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476b92,#476b92><colcolor=#fff,#e4cf5d> 벽수산장 碧樹山莊 | Byeoksu Sanj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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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수산장의 양관인 백미원 모습 | |
| 정식명칭 | 옥동백미원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1] |
| 국가 | → → |
| 설계 | 1903년 |
| 준공 | 1935년[2] |
| 철거 | 1973년 |
| 공사비 | 17~30만 원[3] |
| 설계자 | S. Silberstein (추정) [4] |
| 기능 | 윤덕영 저택 (1935년 ~ 1940년) |
| 미츠코시 백화점 별장 및 숙소 (1940년 ~ 1945년) | |
| 언커크 본부 (1954년 ~ 1966년 4월 5일) | |
| 화재 후 방치 및 철거 (1966년 4월 6일 ~ 1973년) | |
| 주소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 | |
1. 개요
벽수산장(碧樹山莊)은 일제강점기 시기, 인물 윤덕영이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 조성한 대규모 저택 단지이다. 이 단지는 여러 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복합 주거 공간으로, 당대 상류층 주거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이 가운데 ‘백미원(百美園)’은 벽수산장 내부에 건립된 서양식 저택, 즉 양관(洋館)을 지칭하며, 정식 명칭은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서양식 건물을‘벽수산장’이라 부르거나, 해당 지역의 옛 지명에 따라 ‘송석원(松石園)’으로도 언급되기도 한다.
건축적으로는 프랑스 귀족 주거 양식인 샤토(Château) 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건물로, 대한제국기 외교 경로를 통해 입수된 프랑스 귀족의 설계도가 한국에서 실제 건축으로 구현된 드문 사례다.
2. 부지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은 일명 ‘벽수산장’으로 알려진 건축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 ( 프렌치 샤토 형태의 벽수산장 양관의 경우 옥인동 47-468 번지 즈음에 위치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송석원(松石園)’으로 불리던 명승지로, 원래는 옥류동 계곡을 의미하는 ‘옥계(玉溪)’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 송석원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송석원 일대는 조선 후기 중인 계층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 ‘송석원시사’라 불리는 문학 모임이 활동하던 장소였다. 이는 중인 계층이 주도한 문예 활동의 중심지로 평가되며, 이른바 조선 중인의 ‘문예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17년경 이 지역 바위에 남긴 예서체 각자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이 일대는 인왕산 자락의 옥류동 계곡과 인접해 경관이 뛰어나, 조선시대 양반과 중인들이 즐겨 찾던 유람지였다. 오늘날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의 핵심 구역 중 하나로, 전통적인 도시 경관과 문화적 유산이 중첩된 장소로 평가된다.
근대기에 들어 송석원 일대의 토지는 순종의 정후(正后)인 순명효황후 민씨의 소유였으나, 1904년 사망 이후 여러 차례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은사금 46만 원을 들여 1910년경 이 지역을 매입하였다. 윤덕영은 옥인동 일대의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하여, 1917년에는 약 49.5%, 1927년에는 약 53.54%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성된 옥동 백미원 신건옥, 즉 벽수산장은 서촌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근대기 토지 소유 구조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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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신문 보도 사진에 컬러 채색 [5] | 1951년 사진에 컬러 채색 [6] |
3. 명칭
해당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1914년에 작성된 도면에는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초기의 정식 명칭은 ‘옥동백미원신건옥’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1921년 7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해당 건축물을 명물 아방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이 건축물을 송석원 양관(松石園洋館)이라 표기하는 한편, 한양 아방궁(阿房宮)이라는 별칭으로도 언급하였다. 이어 『매일신보』 1936년 5월 10일자 기사에서도 ‘궁궐도 못 미칠 조선 아방궁’ 또는 윤덕영 자작저(尹德榮子爵邸) 등으로 표기되었다.
한편,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명칭은 소유자였던 윤덕영(尹德榮)의 호 ‘벽수(碧樹)’에서 유래했다.
해방 이후에는 유엔(UN) 직속 산하기구 한국통일부흥위원단[7] 언커크[8] 1954년 6월부터 1966년 4월까지 청사로 사용하면서 '언커크' '엉커크'로 불리기도 했다. 1964년 6월 14일자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 보도에 따르면, 당시 UNCURK(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 본부로 사용되던 벽수산장 양관의 명칭을 ‘UNCURK Castle’로 표기하며 해당 건물이 가진 유럽풍의 아름다움과 한국 근대사에서의 상징성을 소개한 바 있다.[9]
| 1914년 작성된 도면 '옥동 백미원 신건옥'으로 명시돼있다[10] |
4. 역사
1903년 프랑스에서 벽수산장 건립의 기반이 된 서양식 저택 설계도가 작성되었으며, 해당 설계도는 대한제국 외교관인 민영찬이 파리에서 입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설계는 프랑스 귀족 저택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민영찬이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 박탈과 가문 몰락 등으로 인해 실제 건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이후 해당 설계도는 윤덕영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1910년경 옥인동일대 토지 매입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건립이 추진되었다. 1913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17년 초에는 양관 건물의 외형이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밑에 초가집과 비교되는 풍경[11] |
1940년 윤덕영이 사망하면서 가족들은 대규모 부지의 저택과 정원의 유지에 따른 경재적 부담 등으로 재정 상황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1940년경에는 일본의 미츠코시 백화점 관련 시설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 기업이 경성의 대형 저택과 부지를 활용하던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벽수산장의 소유가 바뀌면서 여러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미쓰이 계열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병원 시설로 활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군 숙소로 사용된 사례가 전해진다.
| 국제연합 한국재건단 본부로 쓰던 당시 회의하는 모습[12] |
| <bgcolor=#476b92,#476b92> | <bgcolor=#476b92,#476b92> |
| 화재를 진압중인 모습[15] | 전소해버린 내부 |
| 화재후 방치되고 있는 모습 |
5. 건축적 특징
옥동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 즉 벽수산장 양관 백미원 신건옥(玉洞百美園新建屋), 즉 벽수산장 양관(洋館)은 동아시아에서 확인되는 사례 가운데 보기 드문 프랑스식 정통 ‘샤토(château)’ 형식을 충실히 반영한 건축물이다. ‘샤토’는 프랑스어로 성(城)을 의미하는 단어로, 중세에는 방어적 기능을 지닌 성곽 건축을 지칭하였으나 근대 이후에는 성을 개조하거나 새롭게 건설한 귀족 및 대지주의 대저택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이 건물은 일반적인 도시형 저택보다는 샤토(Château), 즉 프랑스식 성관이나 대저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단순히 "크고 화려해서"가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이 건물을 샤토라고 부를 수 있는 명확한 특징들이 있다.
- 1. 타워
- 2. '브리크 에 피에르(Brique-et-Pierre)' 양식
- 3. 지붕의 화려한 크레스팅 장식
- 4. 입지적 암시
벽수산장의 양관(洋館) 건물은 프랑스 건축가의 설계에 기반하여 건립됐다. 서울역사박물관 도면에 따르면 1903년 프랑스 설계도 원본에는 설계자의 서명이 ‘S. Silberstein’ 또는 ‘Hilberstein’으로 판독되며,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설계도 하단에는 “Dressé par l’architecte soussigné · Diplômé par le gouvernement · Paris le 12 janvier 1903”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으며, 이는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DPLG)에 의해 작성된 도면임을 의미한다. [17]
| 1903년 프랑스 건축가가 작성하고 '민영찬'주프랑스 대한제국 공사가 입수 추정 설계도 |
김은주 아키비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프랑스 도면은 얼마전에 발견된 도면으로 전해진다 [18]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기사의 기사 내용이 맞다면 이 설계도는 1902년 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의 남동생인 주프랑스·주벨기에 공사로 임명된 민영찬(閔泳瓚, 1874~1948)이 프랑스에서 입수한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 건축가의 서명이 포함된 설계도 9장과 청사진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1914년에는 ‘옥동백미원신건옥정면도(玉洞百美園新建屋正面圖)’를 비롯한 정면도, 후면도, 좌·우측면도 등 1:100 축척의 도면이 작성되었으며, 이는 1903년 프랑스 원안을 일부 변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기사 에 따르면, 해당 건축은 민영찬이 프랑스에서 입수한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1913년 옥인동 부지에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아시아 지역에서 프랑스‘샤토’ 양식으로 알려진 건축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프랑스 성채의 외관을 참고하여 현지에서 재해석된 사례다. 이에 비해 벽수산장은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가 작성한 원 설계도를 기반으로 건립된 점에서, 설계 원형이 직접적으로 이식된 사례로 건축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 1914년 백미원 건물 1층·2층 평면도 참고용 모사도 |
현재 민간에 백미원 건물의 평면 도면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9] 해당 도면은 지층(地層, 지하층), 1층(一層), 2층(二層), 옥층(屋層, 옥탑층)의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4년본과 1935년본이 각각 존재하여 총 8장이 전해진다.
송석원 벽수산장 1914년 조선 한양아방궁 본관 백미원(百美園) 평면도 원본
해당 경매 업체의 설명에 따르면, 본 설계도와 관련된 일화도 전해진다. 2013년 청주의 한 소장자가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이 백미원 건물의 설계도 및 입면도 등을 근대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였으나, 문화재위원회 일부 위원이 이를 '친일 관련 자료'로 판단하며 반대함에 따라 지정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문화재 지정 신청 대상이었던 설계도 묶음에는 핵심 자료인 평면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경매 업체를 통해 공개된 도면이 바로 해당 평면도 원본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건물 내부 구조를 포함한 전체 설계 구성이 보다 완전한 형태로 확인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위 전문 업체의 설명에 따르면 벽수산장의 과거 외장에 대한 재료 묘사 설명이 등장하는데, “건물의 내외벽은 대리석과 황금, 그리고 진기한 보석인 옥으로 치장되었다”고 전한다. 다만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사료적 검증은 필요하나, 실제로 이러한 재료가 사용되었거나, 이에 준하는 고급 자재가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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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모습대로 복원한 벽수산장 모형의 모습[20] | |
6. 건축가 추정
서울역사박물관 도면에 소개된 1903년 작성된 벽수산장 양관 설계도 하단의 서명 및 기재 문구를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INHA)의 AGORHA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한 결과, 해당 설계자는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건축가 이시도르 이스라엘 실버스타인(Isidor Israël Silberstein, 활동명 Jean I. Silberstein, 1868~1916)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학술적 검토가 요구된다.도면에 기재된 'Diplômé par le gouvernement(정부 공인 건축사)'라는 표현은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건축과 졸업자에게 수여되는 DPLG 학위를 의미한다. 실버스타인은 1890년부터 입학을 시도하여 1892년 8월 1일 합격하였으며, 1898년 12월 16일 해당 학위를 취득(제48기)한 공식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도면 작성 시점인 1903년은 그가 파리에서 S.A.D.G. (정부공인건축사협회) 및 Association Taylor의 종신 회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개된 1903년도 프랑스 벽수산장 양관 도면에 기재된 서명은 'Hilberstein' 혹은 'Silberstein'으로 판독되는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한 DPLG 건축가 중 유사한 철자를 가진 인물은 실버스타인이 유일하다. 특히 그가 루마니아 출신 유학생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성(姓)의 철자를 변용하거나 활동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동시기 문헌에서도 철자의 미세한 차이가 발견된다.
또한 그는 에콜 데 보자르 재학 시절, 입학시험 과목인 ‘궁전 정면의 문(Porte d'entrée d'une façade de palais)’을 시작으로 1급 과정에서 ‘장식 조형(Ornement modelé)’ 부문 2등 메달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고전주의 장식성과 정교한 설계 교육을 받았다. 이는 백미원 신건옥 설계도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대칭성과 높은 수준의 보자르 양식 디테일과도 궤를 같이한다.
AGORHA 자료에 따르면 실버스타인은 1902년부터 1907년까지 파리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며 개인 저택(Maisons particulières) 등을 설계하였고, 1908년부터 1914년까지는 프랑스 서남부 생트(Saintes)에서 활동했다. 이후 1914년 당시 프랑스 건축 양식이 크게 유행하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1916년 사망하였다.
| | { AGORHA(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 - 이시도르 실버스타인 상세 기록} (Institut National d'Histoire de l'Art 소장 자료) |
해당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시도르 실버스타인의 다음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AGORHA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실버스타인의 졸업 설계 도면은 당시 우수 작품들을 엄선하여 발행하던 아르망 게리네(Armand Guérinet) 출판사의 도판집 『Les Diplômes d'Architecte en France』(프랑스 건축사 학위 작품집)에 수록되었다. 해당 자료는 당대 최고의 설계안들을 고화질 사진판으로 엮은 권위 있는 포트폴리오로, 실버스타인의 작품은 도판(Planches) 238번부터 245-bis 사이에 상세히 실려 있다.
수록된 설계안의 주제는 “Un hôtel pour deux artistes (건축가와 화가를 위한 저택)”이다. 이는 두 예술가의 주거와 작업실을 결합한 복합적인 공간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당시 에콜 데 보자르가 지향하던 고전주의적 위계와 화려한 장식미가 집약된 수작으로 평가받아 출판물에 박제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계 이력은 벽수산장 양관 백미원 신건옥이 단순한 모방을 넘어 당대 유럽 건축의 정점에 있던 전문가의 손길을 거쳤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7. 설계도 입수와 형성 배경
벽수산장 양관 (옥동 백미원 신건옥)의 설계도는 대한제국기 외교관 활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유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기사에 따르면, 해당 건축의 설계도는 대한제국 시기인 광무 8년 (서기 1904년)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이자 주프랑스 공사로 파견되었던 민영찬(閔泳瓚, 1874~1948)에 의해 입수된 것으로 서술된다.기사에 따르면, 광무 연간 대한제국이 근대적 외교 체제를 구축하며 각국에 공사 및 외교관을 파견하던 시기, 민영찬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면서 현지의 화려장엄한 귀족 저택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이와 같은 형태의 저택을 건립하려는 구상을 갖고, 프랑스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입수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공사관이 철수되었고, 민영찬 역시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일정 기간(2년) 해외(상해)에 체류하다 귀국하였으나, 재정적 한계[21]로 인해 해당 설계를 실제 건축으로 실현하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조선일보』의 기록은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설명 자료 를 통해 일정 부분 확인된다. 박물관이 설명한 ‘1903년 프랑스 원안 설계도’에는 설계자의 명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명은 ‘S. Silberstein’ 또는 ‘Hilberstein’으로 판독되며,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에 의해 작성된 도면으로 추정된다.
이 설계도는 이후 윤덕영에 의해 입수되어 옥인동 일대에 건립된 벽수산장의 설계 기반으로 활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로 인해 해당 건축물은 단순한 사적 별장을 넘어, 대한제국기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외교적 경험과 서구 건축에 대한 동경이 반영된 사례로 해석된다.
한편 벽수산장은 일반적으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의 초호화 별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기원에는 대한제국 시기 외교관이 서구 문물을 접하며 형성한 주거 이상과 근대적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국제 사회 속에서 근대 국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 벽수산장 양관의 1903년 원설계도와 1914년 도면은 비례상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22] |
두 도면 모두 고전주의적 비례미를 갖추고 있으나, 시각적으로는 1903년 도면이 1914년 도면보다 황금비
에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균형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엄밀한 실측 수치에 따른 정량적 판정보다는, 입면 구성과 매스 분할, 수직·수평 비례를 바탕으로 한 시각적 분석에 가깝다.
우선 전체적인 가로·세로 비율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1914년 도면은 건물의 가로 길이가 세로 높이에 비해 크게 확장되어 있어 웅장함과 안정감을 강조하는 반면, 황금직사각형에 가까운 압축된 비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반대로 1903년 도면은 첨탑을 제외한 본체를 기준으로 볼 때 가로와 세로의 비례가 상대적으로 응축되어 있으며, 지나치게 길거나 높지 않은 인상을 주어 황금비 특유의 시각적 안정감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 1903년 설계도와 1914년 변형 도면 황금비(1:1.618) 기준 비교 분석 이미지 [23] |
부분 구성의 배분에서도 차이가 관찰된다. 1903년 도면은 좌측 돌출부, 중앙 몸체, 우측 타워가 이루는 비대칭적 구성이 비교적 긴밀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도 황금분할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이에 비해 1914년 도면은 중앙부와 좌우 날개의 수평적 확장이 더욱 두드러져, 역동적인 비례감보다는 규모감과 안정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있다.
수직적 리듬 역시 1903년 도면에서 더 선명하게 읽힌다. 지붕층, 창호층, 기단부의 높이 변화가 단계적으로 전개되며, 첨탑 또한 본체와의 관계 속에서 시각적으로 자연스러운 강조점 역할을 한다. 이는 황금비나 피보나치 수열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러한 비례 체계와 유사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두 안 모두 높은 수준의 고전적 입면 구성을 보여주지만, 황금비 특유의 역동적이면서도 응축된 균형감은 1903년 설계안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1903년도 도면에 기재된 정보를 바탕으로, 해당 설계안이 파리 보자르 계열의 교육을 받은 설계자에 의해 작성된 것이 맞다면, 이는 20세기 초 보자르 건축의 비례 감각과 조형 원리가 비교적 잘 반영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1914년 설계안은 규모를 키우고 수평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된, 보다 실현 단계의 성격이 강한 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24]
8. 연못
벽수산장 일대에는 대규모 조경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남서쪽에는 현재 수성동계곡 인근 주차장 부근에 약 200평 규모의 인공 연못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연못은 물을 채워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당시 저택의 호화로운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요소로 평가된다.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우량이 많은 시기에는 연못의 둑이 붕괴되어 주변 민가에 침수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1914년 『매일신보』에는 실제로 연못이 터지면서 인근 주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의 보도가 확인된다.
또한 이러한 조경 시설과 부속 공간은 건물 완공 이전부터 일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윤덕영은 벽수산장 내 프랑스식 양관인 ‘옥동 백미원 신건옥’을 중심 공간으로 활용하기보다는, 그 북측에 위치한 한옥 건물에서 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 주변 건축물
벽수산장 일대의 건축과 조경은 단일 건물에 국한되지 않고, 다수의 건물과 광범위한 정원 공간으로 구성된 복합 별장 단지였다. 중심에는 프랑스식 양관 건축인 ‘옥동 백미원 신건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 외에도 여러 채의 한옥 및 부속 건물이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bgcolor=#476b92,#476b92> | <bgcolor=#476b92,#476b92> |
| 1984년 윤평섭의 벽수산장 복원도[25] | 벽수산장 주요 건축물 배치 토포 지도 현재 지도 기준 |
* 위 도면 연못 상단에 느티나무 가 표시돼 있는데 현재 방지 연못 부근으로 추정되는 옥인동 182 번지 옥인연립 1동 앞에 수령미상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현존한다. 나무의 크기로 보아 최소 150년에서 200년 이상 된 고목 으로 추정된다.
9.1. 일양정 (日陽亭)
벽수산장 단지의 실질적인 본채 역할을 했던 대규모 한옥으로, 99칸 한옥으로도 알려져 있다. 윤덕영은 서양식 석조 건물인 양관(신건옥)이 완공되자마자 자신이 대표로 있던 세계홍만자회(世界紅卍字會)[26] 조선지부에 사무실로 대여해주었고, 정작 본인은 양관 뒤편에 위치한 일양정에서 주로 기거하며 생활하였다. 이 건물은 과거 이 자리에 있던 ‘청휘각(淸暉閣)’을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신축된 것이다.일양정은 벽수산장의 사랑채 역할을 하며 손님 접대나 연회 등 윤덕영의 공적인 사회 활동이 이루어진 핵심 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의 풍광에 깊은 애착을 보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 18가지를 읊은 「일양정십팔영(日陽亭十八詠)」을 비롯해 일양정을 주제로 한 여러 글을 남기기도 했다.
건축적으로는 전통 한옥의 틀을 따르면서도 근대적 기법이 도입된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준다. 약 1.5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장대석과 벽돌 조적을 혼합하여 축조되었고, 정면 5칸 규모의 구조를 가지며 처마 끝에는 빗물받이가 설치되는 등 실용적인 변화도 나타난다. 또한 기둥마다 주련을 걸어 상류층 가옥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
건립 시기는 1875년설과 벽수산장 조성기인 1910년설이 병존하며, 1915년 지형도 분석 결과 옥인동 47-269·161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1969년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으나, 해당 부지에는 일양정 철거 후 필지를 분할하여 신축·분양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형 한옥 여러 동이 남아 있다.
9.2. 박노수 가옥 (구 윤덕영 저택 부속시설)
| 박노수 미술관 전경 |
이는 현재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당 건물은 조선인 근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3. 옥인동 윤씨 가옥 (옥인동 서용택가)
옥인동 47-133번지에 위치한 한옥으로, 윤덕영의 소실을 위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과거 순정효황후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1977년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이후 사실관계가 바로잡히며 1997년 지정 해제되었다.현재는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여 ‘서울한옥 4.0 재창조 추진계획’의 일환으로 리모델링 및 개방형 공간 조성을 추진 중이며 관련영상, 이 건물의 양식은 남산골한옥마을 내에 동일한 형태로 복원되어 있다.
9.4. 벽수산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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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대 백미원 방향으로 찍은 정문 모습 | 벽수산장의 정문 기둥으로 현재는 4개 중 2개만 남아 있다. |
9.5. 조경 및 기타 부속 시설
1940년경 벽수산장 일대의 조경을 연구한 윤평섭의 「 송석원에 대한 연구」(1984)에 따르면, 이 단지는 하나의 거대한 조경 예술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진입로를 따라 벚나무가 식재되었고, 개나리·은행나무·느티나무 등이 주요 수종으로 활용되었으며, 양관 앞 마당에는 단풍나무가, 연못 주변에는 수양버들이 배치되었다. 사각형 연못 내부에는 거북 형상의 조형물인 구대(龜臺)가 있었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인왕산 방향으로 가채우물, 관리인 주택, 능금나무 과원 등이 넓은 잔디 광장과 어우러져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근대기 상류층 별장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10. 연표
| 벽수산장의 연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colbgcolor=#476b92><colcolor=white> 1903년 | 프랑스 파리에서 설계도 작성 |
| 1904년 | 대한제국 주불 공사 민영찬이 설계도 입수 | |
| 1910년 | 윤덕영이 민영찬의 설계도를 입수하여 옥인동 대지 매입 | |
| 1913년 | 착공 [27] | |
| 1917년 | 외관 완공[28] | |
| 1935년 | 준공·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 임대 | |
| 1940년 | 윤덕영 사망 후 증여 | |
| 1945년 | 미쓰이광산에 매각 | |
| 1945년 | 해방 후 덕수병원에 불하 | |
| 1950년 | 한국전쟁 당시 미군 숙소 사용 | |
| 1954년 | UNCURK 본부 사용 | |
| 1966년 | 화재 발생 | |
| 1973년 | 철거 |
11. 보존 및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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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오홍교의 난간석으로 알려져 있다[29] | 벽수산장 담장 부재와 돌계단 |
대한제국기인 1902년(광무 6년), 외교관 민영찬이 프랑스와 벨기에에 파견되었을 당시 입수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건축 설계도가 현존한다. 해당 설계도는 1903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모두 포함된 정밀 도면으로,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소개 되어 있다. 또한 착공 직전에 일부 수정이 가해진 별도의 설계도 역시 전해지고 있어, 당시 건축 계획의 구체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완공 이후인 1935년 본 건물이 세계홍만자회 조선본부가 되면서, 본 건물 설계를 변경하면서 그린 평면도 원본 역시 민간에 남아있다. 민간 경매 업체 제공 정보에 따르면, 경매물품 : 송석원 벽수산장 1914년 조선 한양아방궁 본관 백미원(百美園) 평면도 원본 (근대문화재 보물급) 1914년도 평면도 4점 1935년 평면도 4점 합 8점이 남아있으며,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안 설계에 근거한 건축물 복원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다만 복원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엇갈릴 수 있다. 한편에서는 윤덕영의 친일 행적과 연관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로 인식하여, 복원보다는 부재 보존 중심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으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대한제국기 광무개혁기의 국제 교류를 통해 입수된 희귀한 서양 건축물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건축사적 가치에 기반한 복원 가능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12. 여담
- 조선일보 1926년 5월 23일자 기사[30]에 따르면, 벽수산장은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이왕비)의 친정인 이본궁가(梨本宮家나시모토노미야) 측에 매매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만약 해당 거래가 실제로 성사되었더라면, 윤덕영 일가의 소유가 아니라 영친왕가의 자산, 혹은 이방자와 관련된 자산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 순종황제는 재위 기간인 1907년부터 1910년 사이 윤덕영에게 ‘벽수(碧樹)’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1909년 당시 윤덕영의 거처는 벽동 일대에 있었으며, 집 안에 오래된 소나무와 은행나무 등 수목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순종이 이를 보고 해당 호를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함께 어필 편액과 ‘벽수거사정’이라는 당호도 하사받았다.
| 심전 안중식, 1909년작 「벽수거사정도」 디지털 확대 복원본 |
- 윤덕영은 조선 후기 및 일제강점기의 화가인 안중식에게 관련 정경을 그리게 하였으며, 해당 그림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그림에는 당시 한옥의 구조와 세부 양식이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13. 대중매체
| 배경으로 벽수산장이 보인다 |
- 1953년 작품인 로마의 휴일을 따라한 1956년 작품 '서울의 휴일'[31]에 어느 배경으로 벽수산장이 보인다.
서울의 휴일 벽수산장 양관 배경 장면1
서울의 휴일 벽수산장 양관 배경 장면2
서울의 휴일 벽수산장 양관 배경 장면3
- 심윤경의 장편소설 《영원한 유산》의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1] 별명으로 송석원 양관(松石園 洋館), 언커크(UNCURK), 한양 아방궁, 뾰죽당으로 불렸다[2] 외관은 1917년 구축됐다고 신문 기사로 전한다.[3]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5~51억 원이다.[4]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DPLG) 서울역사박물관 도면에 따르면 1903년 프랑스 설계도 원본에는 설계자의 서명이 ‘S. Silberstein’ 또는 ‘Hilberstein’으로 판독되며,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됨[5] 본 이미지는 1926년 5월 23일자 보도 사진을 바탕으로 채색한 벽수산장 양관의 해석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관련 원 설계도 우하단에는 “Dressé par l’Architecte soussigné / Diplômé par le Gouvernement / Paris le 12 Janvier 1903”라는 문구가 확인되며, 1903년 1월 12일 파리에서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가가 작성한 설계도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해당 도면이 파리 보자르 계열의 설계 감각과 장식 원리를 반영한 안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에 따라 지붕의 크레스팅(cresting)과 피니얼(finial) 등 금속 장식 부위는 당시 프랑스의 왕족 저택, 대저택, 관공서급 건축물에서 활용되던 황동·신주 계열 금속 및 도뤼르(dorure, 금박) 장식 사례를 참고해 노란색 계열로 채색하였다. 크레스팅은 지붕 능선 장식, 피니얼은 첨탑이나 지붕 끝의 장식 마감 부재를 뜻한다. 후대 회화 작품에서는 해당 부위가 금색으로 표현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회화는 작가의 색채 해석이 개입된 재현물이며 황동·신주 계열 금속 역시 시간 경과에 따라 어둡거나 푸른빛으로 변색될 수 있으므로, 본 채색은 변색 이전의 초기 금속 장식 상태를 상정한 것이다. 외벽 색상의 경우,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 기사("매도설이 훤전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에 따르면 다갈색 연화제(벽돌조)의 3층 양관으로 기록되어 있다.[6] 본 이미지는 벽수산장 양관의 남서향 사진으로 알려진 1950년대 추정 흑백 원본 사진을 바탕으로 채색한 해석도이다. 외벽의 색상의 경우 후대에 전해진 컬러사진(채색 추정)본 등에서 붉은 벽돌색으로 전해지므로, 본 채색 역시 이를 참고하여 적갈색 계열로 처리하였다. 지붕과 장식 색채는 옥동 백미원 신건옥 관련 원 설계도에 나타나는 파리 보자르 계열의 설계 감각과 장식 요소를 참고하여 설정하였다. 특히 지붕의 크레스팅(cresting), 피니얼(finial), 도머 창 상부 장식 등 금속 장식 부위는 당시 프랑스의 왕족 저택, 대저택, 관공서급 건축물에서 활용되던 황동·신주 계열 금속 및 도뤼르(dorure, 금박) 장식 사례를 참고해 노란색 계열로 채색하였다. 크레스팅은 지붕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금속 장식, 피니얼은 첨탑이나 지붕 끝의 장식 마감 부재를 뜻한다. 후대 회화 작품에서는 해당 부위가 금색으로 표현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회화는 작가의 색채 해석이 개입된 재현물이며 황동·신주 계열 금속 역시 시간 경과에 따라 어둡거나 푸른빛으로 변색될 수 있으므로, 본 채색은 후대의 변색된 상태가 아니라 보다 초기의 금속 장식 상태를 상정한 것이다. 외벽 색상의 경우, 1926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 기사("매도설이 훤전되는 송석원 양관 내력담")에 따르면 다갈색 연화제(벽돌조)의 3층 양관으로 기록되어 있다.[7] 韓國統一復興委員團,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8] UNCURK[9] 관련 자료 이미지[10] 서울 역사 박물관 소개[11] 사진 밑쪽에 있는 양관은 윤덕영의 딸의 집인 박노수 가옥 이다.[12] 사진 속의 독특한 아치형 문과 벽난로, 화려한 조명 등은 이 건물이 당시 얼마나 호화스러운 건물이였는지를 보여준다.[13] UNCURK[14] UNCURK[15] 당시 화재 진압중 찍은 영상[16] “건물 내외부가 대리석과 황금, 그리고 보석등으로 치장되었다”는 구전은 전해진다.[17] 1903년 당시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인 DPLG(Diplômé par le Gouvernement)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교육 과정을 이수한 엘리트 건축가에게 수여되는 최고 권위의 면허였다. 당시 DPLG 건축가들은 단순한 기술자를 넘어 예술가이자 상류층의 네트워크를 공유하는 고위 전문직으로 대우받았으며, 주로 국가 프로젝트나 왕실, 신흥 부르주아의 대저택 설계를 전담했다. 1903년 벽수산장 양관의 설계도는 화려한 석조 조각과 높은 층고, 복잡한 맨사드 지붕(Mansard roof) 등 전형적인 보자르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저택 설계는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의 정교한 몰딩, 계단실 등 방대한 양의 세부 도면 작성을 필요로 했으며, 모든 도면을 수작업으로 제도하던 당시 환경을 고려할 때 막대한 설계 비용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영상 업로드 시점 2023. 9. 21 기준[19] 관인 허가 문화재 매매 경매 업체 웹사이트 [20] 해당 벽수산장 모형은 서촌공작소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66-161번지 3층)에 있다.[21] 민영찬 공사의 친형인 충정공 민영환공은 왕실의 근친이자 대한제국 최고의 부호이며 권세가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해 순절한 뒤 가산 대부분을 탈취당했다. 이는 친일파 송병준이 유족을 기망해 재산을 강탈한 사건으로, 당시 일제 사법부의 묵인과 비호 아래 자행된 비극이었다.[22] 1903년 원설계도는 파리 보자르 계열 공인 건축가가 작성한 설계도로 알려져 있으며, 1914년 도면은 실제 건립을 위해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해당 수정 도면에 대해서는 독일인이 관여하였다는 설도 있다.[23] 본 이미지는 1903년 설계안과 1914년 변형 도면의 주요 입면 비례를 시각적으로 대비한 자료이다. 비교 결과, 1903년 설계안은 본체와 탑부의 결합 및 전체 입면 구성에서 황금비에 상대적으로 더 근접한 비례 질서를 보이며, 1914년 도면은 실제 시공을 전제로 한 증축·변형 과정에서 수평적 확장과 비례 중심의 이동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1903년안이 보다 응집된 고전적 비례 체계를 보여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24] 일각에서는 독일 측에 설계 변형을 의뢰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학술적 검증이 필요하다.[25] 당시 거주자 등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되어 실제 지적도나 항공사진과는 건물 배치 및 연결 구조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도면이 유실된 상황에서 당시의 공간 구성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실상 유일한 기초 사료이다.[26] 1922년 중화민국에서 신흥종교와 적십자회를 벤치마킹하여 만든 단체[27] 지반 공사 난항으로 3년 늦게 착공했다고 알려짐[28] 『동아일보』 1921년 7월 27일자 기사와 『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자 기사에 따르면 외장은 구축되었으나 상세 부분과 내부는 미완료로 전해짐[29] 원래부터 여기에 있던건 아니고 벽수산장이 철거될 당시 뜯어 온것이다.[30] 「매도설을 전하는 한양 아방궁, 윤덕영 자작의 손을 떠나서 이본궁가의 별장이 된다고」[31] 노능걸, 양미희, 임성숙, 박상익, 김신재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