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3-31 11:14:53

옥동 백미원 신건옥

백미원에서 넘어옴
<colbgcolor=#005ba6><colcolor=#fff> 옥동백미원신건옥
玉洞百美園新建屋
Château Baekmiwon
<nopad>파일:1903년옥동백미원신건옥프랑스도면.png
1903년 프랑스 건축가의 도면 (FACADE NORD / 북쪽 정면)
정식 명칭 옥동 백미원 신건옥
한자 명칭 玉洞 百美園 新建屋
다른 이름 벽수산장 양관(洋館), 송석원(松石園), 한양 아방궁, 뾰죽당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
설계자 S. Silberstein[1]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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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1903년
준공 1935년
철거 1973년

1. 개요2. 부지3. 명칭4. 건축적 특징5. 건축가 추정6. 설계도 입수와 형성 배경7. 연못8. 주변 건축물
8.1. 일양정 (日陽亭)8.2. 박노수 가옥 (구 윤덕영 저택 부속시설)8.3. 옥인동 윤씨 가옥 (옥인동 서용택가)8.4. 조경 및 기타 부속 시설
9. 연표10. 보존 및 흔적

1. 개요

벽수산장(碧樹山莊)은 일제강점기 시기, 인물 윤덕영이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 조성한 대규모 저택 단지이다. 이 단지는 여러 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복합 주거 공간으로, 당대 상류층 주거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 가운데 ‘백미원(百美園)’은 벽수산장 내부에 건립된 서양식 저택, 즉 양관(洋館)을 지칭하며, 정식 명칭은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서양식 건물을‘벽수산장’이라 부르거나, 해당 지역의 옛 지명에 따라 ‘송석원(松石園)’으로도 언급되기도 한다.

건축적으로는 프랑스 귀족 주거 양식인 샤토(Château) 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건물로, 대한제국기 외교 경로를 통해 입수된 프랑스 귀족의 설계도가 한국에서 실제 건축으로 구현된 드문 사례다.

2. 부지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은 일명 ‘벽수산장’으로 알려진 건축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 ( 프렌치 샤토 형태의 벽수산장 양관의 경우 옥인동 47-468 번지 즈음에 위치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송석원(松石園)’으로 불리던 명승지로, 원래는 옥류동 계곡을 의미하는 ‘옥계(玉溪)’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 송석원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송석원 일대는 조선 후기 중인 계층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 ‘송석원시사’라 불리는 문학 모임이 활동하던 장소였다. 이는 중인 계층이 주도한 문예 활동의 중심지로 평가되며, 이른바 조선 중인의 ‘문예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17년경 이 지역 바위에 남긴 예서체 각자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이 일대는 인왕산 자락의 옥류동 계곡과 인접해 경관이 뛰어나, 조선시대 양반과 중인들이 즐겨 찾던 유람지였다. 오늘날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의 핵심 구역 중 하나로, 전통적인 도시 경관과 문화적 유산이 중첩된 장소로 평가된다.

근대기에 들어 송석원 일대의 토지는 순종의 정후(正后)인 순명효황후 민씨의 소유였으나, 1904년 사망 이후 여러 차례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은사금 46만 원을 들여 1910년경 이 지역을 매입하였다. 윤덕영은 옥인동 일대의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하여, 1917년에는 약 49.5%, 1927년에는 약 53.54%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성된 옥동 백미원 신건옥, 즉 벽수산장은 서촌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근대기 토지 소유 구조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파일:옥동백미원1926년이미지.jpg파일:옥동-백미원-남향-사진-컬러-복원.jpg
1926년 신문 보도 사진에 컬러 채색1951년 사진에 컬러 채색

3. 명칭

해당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1914년에 작성된 도면에는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초기의 정식 명칭은 ‘옥동백미원신건옥’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이 건축물이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지명과 함께 ‘한양 아방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이 건물이 지니고 있던 규모와 화려함을 반영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한편,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명칭은 소유자였던 윤덕영(尹德榮)의 호 ‘벽수(碧樹)’에서 유래했다.
파일:옥동 백미원 정면도 1914년 작성.png
서울 역사 박물관 소장 1914년 작성된 도면 '옥동 백미원 신건옥'으로 명시돼있다

4. 건축적 특징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 즉 벽수산장 양관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 즉 벽수산장 양관(洋館)은 동아시아에서 확인되는 사례 가운데 보기 드문 프랑스식 정통 ‘샤토(château)’ 형식을 충실히 반영한 건축물이다. ‘샤토’는 프랑스어로 성(城)을 의미하는 단어로, 중세에는 방어적 기능을 지닌 성곽 건축을 지칭하였으나 근대 이후에는 성을 개조하거나 새롭게 건설한 귀족 및 대지주의 대저택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벽수산장의 양관(洋館) 건물은 프랑스 건축가의 설계에 기반하여 건립됐다. 서울역사박물관 도면에 따르면 1903년 프랑스 설계도 원본에는 설계자의 서명이 ‘S. Silberstein’ 또는 ‘Hilberstein’으로 판독되며,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설계도 하단에는 “Dressé par l’architecte soussigné · Diplômé par le gouvernement · Paris le 12 janvier 1903”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으며, 이는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DPLG)에 의해 작성된 도면임을 의미한다.
파일:1903년옥동백미원신건옥프랑스도면2.png
1903년 프랑스 건축가가 작성하고 '민영찬'주프랑스 대한제국 공사가 입수한 설계도

이 설계도는 1902년 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의 남동생인 주프랑스·주벨기에 공사로 임명된 민영찬(閔泳瓚, 1874~1948)이 프랑스에서 입수한 것으로 전해지며, 프랑스 건축가의 서명이 포함된 설계도 9장과 청사진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1914년에는 ‘옥동백미원신건옥정면도(玉洞百美園新建屋正面圖)’를 비롯한 정면도, 후면도, 좌·우측면도 등 1:100 축척의 도면이 작성되었으며, 이는 1903년 프랑스 원안을 일부 변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해당 건축은 민영찬이 프랑스에서 입수한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1913년 옥인동 부지에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아시아 지역에서 프랑스‘샤토’ 양식으로 알려진 건축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프랑스 성채의 외관을 참고하여 현지에서 재해석된 사례다. 이에 비해 벽수산장은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가 작성한 원 설계도를 기반으로 건립된 점에서, 설계 원형이 직접적으로 이식된 사례로 건축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파일:백미원_건물_평면도_1914년본_모사.png
1914년 백미원 건물 1층·2층 평면도 참고용 모사도


현재 민간에 백미원 건물의 평면 도면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2] 해당 도면은 지층(地層, 지하층), 1층(一層), 2층(二層), 옥층(屋層, 옥탑층)의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4년본과 1935년본이 각각 존재하여 총 8장이 전해진다.
송석원 벽수산장 1914년 조선 한양아방궁 본관 백미원(百美園) 평면도 원본

해당 경매 업체의 설명에 따르면, 본 설계도와 관련된 일화도 전해진다. 2013년 청주의 한 소장자가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이 백미원 건물의 설계도 및 입면도 등을 근대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였으나, 문화재위원회 일부 위원이 이를 '친일 관련 자료'로 판단하며 반대함에 따라 지정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문화재 지정 신청 대상이었던 설계도 묶음에는 핵심 자료인 평면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경매 업체를 통해 공개된 도면이 바로 해당 평면도 원본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건물 내부 구조를 포함한 전체 설계 구성이 보다 완전한 형태로 확인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5. 건축가 추정

서울역사박물관 도면에 소개된 1903년 작성된 벽수산장(옥동 백미원 신건옥) 설계도 하단의 서명 및 기재 문구를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INHA)의 AGORHA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한 결과, 해당 설계자는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건축가 이시도르 이스라엘 실버스타인(Isidor Israël Silberstein, 활동명 Jean I. Silberstein, 1868~1916)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도면에 기재된 'Diplômé par le gouvernement(정부 공인 건축사)'라는 표현은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건축과 졸업자에게 수여되는 DPLG 학위를 의미한다. 실버스타인은 1890년부터 입학을 시도하여 1892년 8월 1일 합격하였으며, 1898년 12월 16일 해당 학위를 취득(제48기)한 공식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도면 작성 시점인 1903년은 그가 파리에서 S.A.D.G. (정부공인건축사협회) 및 Association Taylor의 종신 회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개된 1903년도 프랑스 벽수산장 양관 도면에 기재된 서명은 'Hilberstein' 혹은 'Silberstein'으로 판독되는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한 DPLG 건축가 중 유사한 철자를 가진 인물은 실버스타인이 유일하다. 특히 그가 루마니아 출신 유학생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성(姓)의 철자를 변용하거나 활동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동시기 문헌에서도 철자의 미세한 차이가 발견된다.

또한 그는 에콜 데 보자르 재학 시절, 입학시험 과목인 ‘궁전 정면의 문(Porte d'entrée d'une façade de palais)’을 시작으로 1급 과정에서 ‘장식 조형(Ornement modelé)’ 부문 2등 메달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고전주의 장식성과 정교한 설계 교육을 받았다. 이는 백미원 신건옥 설계도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대칭성과 높은 수준의 보자르 양식 디테일과도 궤를 같이한다.

AGORHA 자료에 따르면 실버스타인은 1902년부터 1907년까지 파리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며 개인 저택(Maisons particulières) 등을 설계하였고, 1908년부터 1914년까지는 프랑스 서남부 생트(Saintes)에서 활동했다. 이후 1914년 당시 프랑스 건축 양식이 크게 유행하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1916년 사망하였다.
파일:프랑스아고라인하.jpg { AGORHA(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 - 이시도르 실버스타인 상세 기록}
(Institut National d'Histoire de l'Art 소장 자료)

해당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시도르 실버스타인의 다음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AGORHA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실버스타인의 졸업 설계 도면은 당시 우수 작품들을 엄선하여 발행하던 아르망 게리네(Armand Guérinet) 출판사의 도판집 『Les Diplômes d'Architecte en France』(프랑스 건축사 학위 작품집)에 수록되었다. 해당 자료는 당대 최고의 설계안들을 고화질 사진판으로 엮은 권위 있는 포트폴리오로, 실버스타인의 작품은 도판(Planches) 238번부터 245-bis 사이에 상세히 실려 있다.

수록된 설계안의 주제는 “Un hôtel pour deux artistes (건축가와 화가를 위한 저택)”이다. 이는 두 예술가의 주거와 작업실을 결합한 복합적인 공간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당시 에콜 데 보자르가 지향하던 고전주의적 위계와 화려한 장식미가 집약된 수작으로 평가받아 출판물에 박제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계 이력은 벽수산장 양관 백미원 신건옥이 단순한 모방을 넘어 당대 유럽 건축의 정점에 있던 전문가의 손길을 거쳤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6. 설계도 입수와 형성 배경

벽수산장 양관 (옥동 백미원 신건옥)의 설계도는 대한제국기 외교관 활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유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해당 건축의 설계도는 대한제국 시기인 광무 8년 (서기 1904년)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이자 주프랑스 공사로 파견되었던 민영찬(閔泳瓚, 1874~1948)에 의해 입수된 것으로 서술된다.

기사에 따르면, 광무 연간 대한제국이 근대적 외교 체제를 구축하며 각국에 공사 및 외교관을 파견하던 시기, 민영찬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면서 현지의 화려한 귀족 저택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이와 같은 형태의 저택을 건립하려는 구상을 갖고, 프랑스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입수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공사관이 철수되었고, 민영찬 역시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일정 기간(2년) 해외(상해)에 체류하다 귀국하였으나, 재정적 한계로 인해 해당 설계를 실제 건축으로 실현하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조선일보』의 기록은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자료를 통해 일정 부분 확인된다. 박물관이 소장한 ‘1903년 프랑스 원안 설계도’에는 설계자의 명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명은 ‘S. Silberstein’ 또는 ‘Hilberstein’으로 판독되며,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에 의해 작성된 도면으로 추정된다.

이 설계도는 이후 윤덕영에 의해 입수되어 옥인동 일대에 건립된 벽수산장의 설계 기반으로 활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로 인해 해당 건축물은 단순한 사적 별장을 넘어, 대한제국기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외교적 경험과 서구 건축에 대한 동경이 반영된 사례로 해석된다.

한편 벽수산장은 일반적으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의 초호화 별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기원에는 대한제국 시기 외교관이 서구 문물을 접하며 형성한 주거 이상과 근대적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국제 사회 속에서 근대 국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7. 연못

벽수산장 일대에는 대규모 조경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남서쪽에는 현재 수성동계곡 인근 주차장 부근에 약 200평 규모의 인공 연못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연못은 물을 채워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당시 저택의 호화로운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요소로 평가된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우량이 많은 시기에는 연못의 둑이 붕괴되어 주변 민가에 침수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1914년 『매일신보』에는 실제로 연못이 터지면서 인근 주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의 보도가 확인된다.

또한 이러한 조경 시설과 부속 공간은 건물 완공 이전부터 일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윤덕영은 벽수산장 내 프랑스식 양관인 ‘옥동 백미원 신건옥’을 중심 공간으로 활용하기보다는, 그 북측에 위치한 한옥 건물에서 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주변 건축물

벽수산장 일대의 건축과 조경은 단일 건물에 국한되지 않고, 다수의 건물과 광범위한 정원 공간으로 구성된 복합 별장 단지였다. 중심에는 프랑스식 양관 건축인 ‘옥동 백미원 신건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 외에도 여러 채의 한옥 및 부속 건물이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파일:벽수산장-전체-지도-현재-기준.png
벽수산장 주요 건축물 배치 토포 지도 현재 지도 기준

8.1. 일양정 (日陽亭)

벽수산장 단지의 실질적인 본채 역할을 했던 대규모 한옥으로, 99칸 한옥으로도 알려져 있다. 윤덕영은 서양식 석조 건물인 양관(신건옥)이 완공되자마자 자신이 대표로 있던 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에 사무실로 대여해주었고, 정작 본인은 양관 뒤편에 위치한 일양정에서 주로 기거하며 생활하였다. 이 건물은 과거 이 자리에 있던 ‘청휘각(淸暉閣)’을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신축된 것이다.

일양정은 벽수산장의 사랑채 역할을 하며 손님 접대나 연회 등 윤덕영의 공적인 사회 활동이 이루어진 핵심 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의 풍광에 깊은 애착을 보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 18가지를 읊은 「일양정십팔영(日陽亭十八詠)」을 비롯해 일양정을 주제로 한 여러 글을 남기기도 했다.

건축적으로는 전통 한옥의 틀을 따르면서도 근대적 기법이 도입된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준다. 약 1.5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장대석과 벽돌 조적을 혼합하여 축조되었고, 정면 5칸 규모의 구조를 가지며 처마 끝에는 빗물받이가 설치되는 등 실용적인 변화도 나타난다. 또한 기둥마다 주련을 걸어 상류층 가옥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

건립 시기는 1875년설과 벽수산장 조성기인 1910년설이 병존하며, 1915년 지형도 분석 결과 옥인동 47-269·161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69년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으나, 해당 부지에는 일양정 철거 후 필지를 분할하여 신축·분양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형 한옥 여러 동이 남아 있다.

8.2. 박노수 가옥 (구 윤덕영 저택 부속시설)

현존 건물로는 윤덕영의 막내딸을 위해 지어진 서양식 주택이 있으며, 이는 현재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당 건물은 조선인 근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3. 옥인동 윤씨 가옥 (옥인동 서용택가)

옥인동 47-133번지에 위치한 한옥으로, 윤덕영의 소실을 위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과거 순정효황후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1977년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이후 사실관계가 바로잡히며 1997년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여 ‘서울한옥 4.0 재창조 추진계획’의 일환으로 리모델링 및 개방형 공간 조성을 추진 중이며, 이 건물의 양식은 남산골한옥마을 내에 동일한 형태로 복원되어 있다.

파일:옥인동윤씨가옥비교표.png

8.4. 조경 및 기타 부속 시설

1940년경 벽수산장 일대의 조경을 연구한 윤평섭의 「송석원에 대한 연구」(1984)에 따르면, 이 단지는 하나의 거대한 조경 예술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진입로를 따라 벚나무가 식재되었고, 개나리·은행나무·느티나무 등이 주요 수종으로 활용되었으며, 양관 앞 마당에는 단풍나무가, 연못 주변에는 수양버들이 배치되었다. 사각형 연못 내부에는 거북 형상의 조형물인 구대(龜臺)가 있었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인왕산 방향으로 가채우물, 관리인 주택, 능금나무 과원 등이 넓은 잔디 광장과 어우러져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근대기 상류층 별장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9. 연표

* 1903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계도 작성
* 1904년: 대한제국 주불 공사 민영찬이 설계도 입수
* 1910년: 윤덕영이 민영찬의 설계도를 입수하여 옥인동 대지 매입
* 1913년: 착공
* 1921년: 외관 완공
* 1935년: 준공 · 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 임대
* 1940년: 윤덕영 사망 후 증여
* 1945년: 미쓰이광산에 매각
* 1945년: 해방 후 덕수병원에 불하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 숙소 사용
* 1954년: UNCURK 본부 사용
* 1966년: 화재 발생
* 1973년: 철거

10. 보존 및 흔적

현재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는 벽수산장과 관련된 석조 구조물 및 일부 건축 흔적이 산재해 남아 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잔존 부자재를 수집·정리하여 일정 공간에 집약적으로 보존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제국기인 1902년(광무 6년), 외교관 민영찬프랑스벨기에에 파견되었을 당시 입수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건축 설계도가 현존한다. 해당 설계도는 1903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모두 포함된 정밀 도면으로,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착공 직전에 일부 수정이 가해진 별도의 설계도 역시 전해지고 있어, 당시 건축 계획의 구체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완공 이후인 1935년 본 건물이 세계홍만자회 조선본부가 되면서, 본 건물 설계를 변경하면서 그린 평면도 원본 역시 민간에 남아있다. 민간 경매 업체 제공 정보에 따르면, 경매물품 : 송석원 벽수산장 1914년 조선 한양아방궁 본관 백미원(百美園) 평면도 원본 (근대문화재 보물급) 1914년도 평면도 4점 1935년 평면도 4점 합 8점이 남아있으며,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안 설계에 근거한 건축물 복원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다만 복원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엇갈릴 수 있다. 한편에서는 윤덕영의 친일 행적과 연관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로 인식하여, 복원보다는 부재 보존 중심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으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대한제국기 광무개혁기의 국제 교류를 통해 입수된 희귀한 서양 건축물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건축사적 가치에 기반한 복원 가능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1]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DPLG)[2] [http://www.e824.com/auction/index.html?go_url=./item_info/itemdetail.html&p_code=AH-B0--491307 관인 허가 문화재 매매 경매 업체 물건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