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22:54:48

서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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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위국공
서달
(1370~1385)
서휘조
(1388~1402)
서흠
(1407~1421)
(1424(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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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輝祖
(?[1] ~ 1407)

1. 개요2. 초기 생애3. 홍무제 시절4. 건문제 시절과 정난의 변5. 최후6. 사후7. 평가8.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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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초기의 장군이자 외척이다. 명나라의 개국공신 서달의 장남이며 인효문황후와는 친남매 사이이다. 인효문황후가 영락제와 혼인하였으므로 영락제의 처남[2]이면서 홍희제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처음 이름은 서윤공(徐允恭)이었지만 건문제의 이름이 주윤문(朱允炆)이어서 두 사람의 이름에 윤이 겹쳤으므로 서윤공이 이를 피휘(避諱)하여 서휘조로 개명하게 된다.[3]

2. 초기 생애

서윤공은 키가 무려 8척 5촌[4]에 달하는 거구였으며, 얼굴이 아름답게 생겼다. 외양이 비범했을 뿐만 아니라 기운이 좋고 재주도 뛰어났다. 개국공신의 자제였기에 훈위(勳衛)로서 좌군도독부사(左軍都督府事)[5]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3. 홍무제 시절

서윤공은 서달이 죽자 그의 작위를 계승하여 1388년(홍무(洪武) 21년)에 위국공(魏國公)이 되었다. 그 뒤에 홍무제가 서윤공에게 휘조라는 이름을 하사하자 그대로 개명하였다. 서휘조는 여러번 관청 밖으로 나와서 섬서(陝西), 북평(北平), 산동(山東), 하남(河南) 지역의 군대를 훈련시켰다.

1393년(홍무 26년) 3월, 북평의 연왕(燕王)에게 항복해왔던 원장(元將) 아로첩목아(阿魯帖木兒)가 다른 마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서휘조가 이를 간파하고 선수를 쳐서 아로첩목아를 붙잡아 죽였다. 그 뒤 경사(京師)로 귀환하여 중군도독부(中軍都督府)를 맡아서 다스렸다. 그 이후에도 해안 지역에 주둔한 군대를 훈련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거나 반란 진압에 투입될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 군정(軍政)에 관한 업무들을 도맡아 수행하였다.

홍무제 시기에 서휘조는 대부분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1396년(홍무 29년) 4월에는 홍무제의 명령을 받고 예부(禮部), 한림원(翰林院)의 관리들과 함께 국자감(國子監)으로 가서 국자감의 교사와 학생이 될 자들을 심사하기도 하였다.

4. 건문제 시절과 정난의 변

홍무제가 죽고 그 뒤를 이어서 황태손이 건문제로 등극하자 서휘조에게는 태자태부(太子太傅)의 관직이 더해졌다. 1399년(건문(建文) 1년)이 되자 건문제는 신하들에게 《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6]을 편찬할 것을 명령했는데, 서휘조에게 실록을 감수(監修)하게 하였다.

연왕의 둘째 아들 주고후는 서휘조의 생질(甥)이였는데, 그는 연왕이 군대를 일으킬 무렵에 제들과 함께 경사에 방문하여 머무르고 있었다.[7] 서휘조는 주고후가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서는 자신의 생질들 중에서 그를 특히나 경계하였는데, 조정에서 연왕의 세 왕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게 되자 서휘조는 몰래 건문제에게 글을 올려서 말했다.
신(臣)의 세 조카들 중에서 주고후는 용맹하고 사나운 무뢰(無賴)입니다. 그의 마음가짐은 비단 폐하께 충성을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비에게도 반항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나라의 큰 재앙이 될 것 입니다.[8]
하지만 건문제는 그 글을 보고도 바로 결단을 내리지 않고 서휘조의 동생인 서증수(徐增壽)와 부마(駙馬) 왕녕(王寧)에게도 주고후의 성격에 대하여 물어봤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주고후를 감싸주며 변호해주니 세 왕자들은 모두 연왕에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다른 왕자들은 순순히 돌아갔지만 주고후는 돌아가는 과정에서 서휘조가 타고 다니던 명마를 도둑질한 뒤에 그 말을 타고 달아나버렸다[9]. 이에 서휘조가 크게 놀라서 사람을 보내 주고후를 추격하도록 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이 소식이 건문제에게도 전해졌는데, 뒷날에 주고후가 그의 아버지를 따라 반기를 들어서 조정의 큰 골칫거리가 되자 건문제는
나는 어째서 그때 서휘조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인가!
라며 후회하였고, 이로써 서휘조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연(燕)의 세 왕자들이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왕이 병사를 일으키자 서휘조는 경군(京軍) 3만을 이끌고 토벌군의 총대장이 된 이경륭(李景隆)을 지원하였는데, 그는 백구하(白溝河)에서 연왕에게 크게 패배하여 덕주(德州)로 달아났다. 서휘조가 이경륭과 그의 패잔병들을 엄호하여 연병(燕兵)을 막으니 이경륭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의 기록이 2년여 뒤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산동에 계속 남아서 연병과 싸우지 않고 이경륭과 함께 경사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1402년(건문 4년) 정월, 서휘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산동 지역에 주둔해있는 조정의 중앙군을 지원하였으며, 그해 4월 22일[10]에는 제미산(齊眉山)에서 연병과 크게 싸웠다. 서휘조는 낮부터 밤까지 치열하게 싸운 끝에 연병을 패배시키고 연장(燕將) 이빈(李斌)을 베어 죽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은 중앙군의 반격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했고 싸움을 잘하던 여러 장수들을 잇달아 잃게 되어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었는데, 서휘조가 이빈까지 죽이자 연의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또한 연의 장수들 중에는 중앙군의 기세를 피해서 북평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건문제가 조서(詔書)를 내려서 서휘조를 경사로 소환[11]했는데, 이 때문에 서휘조가 수비군의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자 남아있던 중앙군은 보급이 끊기고 고립되어 세력이 곤궁해졌고, 결국 연왕에게 패배를 거듭하다가 전멸당하고 만다.

연왕이 연병들을 이끌고 을 건너오자 서휘조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힘을 다해 연병들을 막아 싸웠는데, 포자구(浦子口)에서 다른 장수들과 함께 연병을 한 차례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역전하지는 못했다. 금천문(金川門)이 열려서 연왕이 마침내 경사로 입성하자 서휘조는 연왕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연왕이 황제로 등극하여 영락제가 되었을 때에도 서휘조는 황궁으로 가지 않고 혼자 남아 아버지의 사당을 지키면서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해주지 않았다.

5. 최후

영락제는 서휘조를 감옥에 가두고 관리를 시켜서 그의 죄상(罪狀)을 밝혀내게 했지만 서휘조는 진술서에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가 개국공신이면 그 자손은 죽음을 면한다.
서휘조의 진술서를 본 영락제는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마침내 크게 분노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었겠지만 그는 개국공신 서달의 정통 후계자였던데다 자신의 처남이었다. 게다가 서달이 홍무제 시기에 공을 세우면 세웠지 죄를 짓지는 않았기에 다른 공신들이 숙청당하는 와중에도 와석종신할 수 있었고[12], 그 덕에 서휘조는 서달이 홍무제에게 하사받았던 면사철권(免死鐵券)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면사철권을 가진 공신의 자제를 죽이는 것은 홍무제를 거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영락제는 홍무제가 직접적으로 인정했던 정통 황제를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하였기에 홍무제의 아들이긴 했지만 정통성이 위태로웠는데, 서휘조를 죽이는 짓은 분풀이로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 좋지 못한 정통성에 더욱 흠집을 내는 것에 불과했다.

영락제는 서휘조의 목숨을 거두는 대신 위국공의 작위를 빼앗고, 그를 저택에 가둬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서휘조는 그렇게 영락제의 재위기간 내내 아무곳도 가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게 되었다. 그는 1407년(영락(永樂) 5년)에 병으로 죽으니 당시에 나이가 40여 세였다.

6. 사후

서휘조가 죽은 다음 달에, 영락제가 조서를 내렸다.
서휘조는 제(齊)씨[13], 황(黃)씨[14] 등의 무리들과 작당하고 꾀를 내어서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였지만, 짐(朕)은 중산왕(中山王)이 세웠던 큰 공을 생각하여 뜻을 꺾고 그를 용서하고자 한다. 지금 서휘조가 죽었다고 하여 중산왕의 후손이 끊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15]
이에 서휘조의 장남 서흠(徐欽)이 위국공의 작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만력(萬曆) 연간에 건문제를 모셨던 충신들을 조사하도록 하여 남도(南都)의 묘(廟)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서휘조가 모셔진 신하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다. 뒤에 태사(太師)의 관직이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7. 평가

좋은 병사를 선발하고 급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당시 조정의 신하들 중에 위국공 서휘조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충성되고 의로우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게다가 지혜와 용맹함도 다른 사람을 뛰어넘었으니 그가 처음부터 토벌의 임무를 맡았다면 연의 반란을 거뜬히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치신록(致身錄)》의 저자 사중빈(史仲彬)
서휘조는 혼자서 혐의를 받는 입장에 놓였었지만[16] 당시 나라의 상황은 매우 급박하였다. 서휘조는 온 마음을 황실에 바쳤기에 건문제 시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한 임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도 진심으로 서휘조를 신뢰하였다. 문황(文皇)를 만나서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法司)가 찾아와서 자백할 것을 강요하니 중산왕이 세웠던 큰 공들을 적어내고 마지막에 그의 자손은 죽음을 면한다는 글귀를 적었는데, 그 글에는 목숨을 구걸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뜻이 전혀 없었다. 문황을 추대하라는 말을 적으라고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진술서를 고치지 않으니 세록(世祿)을 받은 공신의 자제들 중에서 그만큼 융숭(隆崇)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서휘조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속장서(續藏書)》의 저자 이지(李贄)

8. 대중매체에서

2022년 드라마 산하월명에 등장한다. 황태손이 태자가 되자 이름을 바꾸게 됐는데 윤공도 황제에게 받은 이름이라 아무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건문제에게 충성하고 있었으나 연왕이 거병했을 때 연왕의 처남이라 중용받지 못했다. 서휘조의 장례식에 누나 인효문황후가 참석했다.


[1] 40여 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굳이 시기를 따지자면 가장 빨리 잡을 경우 1359년, 가장 늦게 잡을 경우 1367년이 된다.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에서는 서휘조가 인효문황후의 오빠로 언급되고 있지만 명나라 후기의 역사학자 왕세정(王世貞)은 서휘조를 인효문황후의 동생이라고 언급하였기에 기록이 엇갈리고 있다.[2] 후술하겠지만 사이는 매우 좋지 못했다.[3] 개명한 시점은 1389년이다.[4] 당시의 대척이 1척 당 32cm였으므로 소척(小尺, 소척의 120%가 대척에 해당되므로 1척 당 약 26.7cm)을 기준으로 잡으면 8척 5촌은 약 227cm에 달한다. 경이롭게 거대한 그의 신체는 키가 크다고 언급된 그의 아버지 서달에게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5] 약칭 좌도독으로, 정1품의 최고 무관직이다. 개국공신인 아버지의 빽으로 시작부터 4스타 이상의 장군이 된 셈[6]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이라고도 불린다.[7] 이들이 경사에 온 이유는 홍무제의 소상(小祥)을 치르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연왕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봉토(封土)를 지키라는 홍무제의 조훈(祖訓)을 따라야 했으므로 경사에 올 수 없었고, 그 대신 자신의 아들들을 보내왔다.[8] 그를 어렸을 때부터 봐왔을 외삼촌의 말이 이럴 정도이니 주고후의 성격이 애초부터 막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9] 정황상 서휘조가 건문제에게 글을 올린 것을 전해들었거나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다.[10] 양력으로는 5월 23일[11] 연왕이 군대를 이끌고 북평으로 돌아갔다는 잘못된 소문이 경사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이 소문을 믿었던 신하들 중에는 "연의 무리들이 또다시 북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경사를 지킬 훌륭한 장수(良將)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건문제에게 말하는 자도 있었다. 건문제가 결국 그 말을 따라서 서휘조를 불러들였지만 이 조치는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었다.[12] 서달이 홍무제가 하사한 거위고기를 먹고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홍무제가 공신을 숙청할 때는 공신 본인뿐만 아니라 그 친척들까지 싸잡아 처벌하였기에 실제였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다만 서달이 등창으로 고생하다 죽었기에 편안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고, 홍무제가 잡아 죽인 공신들도 워낙 많았기에 훗날에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13] 건문제 시기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제태(齊泰)를 말한다. 영락제가 경사에 입성한 뒤에 역적으로 몰렸고, 도망에 실패하여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14] 건문제의 스승이면서 건문제 시기에 태상시경(太常寺卿)을 지낸 황자징(黃子澄)을 말한다. 영락제가 경사에 입성한 뒤 붙잡혀 처형되었다.[15] 사실 영락제가 기분대로 했다면 위국공의 작위를 아예 없애버리고 서증수의 가문으로 서달의 후손을 이어가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서휘조는 홍무제의 명령에 의해 서달의 작위를 물려받은 정통 후계자였으므로 영락제가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서증수도 서달의 아들이긴 했지만 장남이 아니었기에 장자 계승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고, 서달이 죽었을 때에도 세습되는 작위를 받지 못했다. 서증수가 받은 정국공(定國公)의 작위는 그가 죽은 뒤에 영락제가 추증(追贈)한 것이었기에 서휘조가 서달에게 물려받은 위국공의 작위에 비해서 정통성이 떨어졌다.[16] 서휘조의 전(傳)에는 그가 혐의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지만 반란을 획책한 연왕의 처남이었으므로 의심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