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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우왕의 제8비 선비 왕씨 | 善妃 王氏 | |
생몰년 | 미상 |
직위기간 | 고려 선비 |
1388년 3월 ~ 1388년 6월 | |
본관 | 개성 왕씨 |
부모 | 부친 - 왕흥 모친 - 언양 김씨(彦陽 金氏)[1] |
형제자매 | 형제 - 왕득도(王得道) |
배우자 | 우왕 (초혼) 류은지(柳殷之) (재혼) |
봉작 | 선비(善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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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우왕의 후궁.우왕 폐출 후 류은지(柳殷之)에게 재가하였다.
2. 생애
원래 변현과의 결혼이 예정돼 있었는데, 혼인 전날인 1383년 9월 1일 우왕이 갑자기 왕흥의 집에 방문하더니 왕씨의 결혼을 허락이 있기 전까지 미루도록 했다. 왕흥은 왕씨가 아직 사위를 맞을 마음은 없었다고 변명해봤지만 우왕은 "네가 나를 기만하려 드느냐?"며 왕씨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이튿날인 2일 우왕은 왕씨를 결혼시키지 말 것을 왕흥에게 명령했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왕씨를 자신이 취하겠다는 뜻이었고, 문하시중 조민수 등 좌우의 신하들은 이름난 장수의 며느리를 뺏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우왕은 듣지 않았다. 우왕은 그날 저녁 왕흥의 집으로 갔는데 왕씨는 이미 병을 핑계로 집을 비우고 피신한 뒤였다. 비록 왕씨를 취하지는 못했지만 우왕은 왕흥을 협박해 명령에 따르겠다는 답을 받아냈다. 4일 우왕은 왕씨의 조부 왕복명에게 손녀의 결혼 날짜를 잡게 했다. 왕복명도 손녀가 간 곳을 모르겠다고 변명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1385년 2월 4일, 마침내 우왕이 왕흥의 집에 와서 왕씨를 취했다. 이후 우왕은 매일같이 왕흥의 집에서 자며 왕씨와 정을 통했다.
1387년 12월 모일에는 왕씨의 생일을 맞아 왕흥의 집에서 연회가 열렸고, 말과 저포, 비단 등을 받으며, 1388년 선비(善妃)로 책봉됐다. 창왕이 즉위하고 1388년 6월에 선비는 폐위되었으며 아버지 왕흥은 먼 곳으로 유배됐다.
그 후 왕씨는 유만수의 아들 유은지(柳殷之)와 재혼했다. 유만수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살해당한 뒤 1403년 왕씨의 남편 유은지 역시 봉주(鳳州)로 귀양을 가는데, 이 때 사간원에서 왕비였던 왕씨가 절개를 버리고 유은지와 재혼한 것을 문제삼았다. 태종의 명으로 왕씨는 이혼하고 배주(白州)로 귀양됐다.
2.1. 가계
[1] 김승구(金承矩)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