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5DDBD><colcolor=#000>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Wilhelm, Graf von Schaumburg-Lippe | |
이름 |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Wilhelm Friedrich Ernst) |
출생 | 1724년 1월 9일 잉글랜드 런던 |
사망 | 1777년 9월 10일 (향년 53세) 뵐핑하우젠 |
배우자 | 리페비스터펠트의 마리 바르바라 엘레오노레 여백작 (1765년 결혼 / 1776년 사망) |
자녀 | 에밀리 |
아버지 |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알브레히트 볼프강 |
어머니 | 외인하우젠의 마르가레테 게르트루트 여백작 |
형제 | 게오르크 빌헬름 |
[clearfix]
1. 개요
영국-하노버 동군연합의 장성.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2. 일생
2.1. 초기 경력
에른스트는 1724년 1월 9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볼프강 알브레히트이고 어머니는 외인하우젠 백작부인 마르가레테 게르트루트[1]이다. 에른스트는 영국군에 입대하기 전에 겐트, 레이든, 몽펠리에에서 공부했고 국왕 근위대에서 간부 후보생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742년 형 빌헬름이 죽자 가문의 고향인 부르케부르크로 돌아갔다.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3년, 에른스트는 네덜란드군 총사령관이었던 아버지와 동행하여 데팅겐 전투에 참가했고 1745년이탈리아에서 로브코위츠 공작의 오스트리아군에 가담해 프랑스군과 맞섰다. 이후 1748년에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으로 가서 군사적 지식을 습득했고 베를린에서 체류하는 동안 볼테르와 친분을 다졌다.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헝가리로 여행을 가서 견문을 쌓았다.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하자,에른스트는 샤움부르크-리페-뷔르케부르크 부대를 이끌고 연합군에 가담해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1759년 8월 1일, 그는 민덴 전투에 참여하여 포병대를 지휘해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760년 7월 31일, 그랜비 후작 존 메너즈가 이끄는 영국 기병대와 빌헬름 휘하 하노버리안 포병대는 바르부르크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또한 그해 10월에 프랑스 장군 카스텔라 백작이 지키고 있는 베젤 요새를 포위해 며칠 동안 공성전을 벌였으나 클로스터 캄펜 전투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프랑스군에게 패퇴하자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었다.1761년,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을 헤센에서 몰아내기로 했다. 그해 2월, 페르디난트는 에른스트에게 7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카셀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페르디난트는 카셀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이 3천 명일 거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8천 명에 달했다. 에른스트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적의 저항에 직면한 데다 탄약이 부족하고 궃은 날씨로 인해 참호에 물이 가득차 병사들이 고통받는 걸 목도했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사정을 전해듣고 3월 말에 카셀의 포위를 풀도록 명령했다. 이후 에른스트는 1761년 하반기에 뮌스터-리프스타트-하멜른 세 지역의 방어 체계를 개선하는 임무를 맡았다.
1762년, 프랑스와 손을 잡은 스페인이 포르투갈 침공을 단행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영국에 지원을 호소하며 잉글랜드-포르투갈 연합군의 지휘관 직을 에른스트에게 제의했다. 에른스트는 이를 받아들여 7월에 야전군 사령관으로 진급했고 영국 원정대 6,620명과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포르투갈군을 지휘했다. 그는 아브란테스 근처의 훈련 숙영지에 포르투갈군을 집결시킨 후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포르투갈군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이 문맹이었고 탈영자가 너무 많았으며 규율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빌헬름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로 포르투갈군을 재편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전쟁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엘바스 근처에 노사 세노라 다 가르카 요새를 세웠다. 이 요새는 훗날 '리페 요새'로 개칭되었다.
1762년 8월, 에른스트는 알메이다 동쪽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을 편성하여 조지 비스카운트 타운센드 장군에게 지휘권을 양도했다. 이 군단은 알메이다를 포위한 적을 몰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알메이다 수비대는 구원대가 도착하기 전인 8월 26일에 스페인군에게 항복했고, 에른스트는 타구스 강을 낀 새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해 10월 스페인군 사령관 페드로 파블로 아바르카는 아브란테스를 향해 진군했다. 에른스트는 현지 농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영국군을 이끌고 국경을 방어해 적의 진군을 저지했다. 그해 11월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 전염병에 시달리던 아바르카의 스페인군이 철수하면서 카스텔로 브랑코의 진영에 28개 대대만 남겨뒀다. 에른스트는 이들을 습격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스페인군은 발렌시아로 철군했고, 카스텔로 브랑코에는 부상자 및 병자들만이 남았다. 11월말, 아바르카는 바디호스 근처에서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에스트라마두라 지역으로 돌아갔다.
베르사유 협정이 체결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간의 전쟁이 종식되자, 에른스트는 1762년 11월 3일 독일로 귀국했다. 그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영국 야전군 원수로 승진했다.
2.4. 이후의 경력
1765년, 에른스트는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리페-비세터펠트 백작 부인 마리아 바바라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71년에 딸을 낳았지만 불행히도 3년 후에 딸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1776년 6월 16일 아내 마리아 마저 사망하자, 에른스트는 실의에 빠진 채 워핑하우젠 근처 베르글벤의 사낭용 오두막에 은거했고 1777년 9월 10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향년 53세.[1]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 조지 1세와 그의 정부 멜루지네 폰 데어 슐렌부르크의 사생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