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6 14:03:00

센다이 5세 남아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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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台幼児誘拐殺人事件[1]

1. 개요2. 사건 경위3. 범인에 관하여4. 재판 결과5. 관련 문서

1. 개요

1964년 일본에서 발생한 아동 유괴 살인사건.

2. 사건 경위

1964년 12월 21일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거주하던 금융회사 사장 스가와라 코타로(菅原光太郎)의 3남 스가와라 토모유키(당시 5세)가 유치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나간 뒤 한 남성에게 승용차로 납치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문제의 전화 내용은 토모유키가 다니던 유치원의 외국인 수녀가 일본을 떠나게 되어 기념촬영을 해야 하니 유치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믿은 토모유키가 그대로 혼자 자택에서 약 100m 떨어진 유치원으로 향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토모유키를 납치한 남성은 "다른 아이들이 먼저 버스를 타고 갔으니 데려다 주겠다"는 등 계속 말을 바꿔 가면서 아이를 데리고 시내 이곳저곳을 돌았고 그동안 비행장에서 헬리콥터를 보여주거나 해서 아이를 달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겁에 질린 토모유키가 달리는 차 안에서 울면서 집에 보내 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토모유키가 조수석 시트에서 일어선 순간 범인이 목을 잡고 거세게 흔들자 토모유키는 실신했다. 범인은 실신한 토모유키를 차 트렁크에 옮겨 실었고 이후 끈으로 아이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말았다.

그 무렵 토모유키의 집에서는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니 유치원에서는 기념촬영 운운하는 전화를 한 적이 없으며 외국인 수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유치원 교사를 가장해 거짓 전화로 아이를 유인해 냈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한 후 범인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편 토모유키를 살해한 범인은 시신을 자택 창고에 유기한 뒤 토모유키의 집에 전화를 걸어 몸값으로 500만엔[2]을 요구했다.[3] 이에 경찰은 범인의 전화를 역탐지하여 접선 장소를 특정, 사전에 접선 장소 인근과 범인의 예상 도주 경로에 경찰관 약 950여명을 배치시키고 약속시간이 되어 돈을 넘겨받으러 온 범인을 현장에서 검거할 수 있었다.[4]

그런데 이후 밝혀진 범인의 정체는 다름아닌 전직 영화배우로, 텐진 시치사부로(天津七三郎)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배우였다.

3. 범인에 관하여

텐진 시치사부로의 본명은 쿠루마 코우키치(車興吉)이며 1935년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출생했다. 시치사부로의 부친은 경찰관이었으나 그가 중학생 때 결핵으로 사망했고 자신도 병약했던 탓에 고등학교 진학 이후 병으로 장기결석이 잦아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혼자 상경한 후 1956년 '텐진 시치사부로'라는 예명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는 2년 후인 1958년 후지 테레비 계열의 시대극 드라마 <변환 미카즈키마루(変幻三日月丸)>에 레귤러로 출연했고 비록 주연은 맡지 못했지만 <천황, 황후와 청일전쟁(天皇・皇后と日清戦争)>, <하타모토 구렌타이(旗本愚連隊)> 등 여러 편의 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면서 당시의 거물 배우들과도 호흡을 맞춘 바 있으며 쇼치쿠로 이적한 뒤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으로 유명한 <하라키리>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시치사부로의 영화계 활동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배우로 활동하면서 돈 씀씀이는 점점 커졌지만 그 돈의 대부분을 어머니의 지원에 의존하는 형편이었고 어머니도 동거남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여성 관계로도 문제[5]를 빚은 데다 결정적으로 마약(필로폰) 상습범으로 체포까지 되면서 점차 일거리가 줄어들게 되어 결국 1962년 말경에 연예계를 떠나 고향인 센다이로 낙향한 후 어머니와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함께 평범한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과거의 화려한 생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시치사부로는 지인에게 빚까지 져 가면서 영화배우 시절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이후 사업을 시작했지만 불과 3개월만에 도산했는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던 차에 이전에 업무차 알게 된 금융회사 사장을 떠올렸고 그의 아들인 토모유키를 유괴하여 몸값을 받아내 빚을 갚을 목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1년 전인 1963년에 발생한 요시노부 유괴 살인 사건[6]을 염두에 두고 범행을 고안했다고 진술했다.

4. 재판 결과

1심에서 검찰은 시치사부로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는 전술된 요시노부 유괴 살인 사건 등을 계기로 금전적 이득 목적의 유괴에 대한 형벌 상한이 가중된 형법 개정 이후로는 유괴 사건에 대해 최초로 사형이 구형된 사례였다. 그러나 센다이 지방법원은 1965년 4월 5일에 열린 1심 판결에서 극형에 상응하는 범죄를 저지른 점은 인정되나 피고인의 성장 과정이나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점, 체포된 후 반성의 의지를 보였다는 점을 참작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찰 측은 이에 대해 즉각 항소하였고 2심 재판부인 센다이 고등법원은 1966년 10월 18일 본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범행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피고인의 성장 과정 등 일련의 사정 또한 정상참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외 심리에서 밝혀진 일련의 정황을 종합하건대, 피고인에게 극형을 선고함이 타당하다고 판결해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시치사부로 측은 이에 반발하여 상고했으나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해 1968년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1974년 7월 5일 센다이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 유언을 남기는 대신 <죠가시마의 비(城ヶ島の雨)[7]>라는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고 전해졌다. 이로써 텐진 시치사부로는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 사형당한 유일한 연예인[8]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5. 관련 문서


[1] 센다이 유아 유괴 살인사건[2] 2021년 기준으로 약 5000만엔 상당.[3] 토모유키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이미 한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다시 건 것이다.[4] 토모유키의 가족이 몸값을 가지고 일종의 '미끼'가 되어 범인과 접촉했다. 이 때 범인은 접선 장소에 도착한 가족에게서 현금을 빼앗아 달아나려 했으나 사전에 대기 중이던 경찰들에게 제압되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5] 아사미 케이코라는 여배우와 육체관계를 맺었는데 결혼을 약속한 상태에서 아사미가 임신했지만 시치사부로의 어머니가 반대해서 결국 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다.[6] 당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7] 1913년 10월에 발표된 곡으로 시인 키타하라 하쿠슈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발표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커버하기도 했으며 그 중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버전이 유명하다.[8] 자신의 내연녀를 살해한 가수 카츠미 시게루의 형량은 사형이 아닌 징역 10년에 그쳤고 그나마도 수감된 지 7년 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9] 연예인 출신이 저지른 살인범죄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이쪽은 현역 연예인 신분으로 살인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