2]
사망 1931년 11월 29일[3](향년 69세)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평양
직업 선교사
직책 1891년 미국 북장로회 파견 선교사[4]
1897년 평양숭실학당 초대 학장
종교 장로회[5]
학력 하노버 대학교[6] 철학 박사
매코믹 신학교[7] 졸업
가족 배우자[8], 아들 2명[9] 출처

1. 개요2. 한국에 오기 전3. 한국에 온 후4. 숭실학당 설립5. 문서 번역6. 평가7.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윌리엄 마튼 베어드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로 구한말 조선 평양에 현 숭실중고등학교숭실대학교의 모태가 되는 숭실학당을 설립한 설립자이다.

2. 한국에 오기 전

윌리엄 마튼 베어드는 1862년 미국 인디애나주 클라크군의 찰스타운(Charlestown)에서 출생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이주한 언약도의 후손으로 스코틀랜드 교회 집안에서 자라났다.[10]

윌리엄 베어드의 조부인 존 베어드는 1810년 미국 필라델피아도미한 후 테네시주, 오하이오주, 켄터키주를 전전하다가 인디애나주 클라크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베어드의 아버지인 존 마튼 베어드는 정착한 클라크군에서 가업으로 삼은 방직업에 종사하였다. 베어드 가족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그로 인해 인디애나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베어드는 어머니 낸시 패리스 베어드에게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 낸시는 아들 윌리엄에게 엄격한 개혁교회 전통으로 양육하며 윌리엄의 부모 모두 자녀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좋지 못해 카운티의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 이외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다. 윌리엄 베어드는 그의 형 존 베어드가 마련하는 학비로 하노버 대학교를 다녔고 매코믹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윌리엄 베어드는 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콜로라도 델노트(Del Norte)에 있는 소형 교회에 목회를 시작하였다. 동시에 멕시코 청년 대상의 미션스쿨인 델노트 대학의 학장을 맡기도 했다. 경제적 이유로 해외 선교 사역에 바로 가지 못했다. 연세대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1]의 형이자 타자기 회사 사장인 존 언더우드가 한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봉급 지급을 제안한다는 소식을 새뮤얼 오스틴 모펫[12] 선교사가 듣고 장로회 선교본부와 베어드에게 편지를 썼고, 선교본부가 베어드를 한국 선교사로 지명하였다. 베어드는 자신이 있던 델 노트르 대학 학장을 그만두고, 하노버 대학의 동기였던 애니 로리 애덤스와 결혼함과 동시에 한국행에 올랐다. 이로써 베어드는 한국과의 연이 시작되었다.

3. 한국에 온 후

부산항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는 조선선교부에서 첫 선교지로 부산을 결정받으며 한국어를 배우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베어드는 하디 선교사의 집에서 지내면서 허드 영국 영사의 도움으로 선교부 건물 부지를 구입하였다. 부산선교지부를 설립하고 순회전도여행, 사랑방 서당[13], 기독교 서적 번역, 대구 선교부 설립, 초량교회 설립[14] 등을 하며 사역을 진행하였다. 조선선교부는 베어드를 교육고문으로 임명하였고 서울로 다시 이주하였다.

4. 숭실학당 설립

베어드는 <우리의 교육정책>[15]를 입안하였고 베어드의 정책은 조선선교부의 교육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이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1897년 평양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평양은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지역이었다. 평양의 늘어나는 초등학교 졸업생과, 평양에서 급격하게 늘고있는 교회들을 이끌 지도자의 중등교육이 필요함에 따라 평양선교부는 베어드의 중등교육반 운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아무것도 없이 베어드의 사랑방에서 시작한 중등교육반은 숭실학당의 시작이었다. 숭실학당은 성서, 지리 산수, 역사 등을 가르치며, 평양의 선교활동 성공과 초등학교의 성장과 더불어 재적 인원이 증가하였다. 베어드는 선교부의 지원금과 스왈렌 선교사[16]의 기부금으로 교사를 건립하였다.

베어드는 숭실학당의 교육언어를 한국어로 채택하며 미국 중등교육 교과서를 한국의 실상에 맞게 번역하고 출판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며 교파가 연합하는 방향으로 선교가 시작되면서 베어드는 감리회와 연합으로 1906년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 合成崇實大學)을 설립하였다.

5. 문서 번역

베어드는 대학 문제[17]로 인해 숭실대학 교장을 1916년 사임하였다. 이후 기독교서회 편집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주일학교 교재와 성서 번역 등을 하는 문서 사역에 집중했다.

이후 1931년 장티푸스에 걸려 69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6. 평가

베어드는 상대적으로 독립운동보다 기독교 교육 선교에 집중한 선교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운동과 무관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북 지역 민족운동의 핵심이었던 평양 숭실학교[18]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것을 보면, 베어드 선교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통해 독립 운동의 기반이 형성되도록 기여한 인물이 틀림없다.

이러한 배경에는 베어드 선교사가 강조한 조선어 교육에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이 고안한 <Our Educational Policy>를 통해 조선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세운 숭실학교에서도 조선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시행했다. 이러한 베어드의 교육 기조가 숭실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 자주 독립 사상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어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숭실 학생들이 항일 민족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또한 머펫, 스왈렌, 매큔, 언더우드 선교사 등[19]과 더불어 105인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일제 당국이 민족운동의 배후라고 연관지을만큼 주시했던 선교사들 중 하나였다.

언더우드아펜젤러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인을 위해 근대화 교육을 보급한 인물이자 독립운동가 배출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20]

7. 참고문헌

김명배[21]. 2013. "윌리엄 베어드의 삶과 사역에 나타난 신학과 사상에 관한 연구"


[1] 베어드를 한자로 음차한 이름이다. 구한말 조선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은 자신의 영어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한국어식 이름을 지었다.[2] 출처.[3]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개교식 참여 한달 후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했다.[4] 부산에서 처음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5] 미국 북장로회 교단 소속의 선교사이다. 기존 미국 장로회가 미국 남북전쟁으로 인해 남장로회가 분리되면서 북장로회로 불렸다. UPCUSA에 통합되었다가 PCUSA로 명칭을 바꾸었다. 북장로회는 경상도·평안도·황해도를 중심으로, 남장로회는 전라도·충청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당시 북장로회 소속으로는 연세대학교의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숭실대학교의 설립자 윌리엄 마튼 베어드가 있었고, 남장로회 소속으로는 인요한의 할아버지이자 한남대학교의 설립자 윌리엄 린튼이 있다. 감리회 소속으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배재학당 설립자 헨리 아펜젤러가 있다.[6] Hanover College, 미국 인디애나주에 위치한 장로회 소속 대학교이다.[7]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위치한 장로회 신학교이다. 시카고 대학교 캠퍼스와 맞닿아있다.[8] 애니 로리 애덤스 베어드(Annie Laurie Adams Baird, 1864–1916). 숭의여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애니 베어드가 일찍 사별한 이후 윌리엄 베어드는 로즈 M.F. 베어드(Rose May Fetterrolf Baird)를 아내로 맞이했다.[9] 첫째 윌리엄 마튼 베어드 주니어(William Martyn Baird Jr.), 둘째 리처드 해밀턴 베어드(Richard Hamilton Baird) 총 2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자신의 선교지인 조선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윌리엄처럼 PCUSA 선교사로 활동했다.[10] 언약도(Cùmhnantaich, Covenanters)는 계약파라고도 하며 언약도 운동은 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가 국가로부터 개혁주의 신앙과 장로회 정치를 고수하기 위해서 일어난 종교 운동이자 정치 운동이다.[11] 북장로회에서 가장 먼저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다.[12]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숭의여학교의 설립자. 합성숭실대학의 학장을 맡기도 했다. 베어드가 졸업한 매코믹 신학교 출신이다.[13] 당시 선교지부마다 사랑방이 존재했는데 이 사랑방에서 선교준비, 전도, 예배와 문서번역,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진행되었다.[14] 남부 지역 최초의 교회[15] Our Educational Policy[16] 윌리엄 스왈렌(한국어명: 소안론) 선교사는 현재 한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사과종인 미주리 사과나무 품종을 안식년차 미국에 다녀오면서 최초로 대구에 들여왔다.[17] 1900년대 당시 선교는 에큐메니컬 흐름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 하나의 연합대학 구상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 대학이 위치한 장소가 어디로 결정되냐에 대논쟁이 일어났다. 평양과 서울 둘 중 하나를 놓고 논쟁하게 되었는데, 감리회 선교부에서 대학의 위치를 서울로 한다는 의결이 나오면서 논쟁이 심화되었다.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모두 반대하였고 표결에도 평양으로 결정하였지만, 합동위원회와 미국 선교본부에서도 서울로 결정하였다. 평양 숭실은 폐교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한국선교부에서 호소한 끝에 평양 숭실대학을 존치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허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감리회는 평양 숭실 경영에 손을 떼고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 위치한 연희대학을 설립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참조.[18] 숭실대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평양 숭실학교 출신 중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동문이 88명에 달한다.[19] 일제가 명시한 사건 관련 선교사는 다음과 같다. H. G. Underwood, E. W. Harris, S. A. Moffett, W. C. Swallen, W. M. Baird, Graham Lee, C. F. Bernheisel, E. M. Mowry, R. McMurtrice, J. G. Holdcroft, C. L. Phillips, J. H. Wells, W. A. Noble, A. C. Becker, B. W. Billings, W. C. Rufus, E. D. Follwell, N. C. Whittemore, G. S. McCune, S. L. Roberts, C. Ross, H. L. Lampe, A. M. Sharrocks 출처[20] 참조[21] 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