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4:51

세레체 카마

파일:보츠와나 대통령기.jpg
보츠와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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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5aadb> 보츠와나 공화국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
Sir Seretse Khama
KBE
파일:세레체 카마 컬러.jpg
출생 1921년 7월 1일
베추아날란드(현 보츠와나) 세로웨
사망 1980년 7월 13일 (향년 59세)
보츠와나 가보로네
임기 기간 초대 대통령 (1966년 9월 30일 ~ 1980년 7월 13일)(13년 286일)
정당 [[보츠와나 민주당|
보츠와나 민주당
]]

1. 개요2. 생애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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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2. 생애

1921년 7월 1일 베추아날란드(현 보츠와나) 세로웨에서 현 보츠와나 지역의 부족장 중 한명이었던 카마 3세의 손자로 태어났다.

194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포트해어 대학교에서 문학사를 받았으며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와 이너 템플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다 도중에 영국 여성 루스 윌리엄스(Ruth Williams, 1923~2002)[1]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는데,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큰 반발을 받고[2] 추방당했지만, 반발 세력의 항의로 일반인 자격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카마는 1962년에 보츠와나 민주당을 설립했고 1965년에는 수상이 되었으며 이듬해 보츠와나가 독립하면서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3]

이후 굉장히 훌륭히 나라를 다스렸는데, 독립 직후인 1967년 발견된 다이아몬드[4]를 통해 대한민국, 산유국에 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경제발전을 이끌어내 보츠와나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부국으로 이끌어낸 것은 물론 민주주의도 훌륭하게 정착시켜 아프리카 본토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안착시키는 데에 성공한다.[5]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만과 악마만도 못한 독재자들로 가득찼던 당대 아프리카 환경[6], 2차 대전 후 신흥독립국들에서 독립영웅이 독재자로 전락하는 일[7]이 매우 흔했다는 것, 후술하듯 장기집권을 했다는 것 등 엄청난 위험요소가 무려 4개가 있었음에도 독재의 늪에 빠져들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고평가할 수밖에 없다. 특히 비슷하게 자원 의존형 경제체제를 가졌고, 석유 매장량 세계 1위인 베네수엘라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물론 카마는 다이아몬드로 벌어들인 돈으로 막대한 사치와 부정부패를 전혀 누리지 않았다. 게다가 카마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박정희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집권 과정부터가 대놓고 찬양하기에는 힘들게 하는 중대한 흠이 있는 것과 달리 카마는 정치적으로도 전혀 흠 잡을 구석이 없다.[8]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하에 직선제를 통해 4선 모두 연임[9], 무려 14년이나 장기집권을 했지만 1980년 7월 13일 향년 59세[10]라는 이른 나이에[11] 췌장암으로 사망한다. 2대 대통령은 그의 임기동안 부통령 자리에서 지탱해줬던 퀘트 마시레가 뒤를 이었으며, 그렇게 세워진 보츠와나는 정치, 경제 모두 아프리카 본토에서 최고 수준으로 안정적인 나라가 된다.

루스 카마와의 사이에서 총 4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자식 농사도 훌륭히 지었는지 그의 맏 아들인 이안 카마는 군인으로서 복무하다가 1989년부터 1998년까지 보츠와나군 총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고 예편 후 곧바로 2008년까지 10년간 부통령을 역임한 끝에 보츠와나 4대 대통령으로 취임, 무난히 연임한 뒤 2018년에 퇴임했다.

3. 기타

파일:7614_5957_1256.jpg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내 루스 카마와의 사연은 2016년 제작된 영화 'A United Kingdom(국내 개봉명은 오직 사랑뿐)'의 모티브가 되었다.

보츠와나 50풀라 지폐의 인물이다.
파일:attachment/보츠와나 풀라/botswanapula03.jpg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고 로디지아 정부에 대한 경제제재를 요구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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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인도 주둔 영국군의 대장이었다. 2002년 5월 22일 인후암으로 사망했다.[2] 당장 바로 옆나라이자 남아프리카를 자기 나와바리로 여기는 강대국이 아파르트헤이트로 악명높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고 독립하기 전의 츠와나는 그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영향력이 매우 거대했다. 거기에 더해 일부 백인들의 흑인차별로 인한 반발만 있었던게 아니라, 국내 일부 흑인들이 백인이면서 평민인 여성을 왕비로 인정할 수 없다며 백인차별까지 해버렸다.[3] 그의 아내 역시 영부인이 되었는데, 이는 아프리카 최초의 백인 영부인의 사례로 여겨진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있기는 하지만 이쪽은 사실상 백인 식민지 국가였기 때문에 논외.[4] 보츠와나에 매장된 다이아몬드 양은 러시아에 버금가는 세계 2위 수준이다.[5]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나, 세네갈도 아프리카 본토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꼽히지만 이들은 1990년대 ~ 2000년대 초반에야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2010년대까지는 말리베냉도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꼽혔으나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라 하기 힘들어진 상황이다.[6] 당장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로디지아가 사실상 백인 식민지 신세였다. 그나마 모리셔스는 아프리카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본토 정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후 신흥독립국 중 독재국가가 되지 않은 경우는 보츠와나를 제외하면 인도, 모리셔스, 동티모르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 인도마저 독립하고 19년 뒤인 1966년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면서 독재정을 경험했다. 특히 1975~1977년 2년간은 빼도 박도 못하는 독재체제였다.[8] 상기된 두 인물의 경우, 둘 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고, 특히 카부스는 영국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쫓아내며 집권했다. 물론 박정희는 수십 명의 정적들을 살해하고 해외에 망명한 정적 암살까지 시도한 빼도 박도 못하는 독재자이기에 자국에서도 호불호가 아주 심하게 갈리고 있지만 카부스는 전제군주이긴 했어도 나름대로 성군으로서의 평가를 받기는 했다. 다만 이런 박한 평가는 카부스에게는 억울할 수 있는데, 카부스는 아버지인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의 폭정을 충고하였으나 아버지가 오히려 자신을 가택연금을 시키자 어쩔 수 없이 영국의 지원을 얻어 아버지를 축출한 것에 가까웠다. 이후에는 왕족만 특혜를 받았던 경제적인 혜택을 빈자를 포함한 일반 국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조치했고, 학교와 병원을 대폭 늘리는 등 공공시설도 많이 세웠으며,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즉. 아버지보다는 확실하게 성군인 셈이다. 반대로 세레체 카마는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됨은 물론, 독재의 길로 빠져들지 않아 대조를 보인다. 허나 카마의 후임들이 이런 장점들을 강조하며 카마를 우상화했다간 오히려 후임들이 카마의 유지격인 민주주의와 경제를 후퇴시켜 오늘날의 보츠와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카마의 후임인 퀘트 마시레도 2002년 "대통령궁을 짓고 권력자의 동상을 세우는 것보다 학교를 하나라도 더 짓는 것을 원했다."고 밝혔다. # 이것만 봐도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 국민들에게 자신들을 찬양할 것을 강요하는 김씨 3대랑 차원이 다르다.[9] 득표율이 각각 80%, 68%, 77%, 75%였다. 이때 보츠와나 민주당은 3개의 야당과 맞붙어 압승했다.[10] 정확히는 59세 생일로부터 12일이 지난 후였다.[11] 물론 보츠와나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장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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