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이언스 픽션(SF) 평단에서 가끔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 7, 80년대 영미권의 SF 진영에서 하드 SF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SF사적으로 비교적 뚜렷한 정의를 가진 하드 SF와는 달리 작가들의 성향을 가르는 두리뭉실한 '용어'에 가까우므로 사용시에는 주의해야 한다.상술했듯이 소프트 SF는 명백히 하드 SF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개념이기 때문에, 하드 SF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소프트 SF의 차이는 각각의 작품들이 기반을 둔 '과학'이 무엇이냐에 따라 갈린다. 즉 하드 SF가 물리학, 천문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계열 학문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소프트SF는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등 사회과학과 인문학 계열 학문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수학 공식처럼 모순 없이 딱딱 들어맞는 분류를 원한다면 이 역시 별반 도움은 되지 않는다.
1979년에 SF 평론가 피터 니콜스와 존 클루트에 의해 처음 출간되어 일세를 풍미한 《SF 백과사전》에서는 소프트 SF가 그리 엄밀하지 못한 용어임을 지적하면서, 하드 SF와 소프트 SF로 나누는 방식 또한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한다.[1] 사실 하드 SF와 소프트 SF의 경계는 그렇게 명확하지도 않고, 업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기준도 없다. '대체역사'니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소재에서 비롯된 SF의 하위 장르에 비교해도 범주 자체가 상당히 모호한 셈이다. 따라서 소프트 SF는 하위 장르의 명칭으로 사용되기에 적절한 개념은 아니다.
이렇듯 비평적인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소프트 SF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관해서는 개인차가 많다. 누군가는 초광속여행이나 초능력 등 현재의 과학으로 실현 불가능하거나 설명되지 않는 소재 자체를 '소프트'의 범주에 넣기도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어떠한 과학 기술 변화[2]로 인해 촉발된 사회적 변화에 초점을 두기도 한다. 이렇듯 너무나도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비평 용어이기 때문에 하드 SF처럼 출판적 범주로 독립할 가능성은 낮고, '협의의 하드 SF가 아닌 모든 SF'를 소프트 SF로 보는 단락적인 시점까지 존재하는 것도 이런 개념적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소설에서 가장 오래된 하위 장르 중 하나인 스페이스 오페라와의 관계 설정도 종종 도마에 오른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오락적인 모험 활극인데, 태생적으로 과학적 정합성에 천착하기보다는 신화나 전설의 얼개를 빌려 하드 SF의 기반을 이루는 메타 기법 외삽법으로는 설명하거나 정당화하기 힘든 초월적인 '힘(force)'이나 맥거핀을 포함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소프트 SF에 해당한다는 전통적인 관점과, 먼 미래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충분히 과학적인 설정으로 풀어낸다면 하드 스페이스 오페라도 성립할 수 있다는 현대적인 관점이 상충하는 식이다.
결국 이 모든 차이는 SF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과학'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기인하는데, 시대 변천에 따라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변화해 왔고, SF라는 예술 형식도 (대중 관념보다 적어도 한두 걸음은 더 선행하는 형태로) 함께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비평면에서는) 과학철학적 관점의 도입이 필요해 보인다. SF의 분류 기준으로 종종 지목되는 '과학기술'이나 '과학적 방법론' 역시 분류 대상인 SF보다 훨씬 더 엄밀한 사전적 의미를 가진 표현이므로 사용시에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예시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같은 황금 시대 작가들이 하드 SF 성향을 대표한다면, 소프트 SF는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K. 르 귄 등의 6,70년대 이후 출현한 뉴웨이브 이후 세대에서 비교적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등장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작가들이 소프트 SF 작가에 해당한다.1960년대의 영어권 SF계를 휩쓴 뉴웨이브 운동 시절의 손꼽히는 걸작 중 하나인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크리스털 월드》는 자연과학적 설명과는 무관한 철학적이고 전위적인 설정으로 유명한데, 인류학이나 심리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도입을 통해 SF가 품고 있는 '과학'의 외변을 넓히고자 한 뉴웨이브 SF 작가들의 이런 실험적인 소설들은 (그에 대한 반발로서) 1970년대에 하드 SF붐이 일어나고 1980년대 전후에 소프트 SF라는 개념이 발생하게 된 현실적인 요인으로 간주된다.
상술한 뉴웨이브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어스시 연대기》로 유명한 미국의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헤인 연대기》는 종종 소프트 SF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헤인 연대기》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들은 앤서블이란 통신 장비를 통해 행성끼리 실시간 연락은 가능하지만, 초광속 여행은 실현되지 않아 행성들이 느슨한 연맹 관계를 맺는 우주를 공통의 무대로 삼고 있다. 《헤인 연대기》는 적당히 고립된, 마치 전근대 지구의 섬처럼 고립된 행성의 주민들이 외부 문명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을 소재로 삼는다. 다분히 작가의 인류학적 교양에 기반한 책인 셈이다. 이 시리즈에는 앤시블처럼 현실화되지 않은 장비가 나올지언정 현재 과학 수준에서 알아볼 수 있는 명백한 과학적 오류는 없다.
또다른 예는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라는 소설이다. 2003년에 출간된 이 소설 내부의 세계는 실상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2000년대의 지구와 연대상으로건 기술 발전 정도로건 별 다른 차이가 없는 미국 사회다. 다른 게 있다면 자폐증을 '치료' 및 예방할 수 있는 의료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다니는 회사로부터 자폐증 치료를 '강요'당하는 자폐인이다. 이 소설은 자페인 주인공의 내면과 그 주변 비자폐증 환자들의 반응을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화두를 제시한다.
《어둠의 속도》에서는 SF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소재가 거의 없으며, 실제로 미국에서도 일반 소설 브랜드로 출간되었다.[3] 그렇지만 저자 자신은 명백히 SF 소설로 규정했고, 소프트 SF 팬덤의 입장에서도 훌륭한 SF 소설이다.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자폐를 치료할 수 있게 된다면?'이라는 과학적 가설을 세운 후 일종의 사고실험을 전개해나간 소설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4]
[1] https://sf-encyclopedia.com/entry/soft_sf[2] 그것이 현재 실현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다.[3] 때문에 이 소설을 접한 독자 일각에서는 이게 무슨 SF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4] 사실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는 뭔가 학교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이론과 수식이 나오면 그건 하드 SF, 그러지 않으면 소프트 SF 식으로 단순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