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3:38:49

비탈릭 부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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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릭 부테린
Vitalik Buterin
파일:Vitalik Buterin.jpg
출생 1994년 1월 31일 ([age(1994-01-31)]세)
러시아 모스크바주 콜롬나
국적
[[러시아|]][[틀:국기|]][[틀:국기|]] |
[[캐나다|]][[틀:국기|]][[틀:국기|]] |
[[몬테네그로|]][[틀:국기|]][[틀:국기|]][1]
신체 185cm, 70kg
거주지
[[스위스|]][[틀:국기|]][[틀:국기|]] 추크[2]
직업 프로그래머, 작가
학력 워털루 대학교 (1학년 중퇴)
수상내역 2012 국제정보올림피아드 동메달기록
2014 World Technology Network Awards(세계 기술 네트워크 대상) IT Software부문 대상[3]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상세3. 언어 능력4. 재산5. 성향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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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그래머로서 이더리움이라는 플랫폼 블록체인을 세상에 등장시켜, 2세대 암호화폐 시대를 열었다.[4][5] 전세계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분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6] 암호화폐 시장이 지금처럼 확대되는데 거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2. 상세

1994년에 컴퓨터 과학자인 아버지 드미트리 부테린과 역시 공학자 겸 사회사업가인 어머니 나탈리아 아멜린[7]사이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출생[8]했으나, 1999년에 부모의 사정으로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이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중퇴[9]하여 이더리움을 만들 때까지 오랜기간 쭉 캐나다에 살았는데, 더 시간이 흘러 싱가포르에 거주하였다가, 현재는 스위스에서 거주 중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프로그래밍에 소질이 있었는데, 심지어 유치원생 나이일 때 이미 아빠에게 배운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을 완전히 마스터해서 엑셀로 뭔가 만드는 걸 즐겼다고 한다. 지금까지 공개된 그의 미취학 아동 시절 사진은 죄다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진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매니아였다가 캐릭터 업데이트 문제로 블리자드에 크게 실망하여 게임을 그만둔 뒤, 아버지가 추천해준 비트코인을 연구하게 되며 큰 영향을 받았다. 2011년에 고등학생의 나이로 비트코인 매거진을 운영한 바[10] 있다. 2013년에는 입학한지 몇달 안된 워털루 대학교를 자퇴하고 이스라엘, 네덜란드, 미국 등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이 때에도 아버지는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니면 안정적인 직장이 기다리겠지만, 그만 둘 경우 더 큰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때 부터 암호화폐에 대해 깊이 파고들기 시작하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비트코인과 다른 플랫폼 블록체인 시대를 열겠다는 열망으로 2012년부터 이더리움 백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자퇴한 이후 사람들을 모아 이더리움 재단을 만들어 이더리움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가 현재 스위스에 살고 있는 이유는 스위스는 국가적으로 암호화폐를 지원하며, 크립토 밸리라는 암호화폐 활성화 지역의 가능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더리움 재단 역시 스위스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패션(...)은 많은 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안티팬도 많다.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법정화폐를 대체하는 용도가 아니라 인터넷 환경 및 기업을 위한 용도로 쓰일 것이라고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은행은 앞으로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태국, 싱가포르, 스위스 등을 좋은 사례로 자주 언급하며, 태국 중앙은행과 태국 기반의 오미세고와 협업 관계에 있다.

한편, 개인적으로 노화방지 재단에 240만 달러 상당의 이더리움을 기부하여,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3. 언어 능력

언어에도 소질이 있어서 영어, 러시아어 외에도 프랑스어, 독일어, 광동어, 고전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일부러 영어로 된 영화 대신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된 영화를 즐겨 본다고 한다.

4. 재산

이더리움의 큰 성장으로 인해, 약 4조 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포브스, 포춘 등의 경제지에도 젊은 부자로 자주 소개되고 있다. 현재 공개된 주소에만 이더리움만 33.5만 개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2024년 11월 현재 11억 663만 달러, 우리 돈으로 1조 5천억이 넘는 돈이다.

또한 부자라는 세간의 추측과 함께 비탈릭이 자신이 보유한 이더리움을 이용하여 다른 코인을 매입투기하지 않냐는 의혹도 종종 불거졌지만, 본인이 보유한 코인의 포트폴리오 중 이더리움이 90퍼센트 이상임을 밝힘에 따라 논란이 사그라들었다. 나머지도 대다수가 스마트컨트랙트 때 자동 에어드랍으로 받은 어거 같은 erc20 토큰(이더리움계 토큰)들이고, 비이더리움 계열로는 약간의 비트코인과 기타 코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5. 성향

탈중앙화를 통한 독립성을 이루는 게 암호화폐의 이상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런 발언을 자주 한다. 또한 이더리움을 비롯한 코인들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을 줄곧 유지하고 있으며 중앙거래소에 아주 비판적인 시선을 보이는 편이다. 이에 관련해서 암호화폐 시장은 거품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암호화폐의 펌핑을 바라는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비탈릭의 발언을 껄끄러워하거나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비탈릭이 암호화폐 시장이 망하기를 원한다기보다는 결국 펌핑 후 하락은 당연한 것이므로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 시장의 피해자를 걱정하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는 이더리움의 무분별한 가격하락이 생태계발전에 그리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6. 여담

  • 2024년 3월 27일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웹3 컨퍼런스 '비들 아시아 2024(BUIDL Asia 2024)'와, 30일 성남 판교 네오위즈 사옥에서 열린 '이드 서울 2024(ETH Seoul 2024)'의 기조연설자로 참석하기 위한 방한했다. 반팔과 반바지의 편한 복장으로 판교의 카페를 이용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잠실 롯데월드몰 뒤편 5번 출구 앞을 지나는 영상도 트위터에 게재되었다. 트위터
  • 2014년 6월 페이팔 마피아의 한 명인 피터 틸이 운영하는 장학금 '피터 틸 펠로우십'으로부터 10만달러(1억705만원)를 받았다. 이 장학금은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하면 받을 수 있다.


[1] https://dailycoin.com/vitalik-buterin-became-a-citizen-of-montenegro/[2] 겉보기엔 어업이 발달한 별 볼일 없는 도시로 여겨질수 있으나 최근들어 크립토 밸리가 조성되면서 스위스 경제에 있어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자 암호화폐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3세대 유전체 편집 기술을 통해 202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에마뉘엘 샤르팡티에가 상용화를 위해 설립한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도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3] 당시 다른 유력 후보는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였으나, 이더리움의 비탈릭 부테린이 이를 누르고 수상하여 주커버그는 고배를 마셨다. 놀라운 점은 당시는 이더리움 스마트컨트랙트 체계가 개발만 되던 중이었지 완성되기 전이었다는 점이다.(다음해인 2015년 스마트컨트랙트가 시작되어 이더리움 디앱들과 그 토큰(erc20 토큰)들이 등장했다.) 심사위원들이 이더리움 백서의 스마트 컨트랙트와 플랫폼 블록체인 개념의 가치만 보고도 페이스북이 아닌 이더리움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암호화폐 블록체인 세계에서 이더리움과 스마트 컨트랙트의 압도적 권위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4] 이더리움의 스마트 컨트랙트 시스템의 등장으로 단기간에 수천개의 디앱이 등장하고 그만큼의 암호화폐가 생기게 되었다. 이더리움 이전까지 하나의 블록체인이란 하나의 암호화폐만을 거래하는 것이었으나, 그의 플랫폼 혁신으로 하나의 블록체인에 여러가지 암호화폐를 거래할 수 있게 되면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산업은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메인넷을 가지고 있는 유명 암호화폐들 중 상당수가 사실 메인넷이 없던 ERC-20 토큰(이더리움계 토큰)으로 시작한 토큰 출신으로, 이더리움의 블록체인을 이용하다가 나중에 메인넷을 만들어서 독립했다. 대표적으로 이오스나 바이낸스코인 등이 ERC-20 출신이다.[5] 훗날 트론이 플랫폼 블록체인으로 바꾸며 이더리움의 ERC라는 이름을 베껴서 트론계 토큰을 TRC-20이라 부르고 있다. 사실 ERC-20(Ethereum Request for Comment - 20th)은 "이더리움을 위한 20번째 요청(제안)"이라는, 엄연히 근원이 있는 작명이었지만 트론은 그런게 없고, 창시자 저스틴 선(본명 쑨위천)이 그냥 그대로 갖다 베꼈다.[6] 나타난다는 가정 하에 이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추측되는 사토시 나카모토는 15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미 사망하였거나 초기 개발자들의 공동 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7] 서양인이라 결혼생활 동안 나탈리아 부테린이었으나, 이혼을 하며 원래 부모성으로 돌아갔다. 근데 사이가 나쁜 건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전 남편 드미트리 부테린은 자기 SNS에 전 부인 나탈리아와 젊었을 때 같이 찍었던 사진들을 공개했었다. 신혼 때 러시아에서 살던 사진이나 캐나다 이주 직후였던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다. 참고로 부모 두사람 모두 컴퓨터 공학자(아버지 박사, 어머니 석사)로 대학원생 시절에 교제하여 결혼하였다고 한다. 나탈리아는 이혼 후 MBA를 나와 컴퓨터공학 석사 겸 경영학 석사가 되었고, 아들이 이더리움을 만들자 본인은 블록체인 교육 재단을 세웠다.[8] 부친이 이혼 후 재혼하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복 여동생이 2명 있다. 아버지 드미트리 부테린이 자신의 홈페이지와 SNS에 공개한 내용(나는 자랑스러운 아들 비탈릭 부테린과 그의 여동생 2명을 사랑하는 딸들로 둔 것이 자랑스러운 한명의 아버지입니다)이다.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은 공개했으나, 새어머니는 공개하지 않았는데 부친이 새어머니와도 나중에 이혼했기 때문이다.[9] 워털루 대학교 컴퓨터과학과. 입학한지 몇달만에 자퇴하였기에 대학생활을 사실상 하지 않았다.[10] 소유자는 따로 있었고, 소유자에게 당시 일주일에 30달러어치 비트코인만을 받으며 편집장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수억에 해당하는 거액이지만, 이는 훗날 이더리움 재단 설립 및 운영비로 다 썼다고 한다. 알려졌다시피 2011년은 우지한이 1700만원 정도로 비트코인을 2만개나 샀었던 시절이다. (단, 우지한은 비트코인이 가장 낮은 가격이던 1월~2월에 샀었다고 밝혔고, 2011년은 가격 변동이 심했던 시절이라 비탈릭이 일하던 시점의 시세와 큰 차이가 났을 가능성이 높다.)주로 하던 일은 그 주에 생성된 비트코인 코어 블록들 중 특이한 것들을 분석하여 인터넷 기사로 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