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03:44:45

송한룡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세이도 칸류(正堂漢龍)[1]
송암(松菴)
본관 신평 송씨[2]
출생 1917년 8월 30일[3]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신평리 신촌마을 673번지[4]
사망 1945년 2월 27일
전라북도 고창군
묘소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송용리 송촌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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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7년 8월 30일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신평리 신촌마을 673번에서 아버지 송양석(宋亮錫, 1882. 9. 7 ~ 1920. 1. 11)과 어머니 창녕 조씨(1884. 11. 3 ~ 1965. 1. 14)[5]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1944년 5월 초 고향인 신림면 신평리 구장(區長) 장일선(張日善) 소유의 논에서 같은 마을 사람인 이판오, 리모토 소네츠(李本鏘烈), 미츠야마 코쇼(密山公燮)와 함께 흙·모래를 실어 나르는 일을 했는데, 당일 오후 2시 휴식을 하며 잡담을 하던 도중 이야기의 주제가 태평양 전쟁에까지 옮겨갔다.

이때 송한룡은 "옛날 조선일본전쟁할 때, (조선이) 일본에서 사람 가죽 300매와 불알 2말을 가져왔기 때문에 현재 조선이 일본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6]"고 말하는 등 반일(反日) 시국담을 유포하였고 같이 있던 이판오가 '일제전쟁에서 반드시 패망할 것이며, 왜인(倭人)은 모두 죽여 마땅하다'는 말에 적극 찬동하였다.

얼마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그는 1944년 10월 9일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소위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45년 2월 9일 고문 후유증으로 죽기 직전에 이르자 석방되었으나, 석방된지 18일 만인 1945년 2월 2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송한룡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44년 수형인명부에는 시도 칸류(止堂漢龍)로 기재되어 있다.[2] 참판공파 23세 한(漢) 항렬. 족보명은 송한근(宋漢根).[3] 신평송씨족보에는 1월 8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이 지번은 현재 신림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다.[5] 조학신(曺學信)의 딸이다.[6] 사실 독자들은 이 문장만 봐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의문을 가질 수 있겠는데, 바로 사명대사가 1604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를 다룬 야사 중 일부분이다. 야사의 판본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긴 하나, 보통 왜왕이 사명당을 해치기 위해 여러 가지 묘책을 썼으나 이를 사명대사는 자신의 지혜와 도술로 막아내고, 왜왕으로부터 항서를 받아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항서를 받아내고서 사명대사가 "10년간 매년 처녀의 가죽 300장과 남자 아이의 고환 3말씩 바치라 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송한룡이 당시에 했던 말은 바로 이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송한룡은 사명당 설화를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사명당 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