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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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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그룹 제3대 회장 김상하 金相夏 | |
<colbgcolor=#219dcb> 출생 | 1926년 4월 27일 |
사망 | 2021년 1월 20일 (향년 94세) |
학력 | 경복중학교 (졸업) 여순고등학교 (전학)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정치학 / 학사) |
본관 | 울산 김씨 |
가족 | 아버지 김연수 어머니 박하진 |
형제자매 | 형 김상준, 김상협, 김상홍, 김상돈 남동생 김상철, 김상응 |
배우자 | 박상례 |
자녀 | 장남 김원 차남 김정 장녀 김영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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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양그룹 명예회장.2. 생애
삼양사 창업주 김연수의 7남 6녀 중 5남으로 1926년 4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교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큰형 김상준, 셋째형 김상홍(16회)이 졸업한 경복공립중학교로 진학해 1944년 4월 졸업했다(19회). 당시 부친 김연수가 남만방적을 설립하고 만주에서 사업을 키우고 있었던 관계로 1944년초 입시에서 관동주의 여순고등학교(료준고등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한 조선인 4명 중 한 명으로, 1944년 4월 여순고등학교(문과 갑류[1])에 입학했다(출처 참조).
1945년 8월 해방 당시 여순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귀국하여 1945년 10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2학년에 편입했다. 1946년 8월 대학예과를 수료하고(21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학부(구제))로 진학하여 1949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금융권으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가업을 이으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삼양사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다. . 당시 사장은 고모부인 김용완(金容完), 농장 경영은 농대 출신 최태환(崔泰煥)이 맡고 있었다. 김상하 사원은 경리과장 밑에서 주판 배우기부터 시작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도쿄사무소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수출입 업무를 익혔다. 1955년 삼양사가 울산 제당공장을 준공했을 때 현지 주재 상무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전무를 지내고 1975년 삼양사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2005년 3월 셋째형 고 김상홍(金相鴻)회장 후임으로 삼양그룹 회장을 맡았다.
2021년 1월 20일 사망하였다.
3. 여담
- 경복중학교 재학 시절 농구선수로 활동했던 인연으로 1980~1985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을 거쳐 1985~1997년 대한농구협회장을 맡았다. 재임기간 농구대잔치의 흥행, 한국프로농구 출범에 기여했다.관련기사
- 1988년 대한상공회의소 제13대 회장으로 선출된 후 4차례 중임으로 2000년까지 12년을 근속했다. 부회장 6년을 합산하면 18년간 대한상의를 대표한 최장수 기록이다.
- 한·중 수교 이후 한중민간경제협의체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아 8년간 이끌었고 한일경제협회 7대 회장으로 양국 경제인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 일조했다
-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8년 자랑스러운 전북인상을 수상했다.
- 제조업의 근간은 "품질 좋은 물건을 생산해 적기에 공급한다"는게 지론이었으며 현장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매달 한 번은 공장을 순회하였다.
- 마당발이어서 상기 직함 외에도 수 많은 단체의 장을 맡았다. 형 김상홍은 대외 활동으로 바쁜 동생의 월급을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 재계 대선배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도 막역했다.#
4.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오너 일가 문서 참고하십시오.[1] 독일어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