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08:58:04

송강(북송)


송 반란 지도자 · 할거정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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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거정권 군주 | 반란 지도자
전사웅 왕소파 이순 장여
왕균 몽간 왕칙 농전복
농지고 조심 송강 방석
장방창 사빈 이합륭 뇌진
이파비 종상 양요 유예
왕법은 이접 오희 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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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도적 송강3. 관군 장수 송강4. 도적 송강과 관군 송강의 동일인 여부5. 관련 문서

1. 개요

宋江 (? ~ 1121년)

북송 말기의 도적 혹은 관군 장수. 중국사대기서인 《수호전》의 주인공인 호보의 송강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다.

수호전》에서는 하급 관직인 압사(押司)였다고 나오지만 실제 그런 관직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2. 도적 송강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0여개의 도시를 함락하고 이렇게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송사의 기록). 이정기 ?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해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자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두목이 사로잡히자 항복했다.

1939년에 발견된 절가존묘지명[1]에는 날짜에 대한 기술 없이 방랍의 난에 대한 기술 다음 부분에 임금의 명을 받아 초구(草寇, 산적) 송강을 잡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3. 관군 장수 송강

1120년에 방랍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항주, 목주 등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환관인 동관을 강절선무사(江浙宣撫使)로 삼아 유연경(劉延慶), 유광세(劉光世), 신기종(辛企宗), 송강 등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관군 장수 송강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이 토벌군은 1121년 2월에 현지에 도달하여 방랍군을 연이어 격파하였고, 4월에 도주로를 차단하여 방랍을 생포하였으며, 동관이 방랍을 압송하여 개봉에 복귀한 것은 7월이었다.

방랍의 난은 6개 주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어서 방랍이 붙잡힌 후에도 그 잔당들은 계속 저항하였으므로 동관의 회군에 불구하고 그에 대한 토벌은 해를 넘겨 계속되었다. 송강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토벌기록은 1121년 6월의 것이며 이후 관군 송강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4. 도적 송강과 관군 송강의 동일인 여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위 절가존묘지명의 내용도 동일인이라면 소설과 같은 토사구팽이고, 다른 사람이라면 별개의 사건을 기술한 것이 된다.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는 한자도 같고, 송강을 투항시켜 방랍의 난을 토벌해야 한다는 후맹(後孟)의 상주문이 있으며[2] 사료에 등장하는 기간이 극명히 짧은데 그 시기도 비슷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그러한 입장에 기반한 창작물이 바로 수호전이다.

일본의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는 동명이인설을 주장하였는데 宋江 모두 흔한 성과 이름이어서 얼마든지 여러 명의 宋江이 있을 수 있고, 사건의 선후관계도 맞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4월 방랍 생포할 때와 6월의 토벌기록에 관군 장수 송강이 나오니 관군 송강은 그 기간 내내 현지에 있었는데, 개봉으로 복귀한 절가존이 임금의 명을 받고 그 짧은 시간 내에 반란 현지에 있는 송강을 체포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렇게 잡은 도적 송강이 6월에는 다시 관군 장수가 되어 방랍의 난 잔적 토벌에 참가한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절가존의 송강 체포 시기가 방랍 생포 직후라는 점에 대한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의 주장 근거는 불분명하다. 절가존묘지명에는 도적 송강이 잡힌 구체적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방랍의 난에 대한 언급에 이어 도적 송강의 체포기사가 나오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절가존이 방랍의 난에서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송강을 잡은 공으로 1개월도 안 되어 다시 승진했다는 내용을 가지고, "방랍을 잡은 것이 4월이니 송강을 잡은 것 역시 그로부터 1개월 이내"라고 추론한 것으로 보이는데, 송사의 기록에 의하면 방랍이 개봉으로 압송된 것은 7월이고, 장수들에 대한 상은 그 무렵에 내려졌을 가능성이 상당한데,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는 토벌군 본군이 개봉으로 개선한 것이 7월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절가존이 방랍의 난에서 세운 공으로 승진한 것이 4월이라는 점에 대한 명시적인 근거가 없는 이상, 도적 송강이 잡힌 날짜 역시 그 무렵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방랍의 개봉 압송 직후인 7~8월경 송강을 체포한 것으로 보면 동일인으로 가정하더라도 선후관계에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5. 관련 문서



[1] 折可存墓志銘. 방랍의 난 당시 토벌군 장수였던 절가존이라는 사람의 비석에 적힌 글로서 정식 명칭은 宋故武功大夫河東第二將折公墓志銘이다.[2] 다만 후맹은 곧바로 사망하여 송강의 항복을 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