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4:38:27

삼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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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3. 어설픈 계획과 실패4. 주동자5. 대중매체

1. 개요

삼무사건(일본어: [ruby(三無事件,ruby=さんむじけん)])은 1961년 12월 12일에 적발된 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해군병학교 출신 전직 장교들, 즉 당시 민간인들이 기도한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2. 발단

쿠데타를 기도한 육사 모임인 국사회(国史会)에서는 극우 중심 일본의 부활을 주창했다. 이 사건이 삼무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내건 기치가 무세금, 무실업, 무전쟁(無税・無失業・無戦争)이 3무였기 때문이다.

핵심 인원 7명 등은 대부분이 규슈 북부 출신이었으며, 우익 단체 등과 결합하고 자위대에서 사격훈련을 받은 인원 등을 참가시킬 예정이었다.

3. 어설픈 계획과 실패

경시청에서 이들을 털고 보니 쿠데타에 쓰려던 장비는 일본도소총 몇 정이 전부였고, 체포된 인원도 13명에 불과해 무슨 생각으로 쿠데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그렇다보니 쿠데타라기 보다는 자신들을 일종의 신선조처럼 생각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들이 자위대에 가서 사격훈련을 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자위대에서는 부정한다. 당시 일본 정치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부에 끌려다녔던 기억 때문에 문민통제를 매우 중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위대가 여기에 엮이면 큰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관련이 있다고 해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

일본에서는 이 사건이 사건으로부터 얼마 전에 일어났던 5.16 군사정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식이 강하다. 한국군의 현역 육군 장군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일본의 좌파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당시 보도통제로 인해 이 사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특이한 사실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도 이 일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민단을 통해 대한민국 육군박임항 소장이 일정 부분 후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에 지인이 많았던 박 장군M1 카빈 소총을 지원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일본 국회 속기록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사건이 일어난 일본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2016년에야 시작되었다. 기존에는 논픽션 잡지기사나 책들만 일부 나왔을 뿐인데[2] 2016년에 최초로 재판기록을 이용하여 삼무사건에 대한 논문을 내놓은 일본 역사학자 후케 타카시로(福家崇洋)는 이러한 논픽션 기사들에 대해서 출처조차 없어서 선행연구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문서의 내용도 전체적으로 얇은 풍문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4. 주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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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담한 자들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인물은 사쿠라이 도쿠타로(桜井徳太郎, 1897. 06. 21-1980. 12. 28)로 육군 소장 출신이었으며 불기소처분을 받았고 1966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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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미 타쿠(三上卓, 1905-1971)는 5.15 사건에 참여해 총리를 살해했다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5년 뒤에 가석방되었던[3] 일본군 해군 중위 출신이었다. 1950년에도 밀수 사건을 일으켜 5년간 복역했으며 청년일본의 노래(또는 쇼와 유신의 노래)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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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동자 중 25세로 가장 어렸던 사메지마 마사즈미(鮫島正純)는 정치인 바바 겐지의 보좌관이었다. 이후 출가하여 이케구치 에칸(池口恵観)이란 법명을 쓰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성향을 가진 인물로 일단 야쿠자와도 유착되었으며, 본인의 입으로는 종교를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 상담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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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치인과 친분이 있어 나가타초[4]의 괴승(永田町の怪僧)이라고 불린다. 그중 한명이 바로 아베 신조로 아베가 1차 내각에서 도망치듯 사임해 크게 비판받던 시절에 그를 옹호했다. 특히 극우파들과도 친해서 2012년에 이시카와 신사에서 항공막료장 출신 극우 정치인인 타모가미 토시오와 함께 '신관불승합동대동아성전제(神官仏僧合同大東亜聖戦祭)'라는 명칭의 기이한 축제를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일본 극우들이 싫어하는 재일 한국인들과도 친분을 쌓아 제자 중 아라이 타카히로, 가네모토 도모아키한국계 일본인도 있으며, 허영중도 그의 제자라고 불린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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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관세음보살상의 모습.

이케구치 에칸이 주지[6]로 있는 사찰인 에보시야마 최복사(烏帽子山最福寺)에는 북한김일성을 찬양하는 김일성주석관세음보살(金日成主席観世音菩薩)이 있다. 실제로 이케구치 에칸은 방북도 몇 번 했고, 2012년김일성 탄생 100년 당시에 북한에서 열린 축제에 참석했으며 자기네 절 명의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건물을 사들이고 나서 다시 임대해 주려고 했다.

5. 대중매체

1978년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황제가 없는 8월"이 제작되었다.[7]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자위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그래도 캐스팅은 화려하다.



[1] 당시 자위대는 문민 출신 방위청장관들이 강도 높게 통제했고, 미군의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쿠데타가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970년대에 통합막료장을 지낸 구리스 히로오미는 자위대법상 적을 만나도 총을 쏠 수 없어 현행법을 어기며 싸워야 한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초법규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질되었다. 다만 이 부분은 2000년대 들어서 법제상으로 완전히 정리되었다.[2] 이 중에서 2001년에 나온 논픽션 '혁명'이 가장 유명하다.[3] 농담이 아니라 5.15 사건 당시 주범으로 2번째로 높았던 처벌이 고작 15년이었다.[4] 나가타초는 일본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으로 보통 언론에선 '일본의 제도권정치'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한국의 여의도와 같다고 보면 된다.[5] 그외 그의 제자로 불리는 자로 유명작가인 코이케 카즈오(小池一夫, 1936-)와 사이비 과학 및 UFO 관련 저술가 곤노 겐이치(今野健一, 1936-2014)가 있다.[6] 일본에서는 법주(法主)라고 한다.[7] 작중에 5.16 군사정변1973년 칠레 쿠데타가 잠시 비춰지는 것을 보아서는 해당 사건들도 모티브로 삼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