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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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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박승직
(1896~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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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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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EB8><colcolor=#ffffff> 두산그룹 제6대 회장
박용오
朴容旿 | Park Yong-oh
파일:external/www.newspost.kr/1257868755.jpg
출생 1937년 4월 29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2009년 11월 4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밀양 박씨[1]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 52회)
뉴욕 대학교 (경영학 / 학사)
부모 아버지 박두병, 어머니 명계춘
형제자매 박용곤
누나 박용언
남동생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박용욱
배우자 최금숙(1937년생, 2004년 사별)
자녀 장남 박경원
차남 박중원[2]

1. 개요2. 생애3. 사건·사고4. 여담5. 가족관계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스포츠행정가. 두산그룹 제6대 회장.

2. 생애

1937년 4월 29일,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연강 박두병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3]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뉴욕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다.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하였다. 이후 두산산업 전무이사, 동양맥주 전무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83년 OB 베어스 사장에 임명되었다. 큰 형인 박용곤이 은퇴하자,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했다. 박용오가 회장 자리에 오르기 전 두산그룹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경제위축과 경영오판으로 심각한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었고 결국 1995년 주력부문인 음료사업을 코카콜라에 넘기고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해야 했다.

직후 터진 IMF 외환위기내수기업인 두산에 한계가 오자 박용오는 식음료, 경공업, 생활문화 등 전형적인 내수기업인 두산을 과감한 인수합병과 매각으로 중공업을 바탕으로 한 수출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4] 2001년 한국중공업, 2005년 대우정밀공업의 인수로 두산을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으로 거듭나게 했다. 한국중공업[5]의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KBO 총재를 겸임하기도 했다.[6]

이후 두산산업개발 분리와 두산그룹의 차기 회장 문제를 두고, 큰 형인 박용곤을 위시로 한 형제들간의 갈등 끝에[7] 결국 동생인 박용성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말이 물러난 거지, 사실상 쫓겨난 것이다.(...) 이후 동생인 박용현, 박용만에게 경영권을 완전히 빼앗겼으며 형제들과는 완전히 의절하였다. 즉, 선대 유훈을 어기고 기업 경영권을 혼자 꿀꺽하려다 실패한 셈.

이후 남은 두산의 지분을 처분하고 2008년에 성지건설을 인수하여 경영했지만, 차남인 박중원의 횡령과[8] 국제금융위기로 인해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실적 부진으로 반쯤 망했고[9], 2009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2세.#

3. 사건·사고

1998년 9월 비리로 구속된 정대철의 뒤를 이어 KBO 총재대행으로 임명되었다가 11월 사임하였다. 다음 달인 12월 한국프로야구 구단주들에 의해 제12대 KBO 총재로 선출되었고 2005년까지 3선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 당시 방송에 나와 "선수협이 생기면 우린 그날부터 (프로야구) 안 한다."고 극언을 퍼부어 팬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2005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4. 여담

  • 사망 몇개월 전 김수환 추기경 장례 미사에 참석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박두병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다. 허나 그가 자살함으로서 장례미사는 결국 받지 못하게 되었다.

5. 가족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범두산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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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혁거세 65세손, 충헌공파-판서공파-부마공파 24세손 용(容)○ 항렬.[2] 주가조작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3] 52회 졸업생. 동기생으로 고건, 이종찬, 김우중, 신구, 이준용 , 조양래가 있다.[4] 가끔 우익 인사들이 당시 좌파 정권이 두산그룹의 내수산업을 없애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의 사업을 유도했다는 식으로 음모론을 내세우는데, 말 그대로 음모론이고 개소리이다. 두산이 사업을 전환한 결정적 계기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영남 지역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이 여파로 인해 하이트(크라운맥주)에게 1위를 뺏기고 KFC, 코카콜라 한국 사업 부문까지 모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IMF까지 오며 두산의 소비재 사업이 흔들리자, 기업 미래를 위해 나름 절박한 심정으로 건설업과 플랜트사업으로 서서히 탈바꿈한 것이다.[5] 10년째 흑자기업임에도 IMF 당시 민영화 기업으로 선정되었다.[6] 정치권 인사였던 정대철이 경성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OB 베어스 구단주였던 그가 총재대행이 되었다가, 정식 총재로 임명되었다. 구단주들끼리 돌아가면서 총재직을 맡을 계획이었지만, 막상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박용오가 7년이나 집권했다.[7] 2005년 7월 명예회장 박용곤을 필두로 두산가는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라는 선대의 유훈에 따라 회장직을 3남 박용성에게 물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용오는 되려 형제들의 비리를 검찰에 고발했다. 가족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신의 업적을 내세워 일반 주주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전략이었지만 끝내 주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8] 박중원은 횡령혐의로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후 2011년 2월 가석방 됐다. 하지만 또 지인들에게 사기를 친 일로 사기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재판도 불출석하고 도주하다가 경기도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붙잡혔다. 2021년 4월 징역 1년 4개월로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됐다.[9] 성지건설은 이후, 경영난을 계속 겪다가 2018년 10월 상장폐지 된다. 그리고 2022년 1월 김용빈 회장(참고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부단장이기도 하다.)도 경영권 유지에 실패하고 회장직에서 쫓겨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