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샤를 드 라 세르다 Charles de la Cerda | |
생몰년도 | 1326년 ~ 1354년 1월 8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뤼넬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레글르 | |
아버지 | 알폰소 드 라 세르다 | |
어머니 | 이자벨 단투잉 | |
배우자 |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 |
직위 | 뤼넬 남작, 앙굴렘 백작, 프랑스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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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앙굴렘 백작, 프랑스 무관장.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절친한 심복이자 친구로서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섰지만, 카를로스 2세의 음모로 피살되었다.2. 생애
증조부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의 장남으로, 왕위 계승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1274년 11월, 그는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이 되기 위해 독일로 떠났을 때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었다. 1275년 5월 마린 왕조가 나스르 왕조와 손잡고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자, 그는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275년 6월 25일에 비야레알에서 병사했다.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차남 산초 4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세비야 궁정에 유폐하고 자신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면서 실패했다. 이후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산초 4세와 산초 4세의 아들 페르난도 4세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실패했다.[1] 1305년,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는 아라곤 왕국과 엘체 조약을 체결해 평화를 이루었다. 이때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위를 지속적으로 노렸던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는 대가로 알바, 베야르 및 지브랄레온 일대의 영주권을 확보했다.
한편, 알폰소는 외 백작인 브리엔의 장 1세의 딸 마틸드와 결혼했고, 1303년에 카스티야군의 공세를 피해 프랑스에 일시적으로 피신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로부터 뤼백 남작위를 수여받았다. 그 후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후손들은 카스티야보다는 프랑스에서 활약했다.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장남이자 샤를 드 라 세르다의 아버지 알폰소는 뤼넬 남작이자 파리 대주교를 역임했고, 차남이자 샤를의 삼촌인 루이스 데 라 세르다는 클레르몽과 탈몽의 백작을 역임했고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 제독을 맡아 잉글랜드 해군과 맞섰다.
1326년경 프랑스 왕국 뤼넬에서 출생한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일찍이 파리 왕실에 지내면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심복이었던 빌베르탱 백작이자 프랑스 원수 마일스 드 누아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왕위 계승자인 장 왕자도 그와 함께 교육을 받았으며, 두 사람은 서로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사이가 어찌나 좋았는지, 장 왕자가 어딜 가든지 그가 항상 따라가곤 했기에 세간에서는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가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백년전쟁 시기인 1350년 봄 삼촌의 뒤를 이어 프랑스 제독이 된 그는 프랑스 국왕에게 고용되었던 카스티야 함대를 이끌고 보르도에서 잉글랜드 해안으로 항해하던 가스코뉴 수송 함대를 습격해 물자를 모조리 탈취한 뒤 생포한 선원들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 가뜩이나 잉글랜드 해안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카스티야 함대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극도로 분노해 그해 5월부터 카스티야 함대를 소탕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드워드 3세의 명령이 내려지자, 그동안 영국 남부 해안을 개별적으로 지키고 있던 토머스 호, 조넷 호, 플렌티 호, 이사벨라 호, 가브리엘 호, 미카엘 호, 월페어 호, 마리오테 호, 예루살렘 호, 토머스 뷰챔프 호, 마리 호, 존 호, 에드먼드 호, 팔콘 호, 부셰 호 등이 모여들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북부에 정박했던 함대들도 남부 해안으로 모여들었다.
1350년 8월 28일, 잉글랜드 함대는 카스티야 함대가 출몰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윈첼시 항구 외곽에 정박했다. 당시 카스티야 함대는 영국 해협과 북해에서 잉글랜드 상인을 포획하고 물품을 빼앗은 뒤 슬로이스 항구에서 쉬고 있었다.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잉글랜드 해군이 윈첼시 항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 해군을 궤멸시키고 영국 해협과 북해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플란데런 외 여러 국적의 용병을 고용했다. 1350년 8월 29일 일요일, 샤를의 함대가 슬로이스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잉글랜드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른 저녁에 적 함대를 발견하자 닻을 내리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에드워드는 무장한 기사와 귀족들에게 포도주를 제공하여 긴장을 풀게 한 뒤 친히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후 벌어진 윈첼시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가 악전고투 끝에 카스티야 함대를 압도하고 샤를 드 라 세르다의 전함으로 몰려들었다. 샤를이 탑승한 전함은 이날 전투에 참가한 카스티야 배 중 가장 거대하고 전사 및 승무원이 가장 많았으며, 바위를 쏘아보낼 수 있는 투석기도 충실히 갖췄다. 그들은 주변의 잉글랜드 함선들을 공격해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지만, 잉글랜드 선박들이 주위를 에워쏴서 화살비를 퍼붓고 적군이 올라 타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섬멸되었다. 샤를은 쪽배를 타고 가까스로 빠져나와서 전장에서 이탈했고, 아직까지 잉글랜드군에 붙잡히지 않은 선박들도 뒤따라 도주했다. 이 전투에서 카스티야 함선 14~26척이 나포되었고, 여러 척이 침몰했다. 잉글랜드 함대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탑승한 선박과 흑태자를 태운 선박이 침몰하고 '왕의 홀'로 지정된 선박이 적군에 거의 나포될 뻔했던 것을 볼 때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카스티야인과 플란데런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습격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배 밖으로 던져졌다.
이 무렵, 프랑스 무관장이었던 라울 2세 드 브리엔은 거액의 몸값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지불할 길이 마땅치 않자 자신의 소유물인 긴 성을 잉글랜드에 양도하기로 했다. 긴 성은 잉글랜드가 1차 칼레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인 칼레에서 9.7km 떨어진 요새로, 칼레 주변의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 에드워드 3세는 그곳을 확보한다면 칼레에 대한 프랑스군의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라울 2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라울을 체포한 뒤 루브르 궁전 내 지하감옥에 가둔 후 11월 19일 재판도 치르지 않고 즉결 처형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샤를 드 라 세르다를 1351년에 무관장에 선임했고, 앙굴렘 백작에 봉했다.
그러나 앙굴렘을 샤를 드 라 세르다에게 하사한 장 2세의 조치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분노를 샀다. 이보다 앞서,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10세의 딸이었던 호아나 2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장 2세의 아버지 필리프 6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여러 영지를 받기로 했다. 그 중에는 앙굴렘도 있었지만, 필리프 6세는 죽을 때까지 앙굴렘을 호아나 2세와 그녀의 아들 카를로스 2세에게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앙굴렘을 카스티야 출신의 남작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받아가게 되었다니, 카를로스 2세로서는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샤를 드 라 세르다를 가만 놔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353년,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호소와 중세 흑사병 유행으로 인한 참상으로 파탄 지경에 몰린 내치를 고려해 평화 협상을 가졌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평화가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훼방놓기 위해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기로 했다. 1354년 1월 18일, 카를로스의 동생인 롱그빌 백작 필리프가 이끄는 무리가 레글르(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암살자들은 샤를을 80번이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3. 사후
카를로스 2세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 2세는 이러다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장 2세가 아직 주지 않았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카를로스 2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 2세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이때 카를로스 2세는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를 이대로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356년 초, 장 2세는 모든 노르망디 영주들을 루앙 성에 초대했다. 카를로스 2세도 초청장을 받고 초대에 응했다. 잔치가 한창일 때, 장 2세가 느닷없이 자식들과 같은 상석에 앉아있던 카를로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붙들며 외쳤다.
"이 배신자! 너는 내 아들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그 후 현장에서 체포된 카를로스는 측근 4명과 함께 샹폴 성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두에의 아를뢰 요새로 이송되었다. 이때 추종자 4명이 참수되었고, 그들의 유해는 광장에 내걸렸다. 이때 참수된 이들 중 2명은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 사건에 참여한 자들이었다고 한다.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생전에 브르타뉴 공작 샤를 드 블루아의 딸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1] 당대 사람들은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계승하지 못한 자라는 의미의 '엘 데세레다도(el Desheredado)라는 별칭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