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20:17:37

보돔 호수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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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어) Bodominjärven murhat
(영어) Lake Bodom murders

파일:nwse-lake bodom-img003.jpg
사건 당시 현장에서 수사중인 핀란드 경찰. 신문 스크랩 (출처: 인터넷)
1. 개요2. 사건 경위3. 목격자들의 증언4. 유력한 용의자
4.1. 용의자 1 : 한스 아스만4.2. 용의자 2 : 칼 발데마르 윌스트룀4.3. 용의자 3 : 닐스 구스타프손
5. 에필로그6. 기타

1. 개요

1960년 6월 5일, 핀란드헬싱키 근교에 위치한 보돔 호수에서 청소년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살인사건이다. 용의자가 3명이나 존재하지만 모두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체포되지 못했고, 60년이 넘도록 범인이 잡히지 않아 사실상 영구 미제 사건이 되었다.

2. 사건 경위

파일:nwse-lake bodom-Bodominjärvi.png
보돔 호수(Bodominjärvi)의 위치. (저작자: Jukka (orig.) & Piirka)

1960년 6월 4일, 마일리 이르멜리 비에르클룬드(Maili Irmeli Björklund, 당시 15세 女)[1], 아냐 툴리키 매키(Anja Tuulikki Mäki, 당시 15세 女), 세포 안테로 보이스만(Seppo Antero Boisman, 당시 18세 男), 닐스 빌헬름 구스타프손(Nils Wilhelm Gustafsson, 당시 18세 男)[2] 등 4명은 보돔 호수로 놀러가 수영과 낚시를 즐긴 후 거기서 하룻밤 야영을 하기로 했다. 보돔 호수는 에스포(Espoo) 시 교외에 있고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정까지 놀다가 잠이 들었고, 고작 2시간만 자고 오전 2시에 일어나 다시 놀러갔다고 한다. 남자인 세포와 닐스는 낚시를 갔다. 여자인 마일리와 아냐는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남자들이 낚시를 마치고 텐트에 돌아오자 다시 잠이 들었다.

날이 밝고 6월 5일, 이 바닷가에 놀러온 소년 2명이 산책하던 중에 위 4명이 타고 온 오토바이를 발견했다. 두 소년은 오토바이를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갔는데 그 옆에는 뭉개진 텐트가 있었다. 바로 그 소년, 소녀들이 야영하던 텐트였다. 그런데 그 뭉개진 텐트 밖으로 발이 삐져나온 데다, 닐스가 둔기로 얻어 맞아 텐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고 소년들은 깜짝 놀라 곧바로 인근에 위치한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했다. 경찰들이 급히 출동해 텐트 안을 살펴보니 텐트 안에는 참혹한 모습으로 변한 소년, 소녀의 시체들이 있었다.

4명이 모두 모두 둔기로 얻어 맞았는데 닐스만 중상에 그쳐 살아남았고, 마일리와 아냐, 세포는 모두 둔기에 맞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아이들의 몸에는 둔기만이 아니라 에 찔린 상처도 있었는데, 특히 마일리의 시신에는 무려 15군데나 칼에 찔린 자국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찌르고 때리는 데 쓰였을 칼과 둔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3명의 사망추정시각은 6월 5일 새벽 4시~6시 사이로 밝혀졌다.

경찰 조사 결과 텐트는 바깥에서 안으로 찢어졌다고 한다. 이로 보아 범인이 소년, 소녀 4명이 야영하는 텐트를 노리고 바깥에서 칼로 찢고 침입하여 3명은 살해하고 1명은 중상을 입혔다고 볼 수 있었다. 닐스와 세포의 신발은 사건 현장에서 약 1km 떨어진 길가에서 발견되었고 세포의 가죽 재킷 등 몇 가지 소지품은 사라졌다. 그런데 희한한 사실은 여자들의 옷은 전날 저녁에 텐트 밖에 걸어둔 그대로 있었다는 점이다. 왜 범인은 소녀들의 옷과 소지품은 건드리지 않고 오직 소년의 소지품만 들고 도망갔을까?

3. 목격자들의 증언

당초 경찰은 이 호수가 유명한 해수욕장 근처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므로 목격자를 찾기 쉬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오판이었다. 호수가 해수욕장에서 안쪽으로 좀 들어가야 있고 다소 호젓한 곳이라 생각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던 것이다. 그 탓에 목격자 찾기부터 난항에 빠졌다. 우선 경찰은 이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닐스 구스타프손에게 범인의 인상착의를 물어봤지만, 닐스는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탓인지 사건 당시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후 사건에 대한 증인이 나왔다. 호수 건너편에 사는 여자 2명이었는데, 이들은 '야영지 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 뒤이어 근시인 남자아이 1명이 '새벽에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에 한 금발 남자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다른 목격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증언이 나오지 않자 경찰도 수사를 진행할 방법이 없었고 다른 뚜렷한 증거도 나오지 않아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졌다.

결국 경찰은 최후의 방법으로 최면술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에서 유일한 생존자 닐스 구스타프손과 수상한 금발 남자를 봤다는 그 근시 소년에게 최면을 걸어서라도 제대로 된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비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억누르고, 경찰은 예정대로 생존자 닐스 구스타프손에게 최면을 걸었다.

닐스는 마침내 한 금발 남자가 텐트를 찢고 쇠파이프로 자신과 친구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살인자의 다른 뚜렷한 특징은 기억해내지 못했고, 일단 구스타프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제작하긴 했지만, 금발머리 남자가 한 둘이 아닌 이상 범인을 특징할 만한 추가단서가 필요했다.

4. 유력한 용의자

부족한 단서로 악전고투를 벌이던 경찰은 마침내 유력한 용의자 3명을 추려냈다. 그러나 끝내 그 용의자들 중에서 누가 범인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경찰 측에서 발표한 유력 용의자 3명은 다음과 같다.

4.1. 용의자 1 : 한스 아스만

한스 아스만(Hans Assmann)은 1923년 12월 9일생으로 사건이 일어난 보돔 호수 근처 마을에 사는 독일인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소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그가 KGB에 소속된 소련 첩보원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여러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았기 때문에[3], 주민들은 아스만을 매우 안 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번 사건에서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한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결정적인 이유는 사건 다음 날인 6월 6일에 헬싱키 외과병원을 방문했는데, 그때 손톱에는 때가 끼어 더러웠고 옷에는 피로 보이는 붉은색 얼룩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를 치료한 의사는 아스만이 이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강력하게 의심했고, 다른 근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신경학과 교수 요르마 팔로(Jorma Palo)는 이후에도 이 사건에 관해 책 3권을 내며 한스 아스만 범인설을 강력하게 밀었다. 전직 경감인 마티 팔로아로(Matti Paloaro)는 아스만을 이 사건 외에도 다른 살인사건 5건과 관련된 용의자로 보았고, 요르마 팔로와 함께 아스만에 관한 책[4]을 한 권 같이 쓰기도 하였다.

앞서 소년들을 상대로 시행한 최면 수사를 통해 얻어낸 몽타주의 모습과 한스 아스만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닮았기에 더더욱 의심을 받았으며, 뉴스에 범인 인상착의에 대한 보도가 나간 직후에 금발 머리를 깎았다는 점도 매우 수상쩍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정적인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좀 말하기가 약간 거시기한 알리바이였다. 그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는데,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도 불륜녀의 집에서 밀회를 즐겼다고 한다. 만일 증인이 불륜녀뿐이었다면 둘이서 입을 맞추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한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날 불륜녀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고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마다 한스 아스만이 그날 자신들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한 덕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결국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스 아스만은 2004년 재수사 이루어지기 6년 전인 1998년 6월 19일에 사망하였다.

4.2. 용의자 2 : 칼 발데마르 윌스트룀

두 번째로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된 인물은 보돔 호수 일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칼 발데마르 윌스트룀(Karl Valdemar Gyllström)이라는 남자였다. 1909년 9월 12일생인 그는 캠핑족을 매우 혐오하여 과거에도 캠핑하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 이유는 살인사건 직후 자기 집 우물을 메워버린 일 때문이었다. 경찰은 급히 윌스트룀의 집을 조사했지만 흉기로 보이는 물건들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윌스트룀의 의붓아들은 아마 윌스트룀이 살인을 저지를 때 쓴 흉기 등을 우물에다 버리고 메웠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윌스트룀 역시 당시 알리바이가 입증되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에 아내와 함께 있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윌스트룀은 보돔 호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9년이 지난 1969년 8월 2일에 호수에 빠져 죽었는데 정황상 자살이라고 경찰은 판단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969년에 윌스트룀이 익사한 직후 그의 아내가 9년 전 알리바이 조사 때 남편이 자신에게 알리바이 조작을 부탁했다고 경찰에 진술한 것이다. 또 윌스트룀의 술 친구 역시 그가 술에 취하면 자신이 보돔 호수에서 애들을 죽였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진술했다.

이로서 살인범이 윌스트룀으로 밝혀지는 듯했지만, 문제는 그가 본래 겨울전쟁제2차 세계 대전의 핀란드 전선인 계속전쟁 때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이후로 횡설수설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가 평소에 자신이 보돔 호수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소리가 사실일지 알 수가 없어, 결국 용의선상에서 배제되었다.

4.3. 용의자 3 : 닐스 구스타프손

마지막으로 거론된 유력한 용의자는 이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닐스 구스타프손이었다. 닐스가 범인으로 지목된 계기는 그의 증언에서 뭔가 석연찮은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닐스는 자신이 텐트 근처에서 낚시를 하던 2명을 봤다고 했는데 그 낚시꾼들은 경찰에 자진 출두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들이 잡은 물고기까지 해변에 버리고 갔다고 한다. 여기서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수사를 하지 않던 경찰은 아마추어 탐정, 추리 마니아 등이 앞다투어 자신들의 주장을 늘어놓자 사건 발발 후 44년이 지난 2004년에 재수사를 진행했고 현장의 혈흔을 통해 닐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닐스가 세포와 심하게 말다툼을 했고, 닐스가 술에 취해 마일리를 강간하려 했음이 밝혀졌다. 즉, 닐스가 마일리를 강간하려 하니 세포가 마일리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닐스가 격분해서 세포를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으며 입막음을 위해 마일리와 아냐마저도 죽였다는 뜻이다. 닐스가 정말로 범인이라면 살해동기까지도 정말 일목요연해진다.

특히 2005년 재판을 앞두고 닐스가 "일은 이미 벌어졌고 전 15년형을 받겠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공식문서에 적힌 게 아니라 수사관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라 증거로 채택되기 힘들었다. 물론 범인이 아니라면 스스로 자신의 형량을 예측함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닐스가 범인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형량으로 예상한 징역 15년이 살인으로 인한 형량인지 강간으로 인한 형량인지는 해석이 갈릴 여지가 있다.

또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만일 닐스가 범인이라면 자기 머리에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닐스는 현장에서 발견되고 약 6~7주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 깨어났는데 자기가 자기 머리를 그 정도 손상이 가도록 때릴 수 있을까? 또 닐스와 세포의 신발은 현장에서 1 km밖에 떨어졌는데 닐스가 범인이라면 제 신발과 세포의 신발을 버리고 맨발로 1 km나 걸어와서 몽둥이로 자기 머리를 내려치고 기절했단 말인가? 정말 닐스가 제 손으로 자기 머리를 쳤다면 대체 그 몽둥이는 어디로 간 것인가? 소년들의 유류품은 어디로 갔을까?

결국 이러한 의문점들 때문에 재수사 결과 지목된 용의자 닐스 구스타프손도 무죄로 풀려났다.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4만 4900유로도 지급되었다. 그리고 경찰들이 지목한 용의자 3명이 모두 이번 사건과 관계없음이 밝혀져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다.

5. 에필로그

사건 발생 후 60년이 지나도록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범인이 스스로 나타나 자백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5] 이 사건도 사실상 완전범죄가 되었다. 현재도 이 사건은 핀란드 최고의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6. 기타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로 유명한 칠드런 오브 보돔은 이 사건에서 밴드명을 따온 것이다.


[1] 핀란드인이 아닌 스웨덴인이다.[2] 역시 스웨덴인이며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3] 1960년은 냉전이 고착될 시기기도 했고 핀란드와 소련이 직접 국경을 맞대다 보니 그가 소련 첩보원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4] ≪Hans Assmannin arvoitus(Hans Assmann mystery)≫, 2004[5] 당연하지만 아마 범인은 적어도 2000년대 이전에 사망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