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8:44:13

박용만(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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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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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박승직
(1896~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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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EB8><colcolor=#ffffff> 두산그룹 제9대 회장
박용만
朴容晩 | Park Yong-maan
파일:두산_박용만_회장.jpg
출생 1955년 2월 5일 ([age(1955-02-05)]세)
서울특별시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종교 가톨릭 (세례명: 실바노)
현직 벨스트리트 파트너스[1] 대표업무집행자
예술의전당 이사장
재단법인 같이 걷는 길 이사장
학력 경희국민학교 (전학)
혜화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2] (69회 / 졸업)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 학사)
보스턴 대학교 (경영학 / MBA)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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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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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본관 밀양 박씨[3]
부모 아버지 박두병
어머니(적모) 명계춘
형제자매 박용곤, 박용오, 박용성, 박용현
누나 박용언
남동생 박용욱
배우자 강신애
자녀 장남 박서원, 며느리 조수애
차남 박재원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야구4. 논란
4.1. 비자금 조성 및 횡령4.2. 두산인프라코어 희망퇴직 사태
5. 가족관계6. 여담7. 저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벨스트리트 파트너스의 대표업무집행자이자 전(前) 두산그룹 회장<9대>, 전(前)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2012년 3월 31일 형인 박용현 회장의 후임으로 두산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4년간 그룹 회장직을 수행한 후 2016년 3월, 장조카인 박정원 현 회장에게 이임했다.

2. 생애

1955년, 서울특별시에서 연강 박두병의 5남으로 태어났다.[4]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경영학과(73학번)를 졸업하고 한국외환은행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보스턴 대학교에서 MBA를 마쳤다.

1982년 두산건설에 입사했다. 1995년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두산그룹이 소비재 중심에서 중공업 위주로 탈바꿈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후 주식회사 두산 대표이사 부사장, 사장을 거쳐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을 맡다가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얼리어답터이자 직접 돌리는 트위터도 가지고 있다. 기업인의 SNS 활용의 가장 좋은 예로 꼽히는데, 트위터 사용자들과의 쌍방향 소통에 주력한다. SBS스페셜 '출세 만세' 시리즈 중 제4부를 거의 혼자서 독식하는 위엄. 전편을 구해서 보면 사내 메신저로 소통하는 모습이 나온다. 다음날 시험을 앞둔 사람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보내고, 두산 입사를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심지어 늦은 시간에 배고프다며 사모님 몰래 총각김치에 밥을 먹으려다 김치를 흘리고는 사모님께 혼났다는 이야기까지 트위터에 쓸 정도로 솔직 털털한 매력을 보인다. 반면 일반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키배 거리가 되는 사안의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개입을 자제한다.

대기업 CEO로서는 드물게도 소통을 중요시 여겨 대학에서 직접 채용 설명회에 참석하는 편이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이전까지는 채용 인지도 100위권 밖에 있던 두산중공업을 2000년대 후반에는 5위까지 끌어올린 장본인.[5] SBS 스페셜 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재벌 회장의 일상 생활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기도 했다. 상당히 보기 힘든 다큐다.[6]

2013년, 손경식 회장이 말 못할 사정으로 용퇴하면서 공석이 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추대되었다.

2018년 9월에 열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에 경제인 대표단 일원으로 방북했다.

2020년 9월 21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7]과 관련해 "경제가 정치의 도구냐", "기업 관련 법안인데, 기업들 의견은 철저히 무시하는 게 맞는 일인가" 등의 발언으로 국회의 일방적인 추진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법 제정 과정에서 경제계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반대를 표하지는 않았고, 합리적인 대안과 부작용에 대해 검토할 것을 주문했다. #

2021년 3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임기를 마치고 최태원 회장에게 이임했다.

2021년 11월 10일 두산그룹의 모든 자리에서 사임했다. 박 회장의 아들인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 박재원 두산중공업 상무 역시 그룹 임원직에서 물러났다.

2022년 1월 20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만나 경제 현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른바 만문명답이 그것이다.

2022년 2월 14일 두산그룹을 떠난 후 '벨스트리트 파트너스(Bell Street Partners)’라는 이름의 컨설팅 회사를 세운 사실이 알려졌다. 대표 업무집행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박 전 회장의 차남 박재원 전 두산중공업 상무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3월 23일,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3. 야구

파일:/image/001/2013/09/26/PYH2013092612570001300_P2_59_20130926192802.jpg
두산 베어스 선수들과 친하면서 두산 베어스 홈경기에서 자주 보인다고 한다. 또한 돡갤러들은 그를 용만찡으로 부르며 칭송중이다. 두산 베어스와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죄다 가루가 되도록 까는 돡갤에서 유일하게 잘 까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2010년 포스트시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임태훈이 구원등판해 무실점으로 경기를 승리로 이끌자, '임태훈 최고다! ㅋㅋㅋㅋㅋ 업어주고 싶네 ㅎㅎ'라는 말을 트위터로 남겼다. 그리고 진짜로 업었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7&aid=0002112425

2018년 한국시리즈도 다 챙겨본 듯하며 SK의 우승이 확정될 수 있는 6차전 경기가 밤 11시를 넘기는 승부 끝에 결국 두산이 패하자 최태원 SK 회장[8]을 향해 최 회장 부럽네ㅋ 난 이만 자러가야지ㅠ라는 한탄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 구단주는 조카인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다.

4. 논란

4.1. 비자금 조성 및 횡령

2005년 박용성, 박용오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횡령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바 있다.
  • 두산그룹 위장계열사인 동현엔지니어링의 대표이사 이모씨와 김모씨로 하여금 비자금을 조성하도록 지시, 허위 공사계약을 체결한 뒤 공사대금을 회수하는 방법으로 조성된 19억 1,000만원의 비자금을 횡령한 혐의
  • 두산그룹 위장계열사인 세계물류를 설립한 다음 세계물류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47억 8,500만원을 횡령한 혐의
  • 두산산업개발 전현직 대표이사들에게 지시해 협력업체에 외주 공사비를 과다지급한 후 차액을 반환받는 방법으로 230억 3,600만원을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4.2. 두산인프라코어 희망퇴직 사태


20대 신입사원에게까지 퇴직을 강요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쌓아올렸던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졌다.

다만 회사 측은 건설경기 부진에 중국 시장의 침체까지 겹치면서 수익성 악화였기에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는 있다는 반응도 있다. 왜냐하면 단기 영업 이익이 감소하고 누적 적자가 크게 급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두산인프라코어의 핵심 매출처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의 경기둔화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9]

물론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감안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 20대 신입사원에게 퇴직 이야기가 나온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닌 것은 사실. 거기에 모기업 야구단 FA 선수 계약에 100억대 금액이 오가는 기사가 뜨자 회사는 돈이 없다고 신입직원까지 명퇴시키면서 야구 선수 한명 영입에는 100억씩 쓰냐는 비판 여론이 거셌다.

당시 프로야구 인기가 최정점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스포츠단은 돈을 쓰는 계열사지 돈을 벌어오는 계열사가 아니다. 야구단이 흑자를 낸다고는 하지만 이는 광고비 명목으로 그룹 계열사들이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다. 2010년대에 두산그룹에서 두산베어스에 가장 많은 광고비를 주던 계열사는 두산인프라코어였다. 돈을 벌어오던 계열사는 돈을 못 벌어서 저연차 직원들도 대량해고 하는 마당에, 그 회사에서 돈을 타서 쓰는 야구단이 FA에 엄청난 돈을 쓰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여론 반발에 해당 신입직원 명예퇴직은 철회했지만, 두산그룹 신입채용 숫자가 계속 줄더니 결국 몇년 후 대거 잘라냈다.

하지만 이후 두산그룹 자체가 휘청이던 상황에서 저 구조조정으로 채권단의 융자감사를 넘기고, 이후 적자의 원흉인 두산건설의 사모펀드 매각과 두산인프라코어도 매각 대상에 올리면서, 후임자인 박정원 체제에서 그룹 공중분해 위기이던 두산이 결국 다시 부활한 것을 보면 결국 논란이 되었던 두산그룹 구조조정도 기업 회생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재평가를 받게 됐다. 결국 수뇌부에서 어떤식으로든 당시 두산의 계열사 매각과 구조조정은 필수였고, 박용만이 총대를 메고 칼질을 전부 해놓은 다음에 박정원에게 넘겨줬고 박정원 체제가 그룹을 안정화시켰다고 보는 편이다.

5. 가족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범두산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여담

  • 막내 동생인 박용욱과 함께 나머지 형들과는 이복형제 지간이다. 부친의 임종이 코앞일 때 처음 부친의 집에 가봤다고 하며 이복 형들도 이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 가정사 때문인지, 돈 걱정은 안 하고 자랐어도 재벌 치고는 평범한 성장기~청년기를 보냈다. 덕분에 미국 유학 시절에 장을 보고 걸어서 먼 길을 걸어 귀가하거나, 두산에 들어오고 난 이후로도 회식 후 지하철을 타고 퇴근 하고 트럭을 타고 영업을 체험해 보는 등 서민적인 경험을 많이 하고 살았다. 그의 소탈함의 근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아내인 강신애씨는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여동생으로, 무려 11년간 짝사랑했다고 한다.#
  • 취미는 사진과 글쓰기이다.
  •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10] 서울대교구 신자들이 매주 성당에서 보는 서울주보에 기고한 글에서 어릴 때 할머니, 즉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의 부인인 정정숙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개인 후원자 자격으로 마리아수녀회 후원회장도 맡고 있다. 매년 겨울 비시즌 때 두산 베어스 선수들이 서울의 한 보육원을 방문하고 있는데, 이 보육원이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곳이다. 박 회장 본인도 선수단이 방문할 때마다 함께 이 곳을 찾아 어린이들과 같이 논다.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바보의 나눔'이라는 자선 단체에도 꼬박꼬박 기부를 한다. 2015년 창립된 몰타 기사단 한국 지회의 첫 번째 대표로 선임되기도 했다.#
  • 국산 경차인 기아 레이를 3대나 구입해서 직접 몰고 다닌다고 한다. 주로 달동네 반찬 배달 봉사활동 등을 갈 때 타지만 다른 기업인들과 약속 장소에 갈 때도 레이를 몰고 나가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박 회장은 "큰 차를 가져가면 골목길에서 차가 진입하거나 주차할 때 매우 번거로운데 레이는 그런 문제로 고민 안하게 되니 좋다"고 한다.

7. 저서

  •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2021.02/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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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에 직접 설립한 경영컨설팅 기업.[2] 고교 동기로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 있다.[3] 혁거세 65세손, 충헌공파-판서공파-부마공파 24세손 용(容)○ 항렬.[4] 부친이 45세에 낳은 늦둥이다. 적모 명계춘의 친아들은 아니고 사생아지만 법적으로는 친모가 아닌 명계춘의 아들로 되어있다. 장조카인 박정원 회장과도 7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5] 이 즈음에는 두산그룹이 속칭 '왕자의 난'으로 언론사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대외 이미지가 매우 나빴다. 그러던 것이 박용만 회장 체제 이후로 SNS 소통이 부각되며 이미지 쇄신에 성공하게 된다. 경영자로서의 수완이 돋보이는 대목. 지금은 두산 경영진 하면 바로 트위터와 아이폰부터 번쩍 떠올리게 된다.[6] 재벌 회장들은 일상 생활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크게 꺼리는데다 그 어떤 언론사를 막론하고 저런 재벌 회장을 직접 취재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당시 박용만 회장이 소통을 강조하며 스스로 방송에 나오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방송분.[7]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을 합쳐 '공정경제 3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중대표 소송제도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임(상법 개정안) △사익편취 규제 대상 확대,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 폐지(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자산 5조원 이상 복합금융그룹 중 금융지주회사, 국책은행 등을 뺀 금융그룹을 감독 대상으로 지정(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 등이 있다. #[8] 박용만의 뒤를 이어 대한상의 회장에 추대된 사람이다.[9] 이는 탈원전 정책과는 무관하다. 탈원전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으로 2017년 이후에나 시작되었다. 따라서 2015년 두산인프라코어 대량해고 사태와는 무관하다. 시점부터 맞지 않고, 회사도 원전 사업을 안 하기 때문.[10] 범두산가 식구들이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다. 박용만의 아버지 박두병도 천주교 신자였으며 두산이 주류 사업을 영위하고 있던 시절에는 한국 천주교회 공식 미사주인 마주앙을 독점 생산하고 천주교 계열 자선단체에 기부도 적극적일 정도로 천주교와 인연이 깊은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