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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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여성이며 자는 대호(大虎)로 봉호는 전공주(全公主).[1] 손권과 보연사의 큰 딸, 손노육의 친언니. 주순, 전종의 아내.2. 정사 삼국지
손노반은 처음에 주유의 장남 주순과 결혼했지만 주순이 요절하자 전종과 재혼했다.[2] 이후 손노반은 남편의 성씨를 따라서 전공주(全公主)라고 불리게 되었다.[3]이궁지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손노반의 모친 보연사가 죽은 후 손권은 손화를 태자로 삼고 손화의 모친 대의황후 왕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다. (왕부인전) 대의황후를 싫어했던 손노반은 손패와 손화 사이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을 때 손화와 그의 어머니 대의황후를 와병 중인 손권에게 모함해서 손화의 입지를 크게 뒤흔들었다. 이때 자신을 돕지 않는 친동생 손노육과의 사이가 나빠졌다.(주부인전)
왕부인과 전공주 사이에 틈이 생겼다. 손권은 일찍이 질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손화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손화의 비(장비)의 숙부인 장휴가 종묘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손화를 초청하여 머물도록 했다. 전공주는 사람을 시켜 은밀히 감시하도록 하고는, 태자가 종묘 안에 있지 않고 오로지 비의 집으로만 가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또 왕부인은 황상(皇上)이 질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로 인해 노여워했다. 왕부인은 근심하다 죽었고, 손화의 총애는 점점 줄어들어 폐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삼국지 오서 손화전 |
손노반의 남편 전종도 손패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한 때 손패파가 정치적 우위를 점유했으나 전종이 죽은 후 여러가지 일로 인하여 손패도 총애를 잃었다. 한편 손노반은 자신의 종손녀 전혜해를 아껴서 손권을 만날 때마다 항상 함께 데리고 다녔다. (전부인전) 입지가 불안해진 손노반은 눈치 빠르게 노선을 갈아타서 이번에는 손권이 최근 총애하는 반부인의 아들 손량에게 전혜해를 시집보냈다.
손량이 가장 어렸기 때문에, 손권은 각별히 마음을 쏟았다. 손량의 누이 전공주는 일찍이 태자 손화와 그의 모친을 모함하였으므로, 심적으로 불안해 했다. 그래서 손권의 마음이 손량에게 기울어진 것에 대하여, 손량과 각별한 관계를 맺으려고 생각하고는 전상의 딸을 자주 칭찬하면서 손량을 위해 그녀를 맞아 들이도록 했다. - 삼국지 오서 손량전 |
250년 8월, 손권은 쌍방을 처벌하겠다면서 손화를 태자에서 폐하고 손패에게 죽음을 명했다. 그리고는 3달 후 다른 아들들을 다 제치고 막내아들 손량을 태자로 삼았다. (오주전) 다시 병상에 누워 심약해진 손권이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손화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손노반, 손준, 손홍 등이 극구 반대해서 무산시켰다.(손화전 주석 오서)
손권이 죽고 손량이 즉위했지만 제갈각이 참살당한 후 손준이 실권을 쥐게 되었다. 손준은 음란해서 궁녀들을 간음하고 손노반과 간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손준전) 그러니까 손노반은 7촌 조카뻘이랑 근친을 한 것이다. 손노반은 손준에게 권하여 손화를 신도군으로 보내고 죽이도록 했다. (하희전) 이에 따라 손준은 제갈각이 생전 손화를 제위에 앉힐 계획이었다는 누명을 씌워서 끝내 손화를 자살하게 만들었다.(손화전)
255년, 손의 일당이 손준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는데 손노반은 친동생 손노육도 손의 등과 공모했다고 모함해서 손노육을 살해하게 만들었다.(주부인전) 손준 사후, 손준의 사촌 손침이 오나라의 권력을 이어 받았다.
257년, 제갈탄의 난이 발발하자 전단, 전역 등 지원군으로 갔는데 승패가 불리해지자 전단, 전역 등은 위나라에 항복해버렸다. (제갈탄전) 이들은 손노반의 시가(媤家)인 전종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오나라에서 손노반의 입지가 불안해졌다.[4]
손노육의 죽음의 진상을 안 손량이 손노반을 추궁하자 손노반은 주거의 두 아들을 모함했고 손량은 그들을 처형시키기로 했다. 손침은 주거의 두 아들과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손량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했으나 손량은 듣지 않았다.(손침전)
태평(太平) 중 손량은 주공주가 전공주에게 해를 당한 것을 알고 전공주에게 그가 죽은 이유를 물었다. 전공주는 두려워하며 그에게 말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모두 주거의 두 아들인 주웅(朱熊)과 주손(朱損)의 소행임이 명백합니다." 손량은 주웅과 주손을 살해했다. 주손의 처는 손준의 누이였기에 손침은 더욱 손량을 꺼렸고, 마침내는 그를 폐해 손휴를 세웠다. - 삼국지 오서 주부인전 |
손노반이 주거의 두 아들을 모함한 사건으로 손노반은 손침과 서로 반목하는 관계로 변질되었다고 여겨진다. 손량은 손노반, 전상, 유승 등과 손침을 축출하려다 계획이 발각되었고 손노반은 예장군에 유폐되었다.(손침전) 이후 손노반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손노반의 후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전종의 아들 전역의 어머니가 손권의 딸이라는 기록과[5] 전종의 막내 아들 전오(全吳)가 손권의 외손(外孫)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6] 전종의 아들 중 최소 전역, 전오는 손노반이 낳았다.
3. 삼국지연의
금공주(金公主)로 나오는데, 정사에서 손노반의 봉호는 전공주(全公主)였지만, 나관중이 온전할 전(全)을 쇠 금(金)으로 잘못 봐서 금공주(金公主)로 오기한 것이다.연의에서는 이궁지쟁이 짤린 덕분에 손노반이 딱 한번만 언급된다. 금공주(金公主)가 태자 손화를 싫어해서 그를 손권에게 참소하여 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손노반 언급의 전부다.
4. 평가
손오 황실에서 가장 권력욕이 강했던 여인으로 사실상 황후자리가 확정이었던 왕부인과 차기 황제인 손화을 모함한 것은 물론 오 황실의 암투를 진두지휘해 내부 균열을 촉진시킨 원흉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 편을 들지 않는다고 친동생인 손노육까지 죽인 것은 물론 자기 7촌 조카와 권력적으로 유착해 성관계까지 가진건 덤.손노반은 손오 황실에서 권력의 냄새를 맡는 능력은 뛰어났다. 보통은 말년에 병에 시달려 노망이 난 걸로 유명한 손권이지만 실은 말년까지 손권의 판단력은 후계문제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돌아간 편이다. 그런 손권을 상대로 모함과 참소를 반복하여 왕부인과 손화의 총애를 빼앗은 뒤 손패를 밀었고, 손화와 손패가 정치적으로 맞붙으면서 두 사람이 모두 손권의 총애를 잃게 되어 손패가 쓸모 없어지자 바로 손권이 미는 차기 황제 후보인 손량에게 자신의 권력 바탕인 전씨 일가의 여인을 붙여 외척과 손씨 황실을 잇는 가교 역할로써의 입지를 다진 부분은 이 여인이 얼마나 권력의 향방을 잘 저울질 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손권도 이후엔 손화의 죄가 없다고 인정했으니, 당연히 그 동안 손노반이 벌였던 참소 역시 인정했다 봐야 하는데 그럼에도 손준과 손노반의 반대로 다시 태자로 삼지 않았다. 이는 이미 세력이 상당히 꺾인 손화보단 손권이 그동안 키워왔던 친위세력이자 외척인 전씨 세력과 연계된 손준과 손노반, 그리고 이들과 연결된 손량에게 힘을 실어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서 였을 것이다. 즉 손노반은 이궁지쟁 내내 깽판을 통해 황실 내 권력을 상당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제갈각 사후 손준이 집권한 시기는 손노반의 최전성기였다. 손준은 제갈각을 제치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손권 직계가 아니어서인지 손씨 종친들로부터 상당한 경계와 따돌림을 받았다고 하는데 손노반은 전씨 일족과 손준이 인척관계였기에 손씨 종친 가운데 유일하게 그를 도와 손준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힘을 보태고 손준과 야합했다. 사실 말이 성관계지 손준이 손노반에게 아첨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이들의 사통껀은 오히려 손준이 권력자 손노반한테 빌붙기 위한 성상납이나 다름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게 후대에 두 사람을 깎아내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말이다. 덕분에 손권 사후 손노반이 뒷배가 된 전씨일가는 오나라에서 이토록 외척이 성한 적이 없었다고 사서에서 적고 있을 정도로 성세를 누리게 된다.
제갈탄의 난 이후 전씨 세력이 약해지고 나서도 손노반의 정치적 세력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손노반의 막내동생이자 황제인 손량은 짐짓 과거 손노반이 손노욕을 모함해 죽인 사건을 끄집어 내면서도 손노반의 악행 자체는 덮어두고 손침을 공격하는 용도로 이를 사용했다. 이후 손량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손침을 내쫒기 위해 손노반과 연합했는데 이러느니 저러느니 해도 손량에게 있어선 손노반이 정치적인 파트너로 꽤나 유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손권과 손량이 굳이 손노반의 행각을 알고서도 그녀를 살려둔 이유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때 확실히 반 손침 세력으로써 활동한 덕인지 이후 황제위에 오른 손휴 역시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누이를 죽이진 않았다. 여러모로 손노반은 손권 말기부터 권력의 행방을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고 후계에 간섭하려는 호족들의 입김을 배제하고 친위세력으로 정계를 장악하려 한 아버지 손권의 시도를 거들어 오나라 정계를 주무른 거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다만 이렇게 손노반이 권력의 획득을 위해서 이리저리 음모와 획책을 벌인것이 오나라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는 볼 수 없다. 손화가 분명 오의 사성 등 대호족 세력의 지지를 받아 향후 호족의 입김에 휘둘리기 쉬운 입장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손화는 장성한 후계자였고 손권이 손화 대신 내세운 손량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권이 이후 병에걸려 위독해지자 손화가 잘못이 없다고 부정하며 다시 태자로 삼을까도 생각했던 것이고 말이다. 결국 손권은 자신의 친위세력이자 능력은 보장되었던 제갈각, 손준, 등윤, 여거 등에게 보정을 맡기고 손노발을 위시한 전씨 세력을 배후로 삼아 황실의 울타리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이 인선은 모두 실패하고야 만다. 제갈각의 정치적 자폭행위야 유명하고 손준은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죽었으며 이후엔 뜬금없이 손권이 내정해두지도 않았던 이레귤러 손침이 권력을 장악해 손량의 친위세력인 등윤, 여거, 손노반을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다분히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호족의 입김을 배제하려 했던 손권의 인선이 실패한 이상 이러니 저러니해도 손화가 후계자 지위를 유지하는게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 역시 배제하기 어려운것도 사실이다.
손노반의 어머니인 보연사는 전형적인 그 시대 규중의 여인으로써의 삶을 살았지만 그 딸은 중국사의 수많은 공주들 가운데서도 태평공주, 안락공주등과 버금가는, 권력을 쟁탈하려한 황가의 여인 중 하나로 기억되게 되어버렸고 오나라 황실의 운명을 뒤틀어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5. 기타
모친 보연사가 미녀였고 조카뻘 손준과 불륜을 저질러 동안의 미녀였다는 설이 있다.6.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손노반/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정사 삼국지에서는 본명인 노반보다 봉호인 전공주로 더 많이 칭해진다.[2] 출처: 주유전, 보부인전.[3] 예문유취(藝文類聚) 인용 청립제왕표(請立諸王表)에 따르면 오나라의 공주의 봉호는 남편의 성씨다.[4] 특히 전역은 손노반의 아들이었다.[5] 출처: 진서 문제본기[6] 출처: 전종전 주석 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