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한 시대
삼한 시기 현재 서천군 지역에는 마한의 연맹국으로서 2~3개의 나라가 있었다. 부군면 통폐합 이전 서천 지역은 아림국(兒林國), 비인 지역은 비미국(卑彌國), 한산 지역은 치리국국(致利鞠國)[1]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들 국가는 여느 초기 국가가 그랬듯이 현대와 같은 체계적인 통치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한 고을을 다스리는 군주 국가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서천군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구 서천 지역에 있던 아림국은 현재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지역에 위치해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 삼국 시대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이후 서천군 지역은 1군 2현으로 나뉘어졌다. 군으로는 서천 지역에 들어선 설림군(舌林郡), 현으로는 비인 지역의 비중현(比衆縣)[2], 한산 지역의 마산현(馬山縣)이 있었다. 이 중 한산 지역에 있었던 마산현에는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지산성이 있었다.[3]한편 백제부흥운동 세력과 일본이 나당 연합군과 맞서 싸운 백촌강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서천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676년에는 현재 서천군 장항읍 인근 해역에서 당군이 퇴각로 확보를 위해 신라군을 공격한 기벌포 전투가 벌어졌다.
3.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음력 12월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전국 행정구역 개편은 서천에도 영향을 미쳤다.설림군 → 서림군(西林郡)[4]
마산현 → 마산현(馬山縣)
비중현 → 비인현(比仁縣)
4. 고려 시대
시대가 바뀌면서 다시 행정구역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위치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산현이 한산현(翰山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따라서 고려 시기 서천군 행정구역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서림군 → 현 서천군 서천읍, 장항읍, 마서면, 시초면, 문산면
한산현 → 현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화양면, 기산면
비인현 → 현 서천군 비인면, 판교면, 종천면, 서면
명종 때에는 한산현이 한주(翰州)로 불렸으며, 충숙왕 시기에는 서림군 사람 이언충이 공을 세웠다 하여 서주(西州)라 불리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할 때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왜구들을 섬멸한 것으로 유명한 진포 해전이 서천이 접한 금강 하구 일대에서 벌어졌다.
5. 조선 시대
서림군이 서천군(舒川郡)[7]으로 바뀌었고, 한산현은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천 지역에 이렇다 할 만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수군이 주둔하는 진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구 장항읍 장항제련소 지역에 있었던 장암진, 다른 하나는 서면 마량리에 있었던 마량진이 그것이다. 조선 말기 각 군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서천군 → 남부면, 서부면, 마길면, 동부면, 판산면, 개곡면, 장항면,[8] 문장면, 시왕면, 초처면, 두산면
한산군 → 남상면, 남하면, 서상면, 서하면, 동상면, 동하면, 북부면, 하북면, 상북면
비인군[9] → 동면, 북면, 군내면, 서면, 일방면, 이방면
6. 일제강점기
1914년 이루어졌던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거한 부군면 통폐합이 서천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었다. 우선적으로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이 통합되어 서천군으로 개편되었으며, 내부 행정구역 역시 대대적인 조정이 이루어졌다.1. 구 서천군 지역
남부면 + 서부면 → 서남면
마길면 + 동부면 → 마동면
판산면 + 개곡면 + 장항면 → 남양면[10]
시왕면 + 초처면 + 문장면 일부 → 시초면
두산면 + 문장면 일부 → 문산면
2. 구 한산군 지역
남상면 + 남하면 + 동하면 일부 → 화양면
서상면 + 서남면 → 기산면
동상면 + 북부면 + 동하면 일부 → 한산면
상북면 + 하북면 → 마산면
3. 구 비인군 지역
이방면 + 일방면 일부 → 종천면
군내면 + 북면 + 일방면 일부 → 비인면
서면 → 서면
북면 → 북면[11]
6.1. 장항 개발
서천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은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에 걸쳐 일본에서 식량부족사태가 벌어지면서, 조선이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써 역할지어진 때였다. 군산과 인접한 지역으로서 서천군은 충청남도 관할임에도 불구하고 농업경영지대상 옥구, 익산, 김제, 완주, 정읍, 부안, 고창과 같은 전북도작지역에 속해 있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활발하게 설립되었던 수리조합 역시 서천에 1923년 등장했는데, 이들은 서천 평야가 펼쳐진 서남면, 마동면, 화양면, 서천면, 기산면, 종천면을 중심으로 저수지, 방조제, 수로 등을 설치하여 수리조합 구성원인 일본인 지주들의 농장 경영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고자 했다.이와 같이 서천군의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변화가 생긴 곳은 바로 장항(長項)[12]이었다. 이 지역은 본래 지주들도 방치하다시피 했던 갈대밭이었지만, 1926년 수리사업 종료 이후 미곡 생산 및 집산지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서천군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후 1930년 10월 장항항이 개항하였고, 1931년 경남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충남선의 종착역인 장항역이 서남면 장항리에 들어섰다. 1936년에는 현 장암리 일대에 조선제련주식회사가 장항제련소를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개발 호재의 연속 속에서 장항에는 계획적인 시가지 조성이 이루어졌다.[13]
초기 시가지 계획. 장항역과 창선1리, 창선2리, 원수리가 보인다.
장항이 독립적인 소도시로 성장하자 1938년 서남면 장항리, 옥북리, 옥남리, 옥동리와 마동면 수동리, 산서리를 묶어 장항읍으로 승격되는 한편, 서남면과 마동면 잔여 지역이 통합되어 마서면이 되었다. 한편 장항 시가지(구 장항리 지역)는 일본인들이 거주함에 따라 삼기정, 화천정, 본정일정목, 본정이정목으로 행정구역이 분할되었다.
서천군은 최종적으로 일제강점기에 1읍 12면으로의 행정구역 변천을 거쳤으며, 광복 직전 각 읍면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장항읍 | 서천면 | 마서면 | 화양면 | 기산면 | 한산면 | 마산면 | 시초면 | 문산면 | 판교면 | 종천면 | 비인면 | 서면 |
15,192 | 12,469 | 14,200 | 11,246 | 7,564 | 9,903 | 5,444 | 5,962 | 6,621 | 6,627 | 5,665 | 7,448 | 6,512 |
7. 광복 이후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장항 시가지의 일본식 이름도 바뀌었다.삼기정 | → | 신창동 |
화천정 | → | 화천동 |
본정일정목 | → | 창선동1가 |
본정이정목 | → | 창선동2가 |
이외에도 농림지역이었던 송빈정이 송림동으로, 마동면 지역의 산서리는 성주동, 수동리는 원수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장항-군산 지구 전투가 벌어졌으며, 인천 상륙 작전 이전 북한군을 기만하기 위해 군산에 함포 사격을 가할 당시 장항 제련소 굴뚝이 표적이 되기도 했다.[14] 전쟁 중 1952년 장항항이 국항으로 승격되고, 1955년 충남선이 종착역인 장항역의 이름을 따라 장항선으로 개칭되었다. 1956년에는 서천면에 있던 서천경찰서가 장항읍으로 이전했고, 1964년에는 장항항이 국제항으로 승격되었다.[15]
1973년 마서면 남산리가 서천면으로, 화양면 구동리가 한산면으로, 기산면 이사리, 한산면 송림리가 마산면으로, 종천면 흥림리가 판교면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1979년 서천면이 서천읍으로 승격되었다.[16] 1978년 서면에 서천화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88년 장항읍 일대의 행정구역이 동에서 리로 일괄 전환됨에 따라 신창동은 신창리, 화천동은 화천리, 창선동1가는 창선1리, 창선동2가는 창선2리로 바뀌었다.[17]
7.1. 비인공업지구 계획
박정희 정부 시기 비인면~서면 일대에 공업지구를 조성하고자 하는 비인공업지구 계획이 있었다. 이를 위해 비인선[18]이라는 별도의 화물 전용 철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함께 이루어졌다. 1966년 서면 선도리에서 대통령까지 기공식에 참석하였지만, 사업은 곧 흐지부지되었다. 이 시기 공업지구 개발 지역으로 서천 비인과 함께 인천, 여수, 울산이 함께 선정되었는데, 당시 건설 예산 조달을 맡은 건설부가 예산을 가장 절감할 수 있는 울산 지역을 전폭적으로 지원함에 따라 나머지 지역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19] 1970년대 초반에 이르면 익산국토관리청 산하의 사무소가 철수하고 건설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등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비인공업지구의 흔적은 비인선 건설을 위해 이루어졌던 노반 공사 및 터널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7.2. 군장국가산업단지 계획과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로의 변경
서천의 인구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규모였던 장항읍의 경우 1980년에 30,861명을 정점으로 한 뒤 1985년 23,093명으로 감소하였으며, 서천읍 역시 1975년[20] 인구 18,599명을 정점으로 한 뒤 감소하기 시작하여 1985년에는 16,036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는 더 이상 대량의,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었던 전국 대부분 농촌지역의 한계이기도 했다. 장항의 경우 장항제련소와 장항선의 종점 장항역을 통해 어느정도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80년대 장항제련소가 그 기능들을 온산제련소로 대부분 이관하면서 장항읍 역시 경제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21]노태우 정부 당시 전북, 충청권 민심을 고려해 군산 지역과 장항 지역 해안을 간척하여 산업단지를 만들고자 하는 군장국가산업단지 계획이 조성되었다. 계획 수립 당시였던 1988년 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진한 하늘색 선이 1988년 당시의 계획. 이 기사가 나왔던 2006년까지도 면적이 감소하기는 했으나 간척의 형태로 국가산업단지 조성 계획이 있었다.
이 계획을 위해 해당 지역에서 조업을 하던 어민들에게 보상이 이루어졌고, 도로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얼마 있지 않아 경제성을 이유로 사업을 유보하였다. 먼저 사업이 이루어졌던 군산지구 역시 입주율이 10퍼센트 남짓했는데, 그나마 기반 인프라가 있는 군산도 이럴지언데 장항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해 봤자 서천군 주민들에게 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환경부와 환경단체들도 간척 시 대규모의 갯벌이 파괴된다는 이유로 사업에 반대하였다.
표류하던 사업이 다시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 2006년 대통령이 서천을 방문한 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나소열 군수가 사업의 존폐가 빨리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천 주민들이 금강하구둑 인근에서 단식투쟁에 나서는 한편, 서울로 상경해 최대한 빨리 사업을 착공해야 한다고 시위를 벌였다. 사업이 점차 축소되면서 경제성 논란은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그와 함께 갯벌 매립에 관한 사안을 두고 서천군청 당국과 군민, 환경단체들 간 대립이 불거졌다.
결국 사업은 간척 대신 내륙에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를 별도로 조성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해당 산업단지는 기존 장항읍 시가지와는 이격되어 있는 형태로, 정확히는 장항읍 옥남리와 마서면 옥북리 일대에 조성된다. 이 위치는 2008년 장항선 직선화로 이설된 장항역과의 연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업단지와 더불어 보상 차원에서 마서면 송내리, 덕암리 일원에 국립생태원이 조성되었으며, 장항읍 송림리에는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세워졌다.
8. 1990년 이후 일반 현황
1992년 서천과 군산을 잇는 금강하굿둑이 완공되면서 더 이상 배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고 강경읍까지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초기에는 서천과 군산 간의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라는 긍정적 예측이 우세했으나, 금강하구둑의 영향으로 조류 흐름에 이상이 발생하면서 금강 하구에 토사가 퇴적되기 시작했다.서천의 인구는 별다른 개발 호재가 없는 현실 속에서 점점 감소하기 시작해, 15대 총선까지만 해도 단독 선거구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16대 총선부터는 인접한 보령시와 통합되었다.
9. 서천갯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한국의 갯벌 일부 지역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는데 이중 서천 갯벌도 함께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1] 치리국국은 한산 이외에도 현 서산시 지곡면 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2] 비물현(比勿縣)이라고도 불렀는데, 마한 비미국이 비인 지역에 비정되는 것도 이 비물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 부분을 무리 중(衆)자로 표기했다는 점을 통해 당시 백제에서도 중세 한국어처럼 무리를 뜻하는 '물'이라는 단어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3]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의 당산성, 정읍시의 두승산성,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 등이 주류 학설로 꼽힌다. 일본서기에는 주류성이 백강(白江)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지을 수도 없는 땅이다. 지금은 지켜내는 곳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들이 굶주리기 쉽다"고 적혀 있는데, 판단은 각자의 몫에 맡긴다.[4] 서천읍에 있는 서림여자중학교가 여기서 이름을 가져왔다[5] 이 시기 행정구역 개편은 대개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형태였기 때문에 마산은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6] 진포 해전뿐만 아니라 금강 하구에서 벌어졌던 각종 전투에 대해서 서천군과 군산시가 서로 자기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적극적인 쪽은 아무래도 좀 더 규모가 있는 군산 쪽.[7] 서녘 서西가 아닌 펼 서舒임에 주의[8] 현재의 장항읍과는 다른 지역이다. 이 때의 장항면은 獐項(현재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과 한자가 같다), 현재의 장항읍은 長項이다. 현재 장항읍은 남부면 일대이며, 통폐합 전 장항면 지역은 서천읍 구암리, 신송리 일대이다.[9] 1895년 비인현에서 비인군으로 승격[10] 1917년 서천면으로 개칭[11] 1942년 판교면으로 개칭. 이름은 판교역(장항선)으로 말미암아 성장한 북면 판교리에서 따 왔다.[12] 본래 남부면 일대의 장암리, 항리가 1914년 합쳐져 만들어진 명칭이다. 사업이 이루어진 시기에는 서남면 장항리.[13] 현재 장항읍 시가지를 보면 서천읍을 비롯해 전통적으로 읍내라고 불리는 지역들과 확연히 다른 도로 배치를 보인다.[14] 당시 제련소 굴뚝은 해발고도 100미터를 넘어갔다. 이후 개장하면서 70미터대로 축소됨.[15]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장항항은 5,000톤 이하의 선박만 접안할 수 있었으며, 물동량도 거의 없었다.[16] 군청 소재지를 일괄적으로 읍으로 승격시키는 대통령령에 따른 조치였다.[17] 리에 숫자를 붙이는 것은 흔히 행정리 분류로서 사용되지만, 장항 내에서는 창선1리, 창선2리 자체가 법정리이다. 이외에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이런 곳이 있다.[18] 장항선 서천역에서 분기하여 종천면을 지나 서천화력선 원두역에 접속하는 형태의 노선이었다. 부여~논산 지역을 연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충남선을 서천역으로 연장해 직결하는 방안도 논의되었으나 이를 둘러싼 사업들이 모두 무산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19] 후문으로는 중앙정치권에서 충청권 인사가 세력 싸움에서 밀려서 그랬다는 카더라가 있다.[20] 이 때는 서천면이나 편의상 서천읍으로 표기[21] 게다가 장항제련소가 위치해 있던 장암리 지역 주민들의 암 발병율이 평균치를 웃도는 수치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해당지역 주민들은 소개되었고 토양정화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