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병
腫氣 / furuncle피하 감염으로 고름이 형성되는 질병이다. 종기가 악화되면 피부 염증으로 끝나지 않고 발열, 오한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정말 드물게는 패혈증까지 진행되어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확실한 절개 배농법과 항생제가 없었던 과거에는 종기로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도 당뇨병, AIDS, 간경변, 암 환자 같은 면역이 저하되는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질환이다. 종기가 농익었을 때 톡 짜면 퍽 하고 고름이 쏟아지는데, 증세가 심하다면 가만있는데도 고름이 제멋대로 터져서 우수수 쏟아진다.
1.1. 원인
모낭(털구멍)의 염증이 가장 흔한 원인이나 피하에 작은 낭종이 형성되어 감염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보다 더 깊은 범위의 감염일 경우에는 종기라고 칭하지 않는다.[1]보통 종기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비위생적인 생활 습관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면역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환이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피부의 세균 감염을 쉽게 처치하지 못하고 점점 악화되는 것. 당뇨 등 만성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종기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나이와도 관련이 있어서, 면역력이 좋은 젊은 시절에는 종기로 인해 죽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이러한 생활 패턴과 나이로 인한 면역력 악화가 겹치면 간단한 질병이었던 것이 난치병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조선 시대 때 왕들이 젊을 때 걸리면 끙끙거리며 버티다가 나이가 들면 죽고는 했다. 화농성 한선염이 원인인 경우도 있다.
현대에는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여드름처럼 가벼운 피부 질환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병이었다. 현재는 소독약과 항생제가 발달하여 상처를 소독을 하고 항생제를 투여하며, 필요하면 외과 수술로 고름이 차지 않도록 한다. 과거에는 상처 및 감염으로 고름이 차는 일이 흔했고, 항생제 및 상처 소독 기술이 미비하다 보니 외과 수술로 종기를 제거하기 쉽지 않았다.[2] 특히 환자가 왕인 경우는 소독을 안 하고 시술했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물론 왕이라고 해서 외과 시술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고 침으로 고름을 따내는 식의 치료는 했다. 물론 조선 효종의 경우에는 어의 신가귀[3]가 종기가 난 부위를 잘못 땄다가 세상을 뜬 사례가 있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1.2. 한국사 속의 종기
한국사에서 꽤 많은 왕들을 고생시킨 병 중 하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도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이 악화된 끝에 그 등창이 터져서 죽었고[4], 고려의 무관 척준경도 등창으로 인해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종[5], 성종[6], 정조[7]가 종기로 인해 직접적으로 목숨을 잃었고, 효종[8]은 그로 인한 의료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세조[9], 광해군, 현종 등 27명의 왕 중 무려 12명이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10]가 넘었다.[11]
정조실록 정조 24년(1800) 6월 25일
정조실록 정조 24년(1800) 6월 25일
여기 나오는 6월 25일은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8월 15일인데, 그 무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처음에는 피재길이 만든 고약으로 종기를 치료했지만, 생활 습관의 문제로 결국 재발했고[12], 고약도 내성이 생겨서 약효가 떨어진 데다가 다른 합병증까지 겹쳐서 결국 승하했다. 정조는 양력 8월 18일(음력 6월 28일)에 승하했는데, 종기가 터지고 고작 사흘 만에 죽은 것이다.
조선의 국왕들이 종기에 시달렸던 것은 당시의 의술 탓도 있겠지만,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에 과식과 운동 부족, 수면 부족[13] 등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운 환경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조선 왕실의 유전적 내력이라는 추측도 있다. 당시에 항생제 등 의학이 부족한 것도 맞았고 조선의 임금들이 과도한 격무에 시달린 것은 맞으나, 그것만이 원인이라면 다른 고관대작들이나 조선이 아닌 전근대 동아시아의 다른 군주들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유독 조선의 임금들만 종기, 등창으로 고생한 기록이 많이 나오고 고려나 삼국 시대 국가들, 일본이나 중국의 기록에는 그러한 부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14] 때문에 종기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노출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유독 조선 국왕들에게 도드라져 보였던 이유는 집안 내력이 아닐까 하는 추측.[15]
사실 지금은 소독한 바늘 같은 걸로 쿡 찌르고 쭈욱 짜낸 다음에 깨끗하게 씻고 소독하고 뜨거운 방에서 자면 나아버리는 게 종기겠지만, 바늘 소독도 안 되고[16] 상수도가 없으니[17] 씻기도 어렵고[18] 거기다 주요 장기와 먼 엉덩이 종기라면 모를까 등허리에 종기가 나서 커지기까지 했다면....[19]
1.3. 엉덩이 종기
엉덩이도 종기가 자주 생기는 부위 중 하나이다. 엉덩이 종기는 곪은 상태에서도 안 터지고 앉을 때마다 굉장히 아픈데 겪어본 사람만 안다. 엄청 아프다. 게다가 앉을 때마다 걸리적거려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럴 때는 그냥 시원하게 터트려서 고름을 쭉 짜버린 후 소독해 주는 게 편할 때도 있다. 괜히 그냥 있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터져서 속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 검은 피와 함께 새카맣거나 회색인 고름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20]또한 주변의 가려움증이 간혹 유발되기도 하며 괜히 긁다가 종기가 터지거나 이미 터진 종기를 손톱으로 잘못 긁었을 경우 그 고통은 참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고통스럽다.
그리고 엉덩이에서 고름이 흐른다고 이게 다 종기는 아닐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플 수 있는 질환은 치질의 일종인 치루인데 실제 염증은 직장에서 발생했지만 이 염증에서 생긴 고름이 직장의 환부에 쌓여가다가 마침내 혈관 같은 우회로를 만드는 식으로 무작정 고름의 파이프라인이 몸속을 파고들어 가다가 엉덩이로 튀어나오는 터널이 뚫려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별한 치료 없이는 직장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이 지옥의 송유관은 철거할 방법도 없다. 고약도, 항생제도 힘들고 수술대에 오르는 것밖에 답이 없어진다. 모소낭도 수술이 필요하다.
1.4. 치료
이렇듯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종기로 고생한 조선 시대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침이나 칼로 외과적 시술을 하거나 민간요법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뱉거나 하는 식의 치료를 했다.[21] 정조는 종기의 치료를 위해 신하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고, 인삼과 육화탕이 들어간 탕약을 먹었다고 한다. 정조 본인은 자신과 인삼이 맞지 않는다고 싫어했지만, 신하들은 기어이 인삼이 들어간 약을 먹였다. 많은 치료법이 있었겠지만, 당시 조선에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시술 도구의 살균 처리는 고사하고 물론이고 환부의 처리도 현대 기준에서는 불완전했다.[22] 그래서 외과적 치료를 시행해서 고름을 빼내도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치료법은 그저 종기의 고름만 제거할 뿐, 근원적으로 고름을 만드는 감염된 조직을 제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재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이런 상황은 조선 후기에 들어 고약이 개발된 후에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고약이 종기 속의 고름을 배출해 줌과 동시에 상처 소독까지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약은 20세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정상비약의 자리에 올랐지만, 의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 위생 수준이 급속도로 상승하면서 바르기 간편한 연고가 그 자리를 대체했기에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는 상황이다.
Dr. Pimple Popp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종기 수술 영상으로 유명한 유튜버이자 피부과 의사인 산드라 리 박사의 수술 영상을 보면(클릭 주의, 연령 제한) 고름을 뽑아낸 이후 고름을 만들어내는 감염된 조직 자체를 끄집어내서 전부 떼어내 버리는 걸 볼 수 있다.[23] 고름을 뽑아내기만 하는 걸로 수술을 끝내면 높은 확률로 재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황색 포도상 구균 등의 세균 감염으로 발생된 모낭염인 경우가 많으므로 항균 비누(Dial, Hibiclens 등)를 이용해 온몸과 종기가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씻는 방법이 있다. 교차 감염을 막으려면 속옷, 옷은 물론 침대 시트나 이불 그리고 수건 등을 주기적으로 빠는 것이 좋다. AHA와 같은 화학적 각질 제거 성분이 함유된 로션 등을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환부를 깨끗히 관리해 주면 보통은 2~3주 정도면 사라진다.
속옷의 원단이 부드럽지 못한 합성 섬유일 경우 피부 간 마찰을 증가시켜 더욱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어 면으로 된 부드러운 재질의 속옷을 입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앞서 언급한 고약을 사용해 볼 수도 있다. 상처 부위에 붙이기만 하면 고름을 쭉쭉 잘 뽑아낸다. 직접 짜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프고 간편하다. 요즘은 쓰기 편하게 밴드 형태로 출시되는 고약도 있다. 다만 고약으로 종기 치료 하려다가 종기가 더욱 악화되어서# 안 붙이는 것만 못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고 장기간 사용 시 납 중독이 우려되며 흉이 진다는 말도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하여 사용하자.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면 웬만하면 고약은 추천하지 않는다.
화농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 항생제 복용만으로 좋아지지만, 심한 종기가 났을 경우에는 외과를 방문하여서 제거하기를 추천한다. 혼자서 해결하려 했다간 소독이 올바로 되지 않아 또 고름이 생기며 아파진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항문 외과에서 치료를 해야 하며, 치료라는 것이 마취 주사를 놓고 피지낭종을 제거하고 주변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거즈를 쑤셔 넣고 향후를 지켜보면서 염증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거즈를 교체해 가면서 고름을 짜낸다.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염증이 나는 살 부분을 완전히 도려내는 대수술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피부에 탁구공의 절반만큼의 구멍이 생기는 거다. 당연히 치료 과정은 더 괴로워지고, 흉터도 크게 남는다. 그러니 귀찮다고 냅두지 말고 종기가 좀 심해진다 싶으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병원에 제때 가기만 하면 충분히 하루이틀 안에 낫는다.
종기가 이미 커져서 마취하고 절개하는 경우, 그 과정이 조금 길어진다. 우선 마취를 한 뒤, 칼로 환부에 여러 번 상처를 내어 고름을 빼며, 심을 박아 넣고 거즈와 반창고를 위에 덮는다. 여기서 심을 박는 이유는 수술 이후에도 나오는 고름을 한곳에 모아서 잘 배출하여 거즈에 배기 수월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항생제를 며칠 복용하며 경과를 지켜본 뒤 다시 내원하여 이 심을 제거한다.
1.5.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종기(腫氣) |
한자 | 腫氣(종기) |
영어 | furuncle, abscess, swelling |
앵글리시의 비공식 단어 중 atteboil가 있는데 독일어 Eiterbeule, 네덜란드어 ettebuil과 같은 어원이다.
1.6. 관련 문서
2. 종합기계의 준말
HD현대인프라코어의 전신인 대우종합기계를 줄인 대우종기 등이 있다.3. 終期
終期법률 용어로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를 뜻한다. 부관의 종류 중에서도 기한(期限)의 한 종류다.
3.1. 관련 문서
4. 겁난유세의 등장인물
자세한 내용은 종기(겁난유세) 문서 참고하십시오.[1] 사실 조선 시대에는 봉와직염과 단독(erysipelas)도 종기의 일종으로 취급했다.[2] 조선 시대에도 외과 시술은 있었고, 실제로 시행된 경우도 많았지만 소독 기술의 부족으로 위험성이 높았다. 이는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보다 수술 기술이 더 발달된 인도나 아랍, 유럽에서도 소독 기술의 부족으로 수술하다가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19세기까지 이어져서 피 묻은 앞치마가 의사의 상징이 되기까지 했으며 환자를 돌보고 다른 환자를 돌보기 전에 손을 씻게 하는 것만으로도 병자의 사망률이 엄청 낮아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항생제의 경우에는 1928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게 그 시작이니, 발견되고 발명된 지 이제 100년을 바라보는 의학 기술계의 혁명이다.[3] 조선 시대에 왕이 승하하는 경우 어의에 대한 처벌은 대체로 형식적인 면이 강했으며, 잠시 귀양을 보냈다가 복직시켜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신가귀의 경우에는 수전증으로 인해 침을 잘못 놓으면서 과다 출혈을 일으켰다. 결국 신가귀는 왕을 사망케 한 의료 사고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신가귀의 사형은 조선 왕조 500년간 어의 중에서 유일하다. 그나마도 원래는 참수형이었으나, 교수형으로 형이 낮춰졌다.[4] 후삼국 시대를 소재로 한 한국 사극 태조 왕건에서도 견훤이 말년 점점 등창이 악화되는 묘사를 넣었는데, 하필이면 고대에 정말 더욱 치료하기 어려운 등에 난 종기인 데다가 그 종기도 일반 종기가 아닌 등창인지라 배우 서인석의 실감나는 명품 연기까지 더해져서 악화된 상태만 봐도 그냥 보기만 해도 정말 고통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다.[5] 등에 난 종기의 크기가 무려 30cm였다고 한다.[6] 결핵,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배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했다.[7] 등과 머리에 수많은 종기가 났다고 한다.[8] 얼굴에 악성 종기가 나서 침으로 땄다가 어의인 신가귀가 수전증으로 인해 혈관이 지나가는 부위를 같이 따 내는 의료 사고를 일으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9] 야사에 의하면 형수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에게 침을 뱉었는데, 그다음부터 종기가 생겼다고 한다.[10] 1되는 약 1.8리터다. 현대에도 이 정도면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다.[11] 그릇으로 거의 몇 잔을 쏟았다. 다행히 숙면을 취하게 되었으나 그리 앓은 얼마 뒤 신하들과의 면담 도중 쓰러지고 말았는데, 약을 넘기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숨졌다.[12] 정조는 평소에도 업무 과다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 데다가 술과 담배를 매우 즐겼다.[13] 기록에 의하면 국왕은 과중한 업무로 1일 평균 수면 시간이 5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14] 만약 그랬다면 당시 앉아서 학문만 공부하던 선비들이 종기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록 등이 나타났을 것이다. 마치 디스크, 고혈압, 당뇨병 같은 성인병이 현대인들의 질병이라 전 세계인이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 이러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15] 비슷한 사례로 고구려 국왕들의 꽤나 긴 재위 기간이 있다. 유독 평균 재위 기간이 긴 편이고 수명도 오래 산 임금이 많아서 이 또한 장수 유전자의 영향이 아니냔 추측이 있다.[16] 지금이라면 약국에서 몇천 원에 알코올을 사 소독하면 그만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아니었다. 염소나 알코올 같은 수단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의 조선의 의학과 과학 수준으로는 그걸 인지하기도 어려웠으며, 값도 상당히 비싸고 과정도 몹시 복잡해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아편과 에테르, 모르핀 같은 약물로 마취를 하는 것도 근대의 일이었다. 단 술, 즉 알코올을 이용한 소독 개념은 의외로 고대부터 있긴 했었다. 의료를 의미하는 한자인 醫의 의미 부터가 상처 부위에 술을 붓는다는 뜻이기 때문.[17] 완벽한 상수도를 모두 갖춘 도시는 최근의 일이었다. 일반 서민들이 사는 마을은 우물이나 하천이 주된 생활용수 공급처와 빨래터의 역할을 했다. 문제는 이러한 물은 오염의 가능성을 피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18] 처치 후 소독하기도 어려웠는 데다 왕쯤 되면 초기 치료도 어려웠을 테니 염증이 커져서 병도 확대되었을 것이다. 특히 종기가 터지면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된다. 여기서 강조하는 상수도의 중요성은 공급되는 물 자체가 소독 과정을 거치며 이렇게 공급된 깨끗한 물로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목욕 등을 통해 악성 균을 제거하여 종기가 발생하는 사례를 획기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19] 역사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군주들은 과도한 업무에 그로 인한 운동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에 수라와 같은 고열량의 식단들은 당뇨병과 같은 합병증을 불러왔다. 조선 왕조의 세종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돌싱포맨 3화에서 이상민이 수술로 종기를 제거하고 회복실에 있을 때 탁재훈이 "네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게 다행이지, 옛날에 태어났으면 넌 죽었어. 옛날에 왕도 (종기로) 죽었는데 네가 무슨 수로 살아남았겠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20] 다만 이미 종기는 터졌으므로 더 이상의 큰 고통은 없다. 병원에서 치료만 잘 받으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게 대다수.[21] 물론 현대 의학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치료법이다. 아무리 양치질을 열심히 해도 기본적으로 입안에는 각종 세균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어서 감염 위험성이 크다. 시술자 입장에서도 세균 덩어리나 다름없는 고름과 타인의 피가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당연히 나쁠 수밖에 없다.[22] 이때는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 개천이나 온천과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이상은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세수는 매일같이 했기에 위생 관념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 깨끗한 물로 씻는 게 좋다는 정도의 개념이야 있었지만 세균 등의 미생물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시절에는 그저 깨끗한 물로 씻는 것, 경험상 알게 된 상처에 알코올이 들어 있는 술을 부으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물론 왜 그런지는 몰랐다.) 이상은 생각해 낼 수 조차 없었다.[23] 비위가 약한 사람들을 위해 수술 과정을 글로 설명하자면, 환자는 왼쪽 볼에 종기가 있어 절개 수술을 받고 있다. 볼을 () 모양으로 조금 절개하니 엄청난 양의 고름이 쏟아져 나오는데, 쭉쭉 짜서(...) 고름을 다 제거하고 환부를 헤집으며 종기의 원인이 되는 감염된 조직을 잘라낸다. 그리고 봉합하는데, 국소 마취를 한 것인지 산드라 리 박사가 환자와 대화를 하기도 한다. 환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긴 적출된 조직을 보고 사진을 찍으며 "정말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네요...." 라고 하는 게 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