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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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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티레 1.jpg
(前)물에 잠긴 옛 유적 / (後)티레(수르) 시가지
유네스코 세계 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colbgcolor=#ffbf00><colcolor=#fff> 이름 티레
Tyre
국가·위치 레바논 남 레바논 도, 수르(티레) 시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 연도 1984년
등재 기준 (iii)[1], (iv)[2]
1. 개요2. 역사
2.1. 고대
2.1.1. 티레 왕국
2.1.1.1. 아시리아와 칼데아의 지배2.1.1.2. 아케메네스령 페니키아2.1.1.3. 알렉산드로스 3세의 티레 공방전
2.1.2. 헬레니즘 시대2.1.3. 난세와 일시적인 독립2.1.4. 로마 시대
2.2. 중세 시대
2.2.1. 티레 공방전(제1차: 1111, 제2차: 1124)2.2.2. 십자군 시대(~1291년)
2.3. 14~17세기의 암흑기2.4. 18세기의 부활2.5. 근대
2.5.1. 서구화와 봉건화2.5.2. 제1차 세계대전 시기2.5.3. 프랑스 위임통치령
2.6. 격동의 현대사
2.6.1. 팔레스타인 난민과 정치적 불안2.6.2. 1958년 티레 사태(아사드 vs 칼릴 가문)2.6.3. 사드르 시대와 PLO의 영향력 확대2.6.4. '티레 인민 공화국' (레바논 내전)2.6.5. 이스라엘의 점령 (1982-85)2.6.6. 아말 vs PLO (난민촌 전쟁)2.6.7. 헤즈볼라와 아말2.6.8. 2006년 레바논 전쟁2.6.9. 현재
3. 성경 속 티레
3.1. 티레와 이스라엘 왕국의 교류
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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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صور‎ 수르
페니키아어: 𐤑𐤓 (Ṣūr‎) 수르[3]
히브리어: צוֹר (Tzór‎) 초르
고전 그리스어: Τύρος (Týros) 튀로스[4]
라틴어: Tyrus 튀루스
영어: Tyre 티레

레바논 남부의 지중해로 돌출된 에 들어선 항구 도시.

레바논 남부주의 치소로 인구는 12만 명이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고대 도시들 중 지중해 여러 식민지의 종주국으로서 초기 제국주의의 모습을 띤 도시국가이기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지 지명은 수르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영어식 지명인 티레로 더 알려졌다. 한국어 번역 《성경》에서는 티로,[5] 띠로,[6] 두로[7] 등으로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튀로스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이고, 15% 가량의 마론파 기독교도와 공존한다.

과거 지중해 횡단 교역 및 자주색 염료의 생산으로 고대의 맨해튼이라 불릴 만큼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아테네에 버금가는 부를 자랑하던 티레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된 후 파괴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및 이슬람 제국 시대와 십자군 시기를 거치면서도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하다가, 14세기에 들어 폐허로 전락했으나 17~18세기경 레바논 아미르국에 의해 재건되어 현대에 이른다. 오늘날에는 이-팔 갈등에 휘말려 레바논 내전2006년 레바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고, 2007년부터 유엔 평화 유지군의 일원으로 도시 동쪽 외곽에 동명부대가 주둔한다.

2. 역사

파일:aac6c4b4f708f8061acfb0265e53d19b.jpg

티레는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뉜다. 그중 신도시는 육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티레 섬에 들어선, 요새화된 도시를 말한다. 신도시는 바다가 해자처럼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 아슈르바니팔의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은 물론 네부카드네자르 2세바빌론 제10왕조의 군대마저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헬레폴리스라는 공성 병기로 간척까지 하면서 간신히 점령했기에 고대 세계의 철옹성이라고 불렸다.

2.1. 고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도 불리는 레반트 지역에서도 특히 지중해를 끼고 있는 레바논은 땅이 굉장히 비옥하여 고대부터 잉여생산물을 생산하던 지역이라 이른 시기부터 문명이 일어섰다. 레바논 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문명은 기원전 5000년 무렵의 비블로스였는데, 비블로스인들이 점차 내려오면서 시돈과 티레(수르), 하솔을 건설하여 페니키아를 이루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티레는 기원전 2750년경에 건설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페니키아인들의 신에서 이름을 따온 멜카르트였으나, 기원전 1350년대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말기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부터 수르로 표기되었다. 이는 현재의 아랍어 지명인 '수르'로 이어진다. 즉 현지에서는 무려 3천 년간 같은 지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만 라틴어 및 그리스어로는 튀로스라 표기되었고, 영어의 티레로 이어져 서방권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티레의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한 일화가 유명하다.

티레의 전설적인 공주 에우로페는 유럽의 어원이 되었고, 에우로페의 형제들이 그녀를 찾아 나서다가 카드모스테베를 세우고 킬릭스가 킬리키아를 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카드모스는 페니키아 문자를 헬라스(그리스)에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승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문명에 있어 페니키아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티레가 먼 옛날부터 페니키아 연맹에 소속된 도시국가로서, 자체적인 왕국을 이루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16세기에 들어 티레는 막 시리아로 세력을 넓히던 이집트 신왕국에 복속하여, 그 보호를 받으며 무역을 통해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다. 또한 이 무렵부터 티레의 특산물인 자주빛 염료 생산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훗날 티레 자주색(Tyrian Purple)이라 불리며 지중해권의 고급 옷감으로 부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페니키아가 보라색을 의미할 정도였다.

2.1.1. 티레 왕국

파일:멜카르드.jpg파일:티레 이집트.jpg
고대 티레의 주신이자 옛 지명의 어원인 멜카르트 신의 두상 티레에서 발굴된 고대 이집트 비석

티레의 왕정은 앞서 언급된 아마르나 서신에서 수르 국왕 아비밀쿠가 언급되며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원전 14~13세기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와 히타이트의 충돌 당시 후자가 티레를 포위하자 이집트군이 구원하기도 했다. 기원전 12세기경, 바다 민족의 침공으로 이집트의 패권이 붕괴하고 우가리트가 멸망하며 찾아온 혼란기에 티레는 크게 성장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지역[8]의 페니키아 계열 도시국가들을 정복해 나가던 히브리인(유대인의 원류)들은 그 맹주인 하솔을 점령했으나, 티레와 '위대한 시돈'에선 격퇴되었다. 이로써 현 이스라엘-레바논 국경과 얼추 비슷하게 가나안(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 지역이 나뉘었고, 후자의 으뜸 도시가 바로 티레였다. 기원전 11~10세기, 티레는 왕성한 해상 활동을 통해 지중해에 여러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9] 당시 티레의 위상은 엄청나서, 지중해가 티레 해(Tyrian Sea)로 불리고, 페니키아가 튀리아(Tyria)로 불릴 정도였다.

훗날 티레보다 강성해지는 카르타고조차 로마와 전쟁에 돌입하여 국운을 건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까지 티레에게 꾸준히 조공을 바칠 정도로, 페니키아 권역에 있어 티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애초에 후술하겠지만, 카르타고를 세운 엘리사(디도) 여왕 역시 티레의 공주이자 공동 군주 출신이었다. 그리스에게도 티레인들은 페니키아 문자와 20진법, 조선술 등의 선진 기술을 전해준 고마운 이웃이었다. 티레의 학자들은 천문학을 집중 탐구하여 항해술의 발전을 꾀했고, 티레의 상선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오늘날의 영국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천문학과 더불어 선박 건조에 필요한 금속 가공업도 발달했고, 인구의 증가와 함께 건축술 및 석공예도 발달했다. 고대의 티레는 무역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지중해 권역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한편, 당시의 티레 섬에는 부족한 면적 때문에 다층 건물들이 세워져 도시에 당도한 다양한 민족의 방문자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티레를 고대 세계의 뉴욕이라 일컫기도 한다.[10] 티레 왕국의 전성기는 히람 1세(기원전 980 ~ 947년 재위)의 치세였다. 약 천 년 후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히람 1세가 티레 섬을 확장했으며 멜카르트, 아스타르테(이슈타르), 바알 샤멤 등의 신전을 세웠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는 널리 기억되었다. 외교에 있어 히람 1세는 동시대 이스라엘 왕국의 군주들이었던 다윗솔로몬 부자와 친교를 맺어 자주 교류했고,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에 장인들과 레바논의 삼나무 목재를 제공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또한 히람 1세는 블레셋 해적들을 격퇴하여 아라비아, 북/동아프리카 등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그중에서도 키프로스 섬과의 교류가 특히 활발했다. 43년에 달하는 히람 1세의 안정적인 치세 동안 티레의 상인들은 하이집트의 멤피스 등 지중해 각지로 진출하여 공동체를 형성했고, 당시 알려진 세계 곳곳에서 모인 물품들이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티레 섬(이자 요새)의 창고에 보관되었다.

현재로 말하면 티레는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자 조선업 및 금융업의 중심지였으며, 다국적•다인종의 사람들이 거쳐가는 교통 허브였다. 다만 히람 1세가 승하한 후 계승 분쟁이 이어지면서 티레는 일시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정치적인 안정이 회복된 후, 티레의 왕권은 축소되어 거대한 부를 이룬 상인 가문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는 원로원의 발언권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9세기, 티레 왕국은 다시 출현한 명군인 이소바알 1세(또는 엣바알, 기원전 887 ~ 856년 재위)의 치세 때 재차 전성기를 맞았다. 이소바알 1세는 시돈을 포함한 페니키아 전역[11]을 통일하고, 키프로스 섬과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일부까지 점령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히람 1세와 마찬가지로 이소바알 1세 역시 이웃들과 친선을 유지하여 딸인 이제벨북이스라엘 왕국 오므리 왕가 출신의 군주였던 아합과 결혼시켰고, 그녀는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정착시키려다가 예후의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그 무렵 티레는 서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신아시리아 제국에 복속했다. 다만 이집트 신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복속은 형식상에 그쳤고, 티레는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면서도 아시리아의 보호하에 활발한 무역과 경제적인 번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기원전 832년, 이소바알 1세의 손자였던 마탄 1세는 승하하면서 아들 피그말리온과 딸 엘리사(디도)에게 공동으로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남매는 곧 권력 다툼을 벌였고, 패배한 엘리사는 기원전 824년 자신의 세력으로 함대를 구성하여 티레를 떠났다. 10년 후 그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신도시'를 뜻하는 카르트 하다쉬트, 즉 카르타고를 세웠다.[12] 티레의 번영을 증명하듯, 《구약성경》에는 티레의 심판이 같은 페니키아계 도시국가인 시돈이나 비블로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여러 경전에 걸쳐 자주 언급된다. 이는 티레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괴뢰화하고, 멜카르트(몰렉)를 숭배하여 인신공양을 행했으며[13] 무역에 있어 이스라엘의 경쟁 상대였기 때문이었다.[14]
2.1.1.1. 아시리아와 칼데아의 지배
기원전 8세기에 들어 더욱 강력해진 신아시리아는 페니키아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티레의 국왕이었던 히람 2세에게 연공을 요구하는 한편, 남쪽 유대 지방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다. 뒤이은 샬마네세르 5세는 다른 페니키아계 도시들과 함께 기원전 725~720년간 무려 5년에 걸쳐 티레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15] 제해권이 있는 한 티레는 얼마든지 포위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다만 아시리아의 지속적인 압박에 못 이겨 기원전 709년, 티레는 키프로스 섬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기원전 700년 경에는 아시리아의 전성기를 이끈 센나케리브가 또다시 티레를 포위했고, 역시 함락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티레의 국왕이었던 룰리는 페니키아에 대한 패권 및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써 티레는 도시 자체만을 영위할 수 있었고, 지중해 각지에 정착했던 티레계 이주민들은 도시국가로 전락한 고향으로 도주해야만 했다.

룰리 왕 이후 티레에는 친아시리아파 군주들이 집권했고, 그중 바알 1세의 경우에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국왕 에사르하돈의 시돈 반란 진압을 도운 대가로 팔레스타인 해안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얻기도 했다. 이로써 자신감을 얻은 바알(혹은 발루) 1세는 이집트 제25왕조의 누비아계 흑인 파라오였던 타하르카와 동맹을 맺었다가 에사르하돈에게 보복을 당했다. 에세르하돈의 후계자였던 아슈르바니팔은 티레가 또다시 반란의 조짐을 보이자, 그 배후지를 초토화시켰다. 다만 티레 섬은 막대한 세금을 대가로 파괴를 면했다. 기원전 7세기에 들어 티레의 군주들은 종종 신아시리아 제국에서 임명한 총독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렇듯 사실상 독립을 상실한 상태가 이어지다가, 기원전 610년대 신아시리아 제국이 내우외환으로 붕괴되자 티레와 페니키아계 도시들은 자유를 되찾고 연공의 압박에서 벗어나 재차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곧 등장한 새로운 패권국인 칼데아(신바빌로니아, 바빌론 제10왕조)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605년 칼데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제1차 시리아 원정에 나서자 티레는 다른 페니키아계 도시들과 함께 이집트, 남유대, 에돔, 모압 왕국의 반(反)바빌론 연합에 가담하여 신바빌로니아군에 저항한 결과 독립을 지킬 수 있었다. 다만 기원전 586년, 제2차 시리아 원정에 나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다윗 왕조의 남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후 티레를 포위했다. 이 포위전은 무려 13년간 이어졌고, 이는 17세기경의 칸디아 공방전[16]과 함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공성전 중 하나였다. 제해권의 확보로 보급이 이어지는 한 티레 섬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고, 결국 티레는 함락되지 않았으며 난공불락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다만 크게 약화된 티레는 칼데아에 복속하고 연공을 납부하기로 합의했으며, 네부카드네자르 2세 역시 그에 만족하고 이후로 티레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편, 장기간의 티레 포위전을 틈타 명목상으로 티레에 복속해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완전히 독립했다(기원전 574년). 또한 장기 포위로 인한 무역의 단절로 인해 티레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무역 패권을 전통적인 경쟁 도시인 시돈에 빼앗겼다. 이는 통화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2.1.1.2. 아케메네스령 페니키아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대왕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자 페니키아 역시 그에게 복속했다. 키루스 2세는 페니키아 지역을 아르와드, 비블로스, 시돈, 티레의 4개 제후국으로 분할했다. 200년 동안 이어진 페르시아의 지배기에 페니키아는 안정을 누리며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450년 티레를 방문한 헤로도토스는, 시내의 멜카르트 신전에 순금과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기둥 등 봉헌물들이 가득하여 밤에도 환하게 빛났다고 기록했다. 페니키아 함대는 페르시아 해군의 중추를 구성했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등에서 활약했다. 다만 캄비세스 2세가 카르타고 원정을 준비했을 때 티레는 자매 도시에 대한 참전을 거부했다. 페니키아 4개 도시의 왕정 체제는 점차 공화정으로 전환되었고, 티레에서는 6년 임기의 판관 출신 집정관 체제가 수립되었다.[17]

페르시아 지배기에 티레의 경제는 점차 자주색 옷감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기원전 450년부터 50년 동안 티레에는 자체적인 동전 주조권이 주어졌는데, 그 은화의 도안에도 자주색 염료의 재료인 고둥이 등장할 정도였다.[18] 티레는 자주색 옷감을 생산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는데, 로마 시대까지 황제가 입는 최고급 옷감으로 인식되었다. 훗날 티레가 멸망하면서 자주색 염료 기술까지 실전된 탓에[19] 붉은색으로 대체되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한편, 이집트의 지배가 끝나고 6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티레에서는 여전히 이집트 미술의 영향력이 유지되었다. 200년 가량 안정을 유지하던 티레는 기원전 4세기에 들어 재차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는 기원전 411년, 티레 계열의 페니키아 왕실이 지배하던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에바고라스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면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392년 에바고라스는 이집트와 아테네의 지원하에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고 티레를 기습 점령했다(이때 도시 안에서 내통이 있었다고도 한다). 다만 그는 10년 후 페르시아에 귀순했고, 티레도 다시 페르시아령으로 돌아왔다. 기원전 359년에는 시돈의 압다슈타르트 1세가 이집트와 아테네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355년에 진압당하고, 이후 4년간 군정이 실시되면서 시돈의 경제가 쇠퇴했다. 그 결과 시돈은 티레에게 여러 영토와 무역 패권을 내어주었다. 기원전 350년경 티레에는 아제밀코스 왕이 집권했고, 그는 철저히 친페르시아 파였다. 그러던 기원전 333년 그라니코스 전투이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에게 대승을 거둔 알렉산드로스 3세가 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이때 비블로스와 시돈 등 페르시아의 지배에 지쳐 있었던 페니키아계 도시들이 자발적으로 복속해와 조공을 바쳤고, 티레 역시 사절을 보내어 대왕의 요구에 승복하는 의사를 밝혔다.
2.1.1.3. 알렉산드로스 3세의 티레 공방전
파일:tyreseige.gif
알렉산드로스 3세의 티레 공격(상상도)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그리스 지역에 '티레의 헤라클레스'이자 '가장 오래된 헤라클레스 신전'이라고 알려져 있었던 멜카르트 신전의 참배(희생 의식)를 요구했다. 당시 아제밀코스 왕은 페르시아 함대와 함께 주둔 중이었는데, 티레 주민들은 싸움의 승자가 누가 될지 몰라 중립을 지키고 싶어했고, 알렉산드로스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지만 페르시아든 마케도니아든 외부 군대의 시내 진입은 곤란하다며 대신 육지의 구도시에 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에 봉헌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요청이 거부당한 데다가 티레가 여전히 페르시아에 충성한다고 여겨 분노했고, 결국 난공불락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티레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구도시를 허물어 획득한 자재로 티레 섬과 육지 사이의 바다를 간척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연륙교를 통해 역사상 가장 높은 공성탑인 헬레폴리스를 이동시켜 물자가 부족해진 신도시에 맹공을 퍼부었다.

이때 아제밀코스와 페르시아군이 합류하여 함께 저항했는데, 이 티레 공방전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중 단일 전투로는 가장 오래 걸린 7개월 간의 격렬한 공방전이었다. 마케도니아군이 간척을 하며 점차 접근해오자 보복을 우려한 티레 주민들은 노인과 여성, 아이들을 자매 도시인 서쪽의 카르타고로 대피시켰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에게 강제 동원되어 티레의 해상 봉쇄를 맡고 있었던 시돈 및 비블로스의 페니키아 함대도 동족들의 탈출을 비밀리에 도왔다고 한다. 결국 티레는 함락되었고 티레 수비대 8,000명이 전사했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은 겨우 400명이 전사했다. 도시가 점령된 후 아제밀코스와 대신들, 그리고 마침 티레에 와 있던 카르타고 사절들은 멜카르트 신전으로 피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사면하여 살려주는 대신 왕정을 폐지했다. 아리아노스에 의하면 완강히 저항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렉산드로스는 티레 주민 30,000명을 노예로 팔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조치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도 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티레의 성주를 잡아서 산 채로 전차에 매달고, 자갈밭을 전속력으로 달려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식으로 보복했고, 티레의 지도층 3,000명은 해변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고 남은 30,000여 명은 노예로 만들어 평생 강제 노역에 시달리게 했고, 그 노동력으로 티레 섬과 육지 간에 매립을 진행시켜 섬을 반도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40,000명에 달하는 주민들 중 아제밀코스와 일부 대신들을 제외한 이들은 전부 죽거나 노예가 되었으니, 티레에 있어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악몽 그 자체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산은 그대로 남아 티레 신도시는 그때부터 더이상 섬이 아닌 반도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점차 구도시와 신도시 모두가 개발되어 하나의 도심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2.1.2.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하자, 그 주요 전장의 한복판에 해당했던 티레의 전술적 가치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티레를 포함한 페니키아는 대왕의 친구였던 미틸레네의 라오메돈[20]의 것이 되었는데, 기원전 320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장군 니카노르를 파견해 이곳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고, 기원전 319년에는 안티파트로스 사후 폴리페르콘과 동맹하여 재기에 성공한 제국 통일파의 에우메네스킬리키아와 페니키아를 장악했다. 기원전 317년, 비티니아를 평정한 제국 분할파의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가 남하하자 에우메네스는 이라크 방면으로 도주했다. 힘의 공백에 놓인 페니키아는 재차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것이 되었고, 에우메네스는 2년 후 살해당했다.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15년, 티레를 포위했다.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파괴에서 막 회복된 후였음에도 1년간 버티다가 결국 함락되었다.

그후 안티고노스 1세는 카산드로스 지배하의 그리스 폴리스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티레 선언>을 행하며 반란을 선동한 후,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페니키아를 맡기고 재차 소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그 틈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페니키아로 재침공했으나, 안티고노스 1세가 회군하자 약탈한 후 철수했다.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 1세는 입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에게 패배하여 전사했고, 그의 제국은 붕괴되었다. 다만 그리스에서 재기에 성공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287년, 아직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던 페니키아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넘겨 그와 휴전한 후 소아시아에서 셀레우코스 1세와 재차 맞섰으나 역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21] 한편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티레에는 자체적인 왕정이 복원되었다가, 기원전 275년 잠깐 셀레우코스 왕조의 점령기를 거친 후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반세기 이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령이었던 티레는 기원전 218년 제4차 시리아 전쟁 당시 대왕 안티오코스 3세가 점령했다가 이듬해 라피아 전투로 물러났다. 그리고 기원전 200년, 5차 시리아 전쟁 시기 셀레우코스 왕조가 점령한 후 기원전 198년에 완전히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러한 난세에도 불구하고 티레는 동전 주조권 등의 특권을 누렸다. 비록 지중해 무역에 있어 알렉산드리아에게 밀리긴 했으나, 실크로드의 서쪽 종단으로서 번영했다. 문화에 있어 티레는 빠르게 헬레니즘화되었다. 티레에서는 그리스식 종교제의 및 희생 봉헌, 체육대회, 야외극, 각종 기념 행렬이 일상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티레는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안티파트로스, 철학자 디오도로스, 아폴로니오스 등의 학자들을 배출했다. 근현대 아랍 작가들은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 역시 티레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포에니 전쟁 당시 티레는 '자매도시'였던 카르타고에게 온정적이었고, 기원전 195년 명장 한니발이 패배한 후 배편으로 우선 티레에 왔다가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향하기도 했다.

2.1.3. 난세와 일시적인 독립

기원전 2세기경 셀레우코스 왕조의 쇠퇴 및 내전기에 티레는 여러 왕위 도전자들의 구애를 받았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소도 대표적으로 기원전 152년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가 티레로 피신했고, 기원전 126년에는 폐위된 데메트리오스 2세가 배편으로 티레에 당도하여 헤라클레스 신전의 사제가 되어 은퇴할 것을 청했으나 항구에 내리자마자 총독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 사건과 함께 티레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했고, 이듬해인 기원전 125년에는 기존에 쓰이던 자체적인 태음-태양력을 채택하며 자립을 공식화했다. 약 500년 만에 독립을 회복한 티레는 무역으로 크게 번영했고, 티레의 동전은 동지중해의 기축 통화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함께 지속된 전란으로 티레의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페니키아인들은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를 초청했다. 이에 티그라네스 2세가 페니키아의 왕이 되어 질서를 회복했으나, 기원전 69년 루쿨루스의 로마군에게 패배한 후 루쿨루스가 옹립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3세가 페니키아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13세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고, 루쿨루스의 후임인 폼페이우스는 그를 암살하고 간신히 숨만 붙어 있었던 셀레우코스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로써 티레는 로마령 시리아에 편성되었다.

2.1.4. 로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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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의 로마 유적. 근래에 복원된 개선문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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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 티레의 중심가였던 모자이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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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의 히포드룸 유적(2세기 건립)

기원전 64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멸망하면서 티레는 로마 공화정의 강역이 되었다. 티레는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 거금을 쥐어 준 덕에 '키비타스 포에데라타(civitas foederata)', 즉 자치도시로 지정되어 자유를 누렸다. 다만 로마 지배 초기에도 유지되던 왕정은 기원전 42년 마리온 왕을 마지막으로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 시기 티레는 로마 가도를 통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연결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외항이 되었다. 동시에 기존의 자주빛 염료 외에도 질 좋은 섬유(리넨)와 '고대의 캐비아'라 불린 생선 액젓인 가룸을 생산하여 크게 번영했다. 로마 시기의 티레는 동방에서 이어진 실크로드의 서쪽 종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 역시 티레에 방문하여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서기 1세기 중반 티레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고, 바울이 전도 기행 중에 방문하여 설교했다.

서기 130년, 순행 중에 티레를 방문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3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대도시'란 의미인 '메트로폴리스' 칭호를 하사하고 자체적인 동전 주조권을 허락했다. 티레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과 당대 최대 규모의 히드포룸, 3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경기장 등이 세워졌다. 거대한 도시 티레의 물 공급을 위해서 5km에 달하는 수도교 역시 더해졌다. 또한 당대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티레의 파울루스가 로마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페스켄니우스 니게르 간의 내전 당시 티레는 과거의 식민지였던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전자를 지지했는데, 이에 니게르의 군대가 보복으로 티레를 약탈하고 주민 다수를 살상했다. 이후 최종 승자가 된 세베루스 왕조의 초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티레의 충성심을 높게 사서 '콜로니아(식민도시)' 지위를 부여했다. 이와 함께 로마 시민권도 자동적으로 부여되었고, 198년에는 신설된 시리아 포에니케주의 주도로 지정되어 티레의 경제적인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3세기경 세베루스 왕조 로마 제국의 변태적인 암군이었던 엘라가발루스는 미적 감각이 있었던 황제로 평가되는데, 그는 카르타고 멸망 후에도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된 티레의 페니키아 문명에 굉장히 심취하여 로마 황제로는 처음으로 동방적인 티레의 자주옷을 입었고, 페니키아의 주신이었던 바알을 숭배했다. 그 결과 이후 자주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그의 후임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섭정을 맡은 법학자 울피아누스 역시 티레 출신이었다. 그 외에도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 등 티레는 서기 2~3세기경 로마 제국의 석학들을 다수 배출한 도시였다. 한편 당시 티레의 히포드룸에서는 4년에 1번씩 멜카르트-헤라클레스 신에게 봉헌된 헤라클리아 경기가 열렸는데, 3세기에 들어 기독교가 성장하자 로마 당국은 다신교 지지의 일환으로 멜카르트 신앙 등 티레의 고대 종교를 장려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교세 확장은 계속되었고, 박해가 수반되었다.

군인 황제 시대인 251~252년 데키우스 황제의 전면적인 대박해 때,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기독교 철학자인 오리게네스가 티레에서 고문을 당한 후 253년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때 티레는 300년경 총독인 친부에게 고문당한 후 처형된 성 크리스티나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또한 304년에 티레에서는 기독교도 500여 명이 고문 후 처형되었다. 얼마 후 대지진이 발생하여 다수의 사망자와 피해가 발생했고, 이는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겨졌다. 얼마 후 젊고 유복한 주교 파울리누스가 (아마 옛 멜카르트 유구에 세워진 후) 파괴된 교회 터에 바실리카(성당)를 세웠고, 그 제단에 순교자 오리게네스를 안장했다. 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심 성당 중 하나였다. 역사상 유명한 <밀라노 칙령> 이후인 315년에는 주교 유세비우스가 다른 성당을 세웠고, 그가 자신의 저서에 적은 연혁은 교회사상 가장 오래된 성당 기록 중 하나였다.[22]

서기 4세기 초엽 티레는 행정 치소와 일원화된 지역 교구 중심지(caput et metropolis)가 되었다. 그 무렵 티레에서 태어난 성 프루멘티오스는 동생인 에데시오스 및 숙부와 함께 홍해에서 항해하던 도중 에리트레아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구조 이후 에데시오스는 사제가 되기 위해 티레로 귀환한 반면, 프루멘티오스는 악숨 왕국에 기독교를 전도했고, 첫 번째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기독교화 역시 티레의 항해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기독교화 후에도 티레는 번영을 유지했고, 구도시와 신도시 모두 발전했다. 이어진 동로마 제국 시기에도 염료 산업과 실크로드 교역이 활발히 유지되었고, 그에 더하여 중국의 기술을 훔쳐다가 자체적으로 비단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번영은 구도시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된 300개 이상의 고급 석관(sarcophagi)과 5세기에 조성된 길이 400m, 폭 4~5m의 석회암 포장 도로에서 나타난다.

그 옆에는 각각 5세기 및 6세기 초에 세워진, 대리석으로 장식된 교회가 있었다. 동로마 시기 티레의 대주교는 레반트 지역의 주교들 중 으뜸이었다. 다만 멜카르트 숭배 등 다신교 전통도 일부 잔존했다. 경제 및 건축적인 번영을 구가하던 티레는 6세기에 들어 502년의 지진을 시작으로 연이어 재난을 겪게 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551년 베이루트 대지진 당시 쓰나미가 구도시 쪽 개선문을 파괴했고, 이집트 항구 및 신도심의 남부 항구 일부가 침수되어 현재까지 수중 유적으로 남아있다. 6~7세기에는 정치적인 혼란 및 전란이 겹쳐 인구 감소가 심화되었다. 7세기 초엽 호스로 2세사산 제국군에 점령되었던 도시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의해 동로마령으로 회복되었으나, 640년(혹은 638년) 라쉬둔 칼리파조 이슬람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2.2. 중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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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세기 이집트 시아파 파티마 칼리파조 시기에 옛 로마 유적을 활용하여 세워진 모스크.

이슬람 정복 이후 티레에는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었고, 신도심이 일부 수몰되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항구로 여겨졌다. 640년대 말엽 시리아 총독이었던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 1세는 티레에서 키프로스 섬 원정 함대를 발진시켰다. 우마이야 칼리파조 시기 티레에는 아랍인들이 정착했고, 이슬람이 점차 확산되었다.[23] 이와 함께 주민들의 언어 역시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대체되었다. 8~10세기 티레는 아랍권의 문화 중심지 중 하나로서, 여러 학자들과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면서도 이전과 같이 유대계 주민들 역시 존재했고, 상업에 종사했다. 엘미나 구역의 발굴을 통해, 학자들은 한 번에 50톤의 유리 생산이 가능한 이슬람 초기 유리 용광로를 찾아냈다. 이슬람 황금기의 티레 주변에는 사탕수수 농장이 들어서 설탕 생산 역시 활성화되었으며 산업의 다변화도 이루어졌고, 실크로드 무역과 자주색 염료 산업 역시 성황을 이루었다.

수니파인 우마이야 칼리파조와 아바스 칼리파조 시기 동안 별탈없이 지내던 티레는 975년 이집트에서 북진한 시아파 파티마 칼리파조에게 점령되었다. 파티마 조의 지배기간 중 옛 멜카르트 신전 자리에 대사원이 건립되었다. 996년, 티레는 알라카라는 선원의 주동하에 시아파 파티마 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파티마 왕조는 아부 압둘라 알 후세인 휘하의 진압군을 파견했고 도시는 수륙 양면으로 포위되었다. 이듬해(997) 파티마 왕조의 적수인 동로마 제국이 해군을 파견하여 티레를 도우려고 했으나 도시를 봉쇄하고 있었던 파티마 해군에게 대패했다. 마침내 998년 5월, 2년간 저항하던 도시가 함락되었다. 저항한 티레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이집트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수장인 알라카는 화형에 처해진 후 십자가에 매달렸다. 주모자들과 동로마군 포로 200명 역시 처형되었으며 티레의 반란은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1086년 티레는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가 3년 후 파티마령으로 회복되었다.

10~12세기 동안 티레의 20,000명의 인구는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이후 티레는 십자군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남하 당시에 티레는 조공을 바쳐 공격을 피했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대학살 이후 십자군은 레반트의 여러 항구 도시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하이파카이사레아에 이어 3년 이상 버티던 아크레가 1104년에 항복하자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북쪽의 안티오크 공국과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 사이에 포위된 격이 되었다. 1107년,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가 티레에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으나 거대한 성벽을 보고서 곧 회군했다. 그리고 1109년 7월, 무려 7년 넘게 항전하던 트리폴리가 함락되었다. 트리폴리 주민들이 주군을 배신해가며 바라던 이집트 해군은 함락 후 1주일 뒤에야 트리폴리 남쪽의 티레에 닻을 내렸다. 1110년 5월 베이루트, 12월 시돈이 함락되자 많은 난민들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티레로 몰려들었다.

2.2.1. 티레 공방전(제1차: 1111, 제2차: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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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십자군[24]과 티레 공방전.

1111년 여름 아슈켈론 공략에 실패한 보두앵 1세는 그해 12월 재차 티레를 공격했다. 십자군은 엄청난 크기의 파성추를 지닌 공성탑을 세워 성벽을 공격했다. 벽의 일부가 무너지며 함락의 위기에 처한 찰나, 트리폴리 출신의 난민 뱃사공이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쇠갈고리를 만들어 파성추에 걸었고, 수비대가 이를 잡아당기자 공성탑이 기울었다. 이에 탑이 무너질까 염려한 포위군은 파성추를 스스로 파괴했다. 십자군이 재정비하는 동안 주민들은 성벽을 보수할 수 있었다. 이후 십자군은 10kg 짜리 철을 덧씌운 30m 길이의 파성추를 제작하여 재차 공격에 나섰는데, 이에 수비측은 나무 받침대에 오물을 가득 담은 솥을 올려 놓은 후 그들에게 끼얹었다.

이에 십자군이 당황하자, 그 틈에 수비대는 기름과 역청을 넣은 항아리에 불이 붙은 건초를 묶어 공성탑에 던졌다. 그 효과는 엄청났고 십자군은 물은 물론이고, 포도주까지 꺼내와 소화를 시도했지만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던 수비측이 끓는 기름을 끼얹자 불길은 멈출 수 없게 되었다. 1112년 4월 10일, 결국 공성탑은 전소되었고 공격군은 물러났다. 4월 12일, 십자군이 자신들의 선박까지 불태우고 퇴각하자 티레의 수비군은 성문을 나와 그들을 추격했고 무기를 포함한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툭테긴과 파티마군이 개입하자 십자군은 완전히 물러섰다. 이때 십자군의 전사자는 2,000명에 달했다. 티레 시민들이 133일간의 포위를 견뎌낸 것은 1111년 샤이자르 전투와 함께 십자군에 연패했던 이슬람권의 사기를 회복시켜 주었다. 1122년 파티마 조는 툭테긴에게 티레를 매각했고, 후자는 수비대를 배치했다.

1123년 아르투크 왕조의 아미르였던 발라크는 에데사 백작 조슬랭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나섰는데, 1123년 6월 방심한 채로 매 사냥에 나섰다가 그 역시 발라크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 120척이 팔레스타인 앞바다에 나타나 파티마 해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보두앵 2세의 구출 대신 베네치아와 함께 티레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1124년 2월, 도시의 1/3을 차지한다는 조약하에 베네치아 함대는 티레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티레는 완전히 고립되어 외로운 싸움을 지속했다. 십자군이 공성탑을 세우자 수비군도 투석기를 설치해 역공했다. 또한 일부 잠수병들이 베네치아 선박을 파괴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천혜의 요새였지만 성 내부에 우물이 없었던 티레는 외부의 보급 없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티레의 구원에 나설 것을 약속한 발라크가 1124년 5월 6일, 반란을 일으킨 만비지 요새를 포위하던 중 어이없이 전사했다. 티레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툭테긴이 포위망에 접근하긴 했으나 트리폴리 백작 퐁스와 대면하자 싸움도 안 해보고 후퇴해버렸다. 그는 대신 6월부터 협상을 중재했다. 1개월간의 논의 끝에, 주민 중 떠나길 원하는 사람은 가족과 재산을 대동할 수 있고, 남길 원하는 사람은 사유재산을 보호받는 조건하의 항복이 결정되었다. 수비대는 그해 7월 7일에 항복했다. 남기를 택한 기독교도 주민들과 달리 상당수의 무슬림 주민들은 후사인의 머리 등의 유물과 함께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5개월 반의 공방전 끝에 티레에 입성한 십자군은 고작 5포대의 밀만을 발견했다. 티레는 (제2차 십자군 이전) 십자군이 점령한 마지막 도시였다. 이후 티레는 이슬람권이 아닌 십자군의 주요 요새로 기능하게 된다.

2.2.2. 십자군 시대(~12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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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시기의 성당.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유골이 묻혀 있다고 전해진다.

협정에서 명시된 대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티레에서의 무역 특권과 세금의 1/3을 차지했으며, 항구 인근에 16개 가옥으로 구성된 상인 지구를 형성했다. 그중 대부분은 베네치아 공화국령이었고, 제노바와 피사 구역도 있었다. 베네치아인들은 특히 본토의 유리장이들에게 보낼 규사와 본토에서 설탕으로 정제할 사탕수수의 수확에 관심을 기울였다. 나머지 2/3는 보두앵 2세의 왕령 직할지가 되었다. 1124년 말 발라크의 후계자였던 티무르타슈에 의해 20,000디나르의 배상금을 내고 풀려난 보두앵 2세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국방에 협조하도록 요구했고, 최소 기사 5명을 제공하도록 했다. 동시에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피사 공화국에게도 티레에서의 특권을 하사했다. 1120년대 말 피사인들에게 티레 항구 인근의 가옥 5개가 주어졌고, 1168년엔 피사인들이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 1세로부터 카라반사라이 건물을 구매했다.

한편 1130년대에 들어 베네치아인들은 티레의 육지 성벽에서 거둔 관세의 할당량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의 기사 제공은 3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렇듯 티레는 점차 국유화되었고, 예루살렘 왕국에 있어 실크로드를 서유럽으로 이어주는 최고의 요충지였다. 유대인 공동체의 유리 공예, 산달 비단 옷감, 자주색 염료 산업, 설탕 공장 등 산업이 번성했고 여전히 파티마 칼리파조 시기 동전을 본뜬 티레 디나르가 발행되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휘하 (로마 가톨릭) 티레 대주교구 역시 위상이 높아 1175~1184년 총대주교 겸 궁재를 지낸 티레의 기욤처럼 티레 대주교가 총대주교에 오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십자군 시기 티레에는 여러 곳의 성당이 세워졌다. 베네치아인들은 점령 직후 자신들 구역 내의 파티마 시기 대사원의 폐허에 산 마르코 성당을 세웠고, 피사인들 역시 산 피에트로 성당을 세웠다. 1129년 티레의 영주였던 기욤 1세 역시 동로마 성당 터에 성 십자가 성당을 건립했다.

기존의 종교 공존 역시 이어져 아랍화된 유대인 500명이 거주했고, 무슬림 역시 다수 잔존했다. 무슬림 중에서는 12세기 중반의 시인 겸 학자였던 움 알리 타키야가 유명하다.[25] 그와 함께 여전히 멜카르트 숭배가 있었다고도 하며 현지인, 특히 교외 지역에는 여전히 페니키아 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이 쓰였다. 십자군 시기에도 티레에는 지진이 여럿 발생했다. 1127년의 대지진 당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고, 1157년 하마 대지진과 1170년 시리아 지진 당시에도 큰 피해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 사망자는 적었으나, 성탑이 몇 개 붕괴했다. 십자군 시기 티레의 인구는 25,000명가량이었다. 1187년 이집트 수니파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 이후, 티레는 예루살렘 왕국 최후의 거점이 되어 피난민들과 귀족들로 북적였다. 살라흐 앗 딘은 도시를 두 차례나 포위했으나, 40,000명의 병력을 지닌 티레는 해상 보급 덕에 버텨냈다.

결국 1188년 새해 살라딘은 군대를 퇴각시켰고, 저항을 이끈 몽페라토의 코라도(콘라드 1세)의 명성이 올라갔다. 사실상 왕의 행세를 하게 된 코라도는 베네치아의 특권과 부동산을 압수하며 피사와 제노바의 영향력을 늘렸다. 비록 코라도는 1192년 4월에 예루살렘 국왕으로 선출된 직후 아사신에게 암살되었지만, 이후로도 그의 거점이었던 티레의 대성당은 100년 동안 예루살렘 왕들의 대관식 및 왕실 예식장으로 자리잡았다. 제3차 십자군 도중 1190년 살라프 강에서 익사한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유골 역시 예루살렘과 가까운 티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티레를 기반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해안 지대를 수복했다. 1202년 시리아 지진 당시 티레에서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성탑과 성벽 대부분이 붕괴되었다. 1210년 장 드 브리엔과 마리아 드 몽페라토는 티레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로 대관식을 치렀다.

제6차 십자군 이후 1231년부터 티레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부관이었던 리카르도 필란기에리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던 1242년 현지 제후들 및 베네치아 동맹이 점령했고, 베이루트의 영주였던 발리앙 드 이벨린이 키프로스 국왕 알리스의 대리로 도시를 통치했다. 1246년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는 티레를 왕령지에서 분할하고, 발리앙 드 이벨린의 외손자인 필리프 드 몽포르를 그 영주로 봉했다. 이로써 티레는 이벨린-몽포르 가문령이 되었다. 아크레를 두고 일어난 성 사바스 전쟁(또는 제2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중인 1257년에 영주 필리프는 이미 자치권이 크게 약화된 베네치아인들을 추방하고 항구를 제노바 공화국에 넘겼다. 1268년 몽포르 가문은 대가 끊기면 도시를 금화 15,000닢에 왕에게 넘기는 대가로 아크레의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치를 얻었다. 이후 영주 장 드 이벨린은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1269년 5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휴전 협상 결렬 후 티레를 기습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해 9월, 키프로스 국왕 위그 3세는 티레에서 예루살렘 왕으로 대관식을 올렸다. 1270년 필리프가 바이바르스에게 고용된 암살자에게 암살된 후 장남이었던 장 드 몽포르가 계승했다. 1271년 장은 바이바르스에게 5개 마을을 할양하며 협상하여 강화를 맺었고, 1277년에는 베네치아의 특권을 회복시켜 해군 자원을 얻어냈다. 그리고 1283년 장이 자손 없이 사망했다. 다만 아크레의 위그 3세는 보상금이 부족했고 돈이 마련될 때까지 장의 동생이었던 옹프루아가 도시를 맡았다. 그러나 납부 기한으로 설정되었던 이듬해 5월 이전에 두 당사자가 모두 사망했다. 1289년 아크레의 앙리 2세는 티레를 동생 애므리에게 주었다. 하지만 2년 후인 1291년, 도시는 맘루크 군대에 의해 접수되었고 이로써 티레의 십자군 지배기는 막을 내렸다.[26]

2.3. 14~17세기의 암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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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엽 네덜란드인 탐험가가 묘사한 티레 구도심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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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파크르 앗 딘 2세의 동생 유니스 알-마아니의 궁전 겸 성채로 세워진 칸 수르(마아니 궁전)

아크레 함락 직후, 수성의 가망이 없다고 여긴 십자군이 주민들과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망명했기에 맘루크군의 입성 당시 도시는 텅 빈 상태였다. 술탄 알 아슈라프 칼릴은 훗날 십자군이 재차 요새로 이용할 것을 염려하여 티레의 성벽을 허물었고, 이때 1202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바 있었던 라틴 성당도 더욱 폐허가 되었다. 이후 티레는 아크레 혹은 사파드 주에 편성되었고, 근교의 주민들이 정착했다. 1300년 무렵 티레에서는 기존의 도자기나 유리 공예 산업이 이어졌으나, 과거 티레의 번영을 이루었던 자주색 염료 생산은 터키 레드 등 더욱 저렴한 염료로 대체되어 잊혀졌다. 14세기 전반 맘루크 왕조가 연이은 내전을 겪으며 일시 쇠퇴하자, 티레는 재차 전란을 겪으며 쇠퇴했다. 1355년 도시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티레를 거대한 폐허 더미로 묘사했고, 인근 도시들(시돈, 아크레, 베이루트, 야파 등)의 건축 자재로 활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1516년 오스만 제국령이 된 후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610년 티레를 방문한 영국인 탐험가 조지 샌디스 역시 한때 위대했던 도시가 폐허로 남아있다며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같은 해부터 레바논 아미르국파크르 앗 딘 2세 (파크렛딘)에 의해 티레의 부활이 시작되었다. 1593년 시돈-베이루트 산작베이(총독)에 부임한 파크렛딘은 17세기에 들어 오스만 조정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자 위협을 느껴 (십자군을 추진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비밀 동맹을 맺었다(1608년). 토스카나와의 밀통을 위해(혹은 비밀리에 해상 지원을 받기 위해) 파크렛딘은 버려져 있었던 티레 항을 복원했고, 십자군 시기의 성당 유구를 재활용하여 동생 유니스의 궁전 겸 요새를 세웠다. 이는 현재까지 수크(시장)의 중심부에 '칸 알-아스카르'로 남아있다.[27] 또한 파크렛딘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와의 도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내륙 (자발 아멜)의 시아파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에게 티레 동쪽에 정착하도록 장려했다.

이들은 훗날 티레 구도심에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기에, 레바논의 국부 파크렛딘은 현대 티레 주민들의 종교 분포를 결정한 셈이었다. 파크렛딘은 우려대로 1613년 시돈에서 포위된 끝에 토스카나로 망명했고, 그동안 티레의 유니스가 레바논 아미르국의 임시 수장이 되었다. 1618년 오스만 조정의 사면을 받아 귀환한 파크렛딘은 부르봉 왕조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고, 루이 13세리슐리외가 파견한 사절을 접견한 후 티레의 궁전을 프란치스코회에 넘겼다. 1620년대에 들어 왕성한 정복을 통해 시리아 해안을 대부분 석권한 파크렛딘은 1635년 오스만 제국에게 토벌되어 처형당했다. 이로써 티레는 재차 방치되었고 토스카나, 몰타, 모나코 해적들의 공격 및 오스만 당국의 과한 징세로 쇠락하여 '범죄자들이 시아파 공동체에 피신하는 무법지대'로 여겨졌다고 한다. 1697년 도시를 방문한 영국인 학자 헨리 몬드렐은 어업에 종사하는 소수의 주민만이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2.4. 18세기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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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교회인 성 토마스 성당(1752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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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대사원

마안 가문의 몰락 이후 18세기에 들어 자발 아멜과 티레를 포함한 레바논 남부는 시아파 무슬림(메트왈리) 출신의 알리 앗 사기르의 수중에 놓였다. 한편 티레의 쇠퇴 후에도 지명은 정교회와 가톨릭의 '티레와 시돈 대주교구'로 남아있었고, 그리스 정교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수위권하에 있었다. 1700년을 전후로 티레와 시돈 대주교 유티미오스 사이프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안티오크의 정교회와 충돌한 끝에, 1724년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으로 분리되었다. 그 무렵 메트왈리 셰이크 나시르 앗-나세르와 그의 티레 태수 겸 징세관인 셰이크 칼판 하산은 티레에 신규 주민들을 유치하고자 (비록 종종 충돌했지만) 프랑스와의 교역을 확대하고, 여러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앗-나세르는 우선 기존의 마아니 궁전은 군사 기지로 개조했고, 대신 북부 항구에 세라일(현 경찰서)을 세워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외에 시장과 알 모바라케 성탑 등이 건설되었다.

시가지의 정비와 함께 앗-나세르가 시리아 지방의 비단과 담배 수출항을 기존의 시돈에서 티레로 옮기자, 서유럽 상인들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멜키트 그리스 가문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그중 프랑스와의 교역으로 부를 이룬 지르지스 미샤카(기오르기오스 마샥카)는, 기존에 기독교도 주민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던 십자군 시절 성당의 폐허에 성 토마스 성당을 세웠다(1752년). 미샤카는 동시에 대사원(현 올드 모스크)의 건설도 후원하여 무슬림 주민들과 앗-나세르의 환심을 샀다. 부흥하던 티레는 1759년 시리아 지진 당시 시가지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1765년 파크렛딘 이후 재차 시리아 해안을 장악한 아크레의 자히르 알 우마르가 반란을 일으킨 아들 우스만과 티레에서 회담하는 등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유지했다. 비록 자히르가 하이파를 개발하면서 무역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티레의 부흥은 이어졌다.

1775년 자히르가 몰락한 후, 그 일대의 새로운 패권자로 떠오른 제자르 파샤가 1776년 티레를 방문하자 앗-나세르와 셰이크 쿠블란 등 현지 시아파 유지들은 그를 환대하고 복속을 표했다. 얼마 후 제자르 파샤는 앗-나세르와 연합하여 레바논 아미르국의 유수프 쉬하브와 맞섰고, 티레의 셰이크 쿠블란이 중재한 끝에 제자르 파샤가 베이루트를 반환하면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이후로도 앗-나세르는 제자르 파샤의 동맹으로써 드루즈파와 베두인 세력은 물론, 다마스쿠스 총독 무함마드 파샤와의 대립에서도 전공을 세웠다. 이로써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질투와 경계심을 갖게 된 제자르 파샤는 드루즈 세력과 동맹하고 나서 앗-나세르를 기습 공격하여 전사시키고 메타왈리 지도부를 숙청했다. 메타왈리 시아파 세력의 자치가 붕괴된 후, 제자르 파샤는 자발 아멜의 외항이던 티레를 시돈 총독의 직할로 두었다.

1789년 제자르 파샤의 맘루크 숙청에 반발하여 벌어진 살림 파샤와 술레이만 파샤의 맘루크 반란 당시 티레는 반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티레의 참상이 전해지자 아크레의 여론은 제자르 파샤에게 기울었고, 그는 기적적으로 반란을 진압한 후 재기할 수 있었다. 30여년간 이어진 제자프 파샤의 지배기간 동안 티레는 경제적으로 침체되었지만 시돈, 베이루트, 트리폴리, 라타키아 등과 함께 아크레를 본부로 하는 시리아 해군의 거점 중 하나였다. 1799년 이집트 원정의 연장선상에서 시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아크레 포위를 준비하며 티레에도 병력을 배치했다. 가자, 하이파, 나사렛 등과 마찬가지로 티레는 무혈 접수되었다가 나폴레옹이 아크레 포위 실패 후 철수하면서 오스만 제국령으로 회복되었다. 1804년 제자르 파샤의 사후 정권을 이어받은 술레이만 파샤는 대외 무역을 재차 활성화시켰고, 티레는 경제적 번영을 되찾았다.

2.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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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에 정립된 티레 구도심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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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사라이(칸 라부). 사각형 건물의 가운데에 중정과 분수를 두고, 닫힌 회랑을 두른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다
1810년 마아니 궁전과 시장 주변에 카라반사라이가 세워졌고, 이는 현재 칸 라부로 남아있다. 상업적인 수요가 늘면서 군사기지로 쓰이던 옛 마아니 궁전 역시 카라반사라이로 개조되었다. 술레이만 파샤의 집권기에 티레에는 알바니아인 장교 무함마드 아가 앗-누만 휘하의 200여 명의 보병대가 주둔했고, 이들은 (보병들 중에서) 아크레의 포병대 다음가는 정예 병력으로 여겨졌다. 1831년 12월,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 알바니아계의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야파와 하이파에 이어 티레를 무혈 점령했다. 이때 일부 이집트인들이 도시에 정착하여 지금도 구도심에는 '이집트인 거리'가 있다. 이집트 점령기인 1837년, 시리아 일대에서 7,0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갈릴리 지진의 여파로 티레에서도 건물과 벽이 붕괴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1839년 오스만 제국이 서구 열강들의 지지와 함께 시리아 수복 전쟁을 일으키자 알리 앗-사기르 가문의 하마드 알-마흐무드 휘하의 메트왈리 시아파 민병대가 봉기하여 영국 및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포 사격과 함께 티레를 점령했다(9월 24일). 이로써 티레는 오스만 제국령으로 회복되었다. 오스만 조정은 메트왈리 민병대의 활약에 대한 보상으로 자발 아멜의 시아파 자치 체제를 회복시켰고, 하마드와 그의 친척이자 후계자인 알리 알-아사드[28]에게 감독을 맡겼다. 다만 티레는 옛 아크레 정권의 맘루크 가문이 장악했고, 제자르 파샤의 아들이라 칭한 유수프 아가가 집권했다. 한편 오스만-이집트 전쟁 후 레바논에 대한 서구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프랑스는 19세기 중반부터 마론파와 결탁하여 레바논에 간섭했다.

2.5.1. 서구화와 봉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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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에 묘사된 티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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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티레를 지배한 알-맘루크 가문의 저택(베이트 엘 메디나)

1860년 프랑스 제2제정의 나폴레옹 3세는 레바논 산지의 드루즈-마론파 내전에 개입할 7,000명의 프랑스군 병력을 베이루트로 파견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에게 티레에 대한 첫 고고 발굴 조사를 지시했다. 다만 그의 기초 조사 이후 무분별한 도굴이 이어져 유적은 상당 부분 파손되었다. 한편 같은 해 기존의 멜키트 가톨릭 성 토마스 성당 옆에 정교회의 성 토마스 성당이 세워졌고, 얼마 후에는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라틴 가톨릭 계열의 성지 교회가 세워졌다. 1874년 바이에른 출신의 역사가 요한 네포무크 제프가 비스마르크의 허가하에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유골을 찾는다며 티레로 향했다. 비록 그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십자군 시기 성당과 고대 유적을 발견하여 많은 유물과 함께 돌아가 베를린에서 전시했다.[29]

제프에 의하면 당시 티레의 인구는 약 5,000명이었고, 시아파 무슬림과 가톨릭 크리스천이 각각 반씩 존재했다고 한다. 여느 중동의 도시들처럼 티레 역시 무슬림, 기독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1882년 성 요셉 애덕 수녀회에서 후자의 서쪽 해안에 신학교를 세웠다. 한편 1858년 오스만 제국의 토지 개혁 이후 일부 지주 가문들이 대토지를 독점하고 소작농들은 몰락하는 등 빈부 격차가 벌어졌다. 티레에서는 자발 아멜의 알리 앗-사기르(엘아사드) 가문과 더불어 상인 출신의 '우자하' 계층이 봉건 영주인 '주아마'로 등장했다. 그중 나바티에에 기반한 자인 부족의 방계인 알-칼릴 가문은 곡물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티레의 봉건 유지로 부상한 후, 시돈의 봉건 유지인 오세이르 가문과 인척을 맺어 기득권을 강화했다.

시아파 무슬림 주민들과 울라마(성직자) 역시 수니파 무슬림인 알-맘루크 가문보다는 알-칼릴 가문을 선호하고, 지원했다. 다만 봉건 지주들의 권위적인 지배가 계속되자, 1880년대에 들어 티레와 자발 아멜의 주민들 중 상당수는 서아프리카 등지로 떠나갔다. 한편 19세기 말엽 티레에는 근대적인 항구가 개설되었고, 1906년 그 옆에 마론파의 성모 성당이 세워졌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집권 이후 전국적인 의회 선거제가 도입되자, 자발 아멜 지역에서는 두 후보가 대립했다. 시돈 출신의 수니 무슬림인 릿다 앗-술흐와 내륙 출신의 카밀 알-아사드의 대립 구도에서, 티레의 알-칼릴 가문은 스스로 시아파였음에도 전자를 지지했다. 비록 선거는 후자의 승리였지만, 아사드와 칼릴 가문은 향후 50년 이상 상호 대립하게 된다.

2.5.2. 제1차 세계대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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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티레의 모습

1900년 무렵 티레는 2,800명의 시아파 무슬림, 2,700명의 기독교도, 500명의 수니파 무슬림으로 구성된 6,000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티레가 관할하는 지구 전체의 인구는 48,000명으로,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이었고, 8,000명은 기독교도였다.[30]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자발 아멜의 시아파 무슬림 중 상당수는 징집되어 농장을 떠났다. 그 이듬해 메뚜기 떼가 창궐해 농작물을 휩쓸어버렸고, 이로 인해 발생한 기근으로 또다시 많은 주민들이 아프리카나 미국 등지로 이주했다. 이로써 50년 동안 이어진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마침 반오스만주의 기류에 편승하던 아랍 민족주의가 자발 아멜 지역에 유입되었다. 이에 1915년 3월, 오스만 당국은 시돈, 베이루트, 나바티예와 함께 티레에서도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일부는 처형했다. 이때 칼릴 가문의 수장이었던 압델카림 알-칼릴이 경쟁자인 카밀 알-아사드 의원의 고발로 처형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티레에서는 4명의 현지인이 프랑스 첩자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중 둘은 베이루트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던 프랑스 해군 소속 데스트리 함의 지휘관은, 처형 소식에 분노하여 보복으로 티레 항을 포격해 4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1917년 2월에는 영국측 첩자들이 티레에서 활동하며 오스만측 정보를 탐색했다. 1918년 9월 메기도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철수한 오스만군의 추격에 필요한 보급을 받기 위해 서둘러 베이루트와 트리폴리로 북상했고, 도중인 10월 4일 티레를 접수했다. 티레에서 1차 보급을 받은 영국군은 시돈으로 이어지는 해안 구릉지대에 도로를 놓으며 북상하여 아랍 봉기군과 함께 시리아를 평정했다. 친오스만 파였던 자발 아멜의 카밀 알-아사드는 재빨리 전향하여 티레를 포함한 레바논 남부의 시리아 아랍 왕국 편입을 선포했다(10월 5일).

2.5.3. 프랑스 위임통치령

파일:카밀 알 아사드.jpg파일:샤라 펫딘.jpg파일:페츠코프.jpg
호족 출신 정치가인 카밀 알-아사드 시아파 성직자 사이드 압델 후세인 샤라펫딘 지노비 페코프 남레바논 군정장관[31]

하심 왕가의 파이살 1세의 지지로 시돈 총독에 오른 리아드 앗-술흐는 동맹 가문의 압둘라 야흐야 알-칼릴을 티레 시장에 선임하며 10년 전의 복수를 이루었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끝나지 않아 10월 23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자발 아멜 지역을 장악했고, 프란치스코회를 거쳐 멜키트 가톨릭 대주교의 수중에 있었던 옛 마아니 궁전(칸 수르)이 프랑스의 군사기지가 되었다. 이에 엘-아사드 가문의 사디크 알-함자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프랑스군과 친프랑스파 주민들을 공격했고, 아사드 가문의 동맹인 티레의 시아파 이맘 사이드 압델 후세인 샤라펫딘[32](1872년생)은 비폭력적인 방법을 강구하며 1919년 미국 대표단이 방문하자 미국 측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프랑스 당국은 샤라펫딘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에 그는 시아파 대표단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방문하여, 시리아와의 통합을 논의했다. 한편 프랑스와 친하던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시아파 무슬림들 간의 갈등은 점차 증폭되었다.

결국 1920년 4월 내륙 지역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내륙의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대거 티레로 이주했다. 갈등에 있어 프랑스군은 마론파를 지원하며 포병대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시아파 민병대를 진압했다. 1920년 9월, 시리아 아랍 왕국의 멸망과 함께 프랑스는 '대레바논국'을 선포했고 위임통치를 했다. 같은 해 티레시의회가 구성되어 이스마일 야흐야 칼릴이 의장이 되었고, 샤라펫딘은 프랑스 측의 압력으로 도시를 떠나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그후 프랑스군은 샤라펫딘의 집을 약탈하여, 저서를 압수하고 이웃 집들까지 불태웠다. 이집트 등지를 전전하던 샤라펫딘은 말년에야 티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반란에 대한 징벌로 티레를 포함한 레바논 남부에 가혹한 세금 및 벌금을 부과했고, 이로써 민중은 고초를 겪었다. 또한 레바논 남부의 농작물들이 시리아로 징발되어 전통적인 수출 무역이 붕괴되었고, 시돈과 티레 등의 항구 도시들은 쇠락했다.

따라서 이때 또다시 많은 현지인들이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를 거쳐 서아프리카로 이주했다. 이러한 추세는 1920년대 말엽 서아프리카의 프랑스 당국이 이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후에야 중단되었다. 1922년 카밀 알-아사드가 추방에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그는 1924년에 사망했다. 그에 반해 샤라펫딘은 프랑스 당국과 화해하여 남레바논 군정장관 지노비 페코프와 친구가 되었고, 이스마일 야흐야 칼릴에 이어 1926년까지 시의회장을 역임하며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노력으로 1926년 레바논의 제한적인 자치권 부여와 함께 티레에는 시아 자파리 법원이 설치되었고,[33] 1928년에는 티레의 첫 시아파 사원인 압둘 후세인 모스크가 세워졌다.[34] 다만 행정 전반은 프랑스 주둔군의 대변인을 맡았던 현지 기독교도인 유수프 살림과 그의 살림 가문이 사실상 독점하여, 87%에 달하는 무슬림 주민들의 박탈감을 자아냈다. 1921년 통계에 따르면 티레의 기독교도 주민은 13%였다.[35]
프랑스 당국은 시아파 귀족층인 아사드와 칼릴 가문에게만 개인적인 부와 권위를 늘리도록 보조하면서 다수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다. 한편 1920년대 초부터 티레 일대에는 튀르키예에 의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생존자들이 모여들었고, 1936년 프랑스 당국은 티레 남쪽의 라시디예 해안에 아르메니아인 난민촌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티레의 내륙 방면인 엘바스에도 난민촌이 추가되었다. 기독교도들이 신학교에서 서구 학문을 접하는 동안 시아파 무슬림들은 교육적으로 소외되었다. 이에 1938년 샤라펫딘은 칼릴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중 교육을 위해 사재를 털어 남녀 공립학교를 세웠고, 아사드 가문의 후원으로 증설되었다. 샤라펫딘의 근대 학교에는 종교를 막론하고 능력 있는 교사들을 채용했으며, 교장 역시 기독교도인 미카일 샤반이었다. 샤라펫딘은 또한 팔레스타인 독립을 강력히 지지했고, 그의 자파리야 학교 역시 아랍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정치화되었다.

샤라펫딘은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발발 이후, 영국군의 체포를 피해 프랑스령 레바논으로 향한 예루살렘의 그랜드 무프티 아민 알후세이니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다만 이후로도 티레와 영국령 팔레스타인 간의 국경은 열려 있었고, 팔레스타인 유대인들과 레바논 남부의 주민들은 각각 티레와 하이파텔아비브로 자유로이 왕래하며 휴가를 즐겼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급변했고, 티레 주둔 프랑스군은 칸 수르를 재차 군사기지화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의 영향하에 추축국에 가담했고, 필리프 페탱에 충성하는 비시 프랑스군은 티레에서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길에 대전차 참호를 팠다. 작업 도중 1~2세기 경의 로마식 석관이 발견되어 현재 베이루트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941년 여름, 영국-호주군과 자유 프랑스군은 이라크 및 이집트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육•해상으로 시리아-레바논을 침공했다.[36]

34,000명의 연합군 중 호주군 병력은 1941년 6월 8일, 티레에 상륙하여 어렵지 않게 도시를 접수했다. 7월 10일, 연합군이 베이루트 인근까지 다다르자 현지의 비시 프랑스 당국은 2일 후 <아크레 협정>을 통해 항복했다. 이후 시리아-레바논은 자유 프랑스 관할이 되었고, 1943년 11월 22일 레바논은 독립한 후 1945년 2월 27일 나치 독일 및 일본제국에 선전포고하여 연합군에 정식으로 가담했다. 한편 시리아 역시 1925년 부분적 자치권 부여 및 1936년의 독립 약속을 거쳐 1941년에 독립을 선포했으나, 종전이 다가오던 1945년 4월 샤를 드 골은 시리아의 군사기지를 유지하고자 파병했다(레반트 위기). 당시 프랑스군이 베이루트에 상륙하자 민중은 분노했다. 샤라펫딘은 유엔에 탄원서를 보내어 자유 국가에 외국군이 침공했다며 결사 항전 의지에 나서겠다고 선포했다. 일촉즉발의 충돌 위기는 영국군이 파견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2.6. 격동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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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 전 티레 해안

실질적인 독립 직후인 1946년, 티레의 자파리야 학교는 남부 지방 최초의 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샤라펫딘은 기독교도인 지르지스 케나안을 이사로 선임했다. 학교는 티레 출신 서아프리카 이주민들 중 성공한 사업가들의 자금 후원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한편 샤라펫딘의 경쟁자인 카젬 알-칼릴 역시 독립 이후 레바논의 첫 번째 총리가 된 리아드 앗-술흐(리아드 솔레)의 지원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20세기 중반의 티레는 문화적으로 크게 융성했다. 1930년대 여러 학교들의 설립과 함께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고, 야외의 간이 극장을 거쳐 1939년 첫 번째 극장인 '록시'가 개관했다. 1942년에는 '엠파이어', 1959년에는 '시네마 리볼리 티레'가 개관했다. 후자는 레바논 최대의 영화관 중 하나였고, 아랍권 뿐만 아니라 장 마라이브리짓 바르도 등 서방권의 유명인들도 방문했다.

2.6.1. 팔레스타인 난민과 정치적 불안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과 교류가 많았던 레바논 남부 지역은 팔레스타인 분쟁과 함께 혼란에 휩싸였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던 마론파 정치가 에밀 에데가 시오니스트의 거두였던 하임 바이츠만에게 티레와 시돈 등 100,000명의 무슬림이 사는 남부 지역을 신생 이스라엘에 할양할 뜻을 내비쳤지만, 바이츠만이
'가시가 든 선물'
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나크바')[37] 다수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육•해로를 통해 가까운 티레로 몰려들었다. 이맘 샤라펫딘은 자파리야 학교 일대의 부지에 난민들을 수용했다. 레바논 남부가 아랍 연합군의 후방 보급 기지라고 여긴 이스라엘은 1948년 7월 17일, 2척의 전함을 파견하여 티레의 아랍해방군(ALA) 기지를 포격했다. 그해 10월 이스라엘군이 상갈릴리 지역을 점령하자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향했고, 상당수가 티레에 정착했다.

티베리아스 등 갈릴리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수용을 위해, 반도 옆에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이 들어섰다. 그 서쪽의 국유지에도 여러 난민들이 정착했고, 북쪽 해안가에는 비공식적으로 잘 알 바하르 난민촌이 들어서서 국경 너머의 타르쉬샤 출신 난민들이 정착했다. 시돈 방면의 리타니 강변에 있는 카스미예에는 팔레스타인계 베두인들이 정착했다. 1950년대에는 엘바스의 아르메니아 난민들이 베카 협곡의 안자르로 이주했고, 그 자리에 아크레 출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정착했다. 이미 정치적으로 시돈과 베이루트에 비해 소외된 티레는, 10,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과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티레의 오렌지 재배를 진흥했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일부는 교육자로 활약하는 등 도시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중에는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 중 하나인 한달라를 창안한 만화가 나지 알-알리도 있었다.[38]

하지만 갑작스러운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입으로 티레의 빈곤율이 높아졌고, 또다시 다수의 주민들이 이민을 떠나면서 레바논 디아스포라를 확대시켰다. 레바논 정부는 티레의 난민들이 이스라엘의 공격 명분이 될까봐 노심초사했고,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도중 자파리야 학교 선생들에게서 폭발물이 발견되자 학교를 무장 투쟁의 산실로 삼는다며 팔레스타인계 교장 이브라힘 알-라믈라위를 체포했다. 이듬해 12월, 티레의 근현대사에 획을 그은 이맘 샤라펫딘이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1957년 레바논에 새 선거제가 도입된 이후, 본래의 지역구에서 낙선한 의회 대변인이었던 아흐메드 알-아사드는 티레에 출마하여 지주 출신의 원로 의원이자 사미 앗-술흐 내각의 유일한 시아파 무슬림이었던 카젬 알-칼릴에게 맞섰다. 후자의 지지자들은 시내에서 총기를 가지고 다녀도 묵인될 정도로 티레의 주도 세력이었고, 아사드 가문과의 대립은 사회의 불안 요소로 남았다.

2.6.2. 1958년 티레 사태(아사드 vs 칼릴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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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파리야.jpg
독립 및 난민 수용 이후로 점점 더 정치 성향이 짙어진 자파리야 학교. 군데군데 1958년 충돌 당시의 탄흔이 남아있다.

1958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아랍 연합 공화국(UAR) 선포 이후, 레바논의 주요 도시들에서 범아랍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반미 시위를 벌이며 정부 및 칼릴 가문과 대립했다.[39] 티레에서는 자파리야 학교가 시위의 중심이었고, 학생들이 레바논 국기를 내린 후 UAR 깃발을 걸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샤라펫딘의 아들이었던 후세인 샤라펫딘 역시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대립이 격화되던 끝에 그해 3~4월, 군대 및 카젬 지지자들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10여 명이 사망했다.[40] 레바논의 야당계는 즉시 티레 시민들에게 지지를 보냈고, 시돈에서도 동맹 파업이 일어났다.[41] 5월에 들어 아흐메드 알-아사드의 아사드 가문이 시위대에 동참하여 무기를 지원했다. 이어진 시가전의 결과, 카젬은 축출되었고 샤라펫딘 가문이 도심을 장악했다. 다만 내륙의 배후 지역은 여전히 정부군의 수중에 있었고, 적십자 구호 물품만이 통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혼란은 그해 9월, 샤문 대통령의 하야로 일단락되었다.[42]

50년 이상의 대립 끝에 아사드 가문은 칼릴 가문을 누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두 가문이 다투는 동안 나타난 신진 세력에 의해 결국 둘 다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사드르 가문으로, 태생의 사이드 무사 사드르가 샤라펫딘 가문의 초청으로 1959년 새 이맘으로 등극하면서 티레에 등장했다. 무사는 이내 기득권층의 반발에 직면했지만, 청년들의 직업 훈련 센터 설립 등 여러가지 자선 사업으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압둘 후세인 모스크를 거점으로 삼은 무사는, 정부와 협력하면서 의심을 피했다. 1960년 카젬이 티레 출신 서아프리카 이주민 부호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의원직을 잃자, 샤라펫딘의 아들이자 바트주의자인 자파르가 대신 당선되었다. 그는 티레의 재건을 위해 의회에 도시의 실상을 알렸고, 3선 의원을 지냈다.[43] 당시 티레의 인구는 약 15,000명이었고, 이촌향도 및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으로 점차 늘어났다. 예를 들어 1963년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는 티레 인근의 라시디예에 팔레스타인 북부 출신 난민들의 수용을 위한 난민촌을 추가로 건립했다.

2.6.3. 사드르 시대와 PLO의 영향력 확대

파일:사드르 티레.jpg
1974년, 이맘 무사 사드르의 연설장에 모인 군중

1960년대 말엽, 티레에는 다른 레바논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불만이 축적되어 있었다. 1967년 3월, 고등학생들의 장기 파업과 함께 감세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군경의 발포로 1명이 사망했다. 그해 5월 무사는 레바논 내의 시아파 무슬림들을 대변하는 시아 이슬람 최고 회의 (SISC)를 조직했고, 이는 점차 전국적인 단위로 확산되었다.[44] 한편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또다시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 남부로 유입되었다. 이로써 티레의 난민 인구는 등록된 규모만 25,000명에 이르렀다.[45] 1968년 총선 당시 티레의 인구 40,000명은 라시드 카라미 총리의 측근들을 선출하여 정부에 힘을 실어 주었다.[46] 1969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소탕을 구실로 베이루트 도심을 타격하자, 티레의 주민들과 난민들은 함께 규탄 시위를 벌였다.[47] 1970년 5월 12일, 이스라엘군은 티레 등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을 타격했다.

1970년 검은 9월 사건으로 요르단에서 축출된 PLO는 남부 레바논을 더욱 거점화하여 티레 주변에서도 민병대 훈련장을 세웠다.[48] 그러던 중 1972년 총선에서 카젬은 나이지리아 부호의 도움으로 12년 만에 의원직을 회복하고 의회에서 열렬한 반 PLO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본래 동맹이던 무사(이맘 사드르)와 자파르 샤라펫딘의 관계는 전자의 지주 계급에 대한 혐오와 후자의 (지주 가문 출신인) 카밀 알-아사드와의 친교로 인해 점차 소원해졌다. 1973년 티레와 레바논 각지에서는 재차 대대적인 파업과 폭력 시위가 벌어졌다. 마론파 정부, 팔레스타인 민병대, 시아파 공동체[49] 간의 관계를 조율하던 무사는 SISC 조직의 자금 지원으로 친정부 지주 계급인 칼릴 및 아사드 가문이 3세기간 누려오던 기득권을 차례대로 타파하였다.[50] 1974년 무사는 하라카트 알-마흐루민(박탈자들의 운동)을 창설하여 남부의 자발 아멜 뿐만 아니라 동부 베카 협곡의 시아파 민중들까지 포섭하였다.

이로써 무사는 레바논 전역의 시아파 세력을 결집시켰고, 동시에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의 티레 대주교 지르지스 하다드 등 기독교 소수 종파와도 연대하였다.[51] 1974년 5월 5일, 티레에는 8만에 달하는 그의 무장한 지지자들이 결집하였다. 5-6월 이스라엘군은 1948년과 1970년에 이어 3번째로 티레 타격에 나서 인근 난민촌들에 함포 사격과 공습을 가하였고, 18명의 사망자와 4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52] 이에 무사는 기존의 비폭력주의를 접고 사실상 무장 조직인 레바논 저항 여단(아프와즈 알-무카와마 알-루브나니), 일명 아말 (أَمَل)을 창설하였다(1975년 초). 무사의 이란인 기술학교 선생 무스타파 참란[53]이 아말의 겔릴라전 교관을 맡았는데, 후일 그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첫 국방 장관이 된다. 호메이니의 측근 사데크 타바타바이 역시 자주 티레를 방문하는 등, 이란 혁명 세력은 무사와 연관이 있었다. 한편, 카젬의 아들 칼릴은 1971-78년 주이란 레바논 대사를 역임하며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2.6.4. '티레 인민 공화국' (레바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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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엠파이어 극장. 티레의 주요 문화 시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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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파괴된 기독교 구역의 베이트 샤다드. 현재까지도 복구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1975년 1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티레의 레바논군 병영을 공격하였다. 동시에 카젬의 거처 중 하나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고, 다른 한 곳은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점거하였다. 이는 PLO마저 '계획되고 무모한 행위'라며 비판할 정도였다. 그해 2월, 시돈에서 아랍 민족주의자 마루프 사드가 (아마 군경에 의해) 피살된 후 티레에서는 친 PLO,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였다. 3월 초, 8인의 PLO 특공대가 티레에서 해상으로 텔아비브에 잠입하여 11인의 사망자를 낸 사보이 호텔 테러를 일으켰다.[54] 8-9월 이스라엘군은 육해공 모든 방면에서 티레를 4차례 공격하였다.[55] 1976년 봄, 현지 PLO 부대가 레바논 아랍군(LAA) 측 동맹의 도움으로 티레 관공서 및 병영을 장악하였다. 이후 도로에 초소를 세워 통제하고, 항구에서 관세를 걷는 등 티레는 PLO에 장악되었다. 이때 카젬의 재산 일부도 압수되었다. 그외의 자금은 이라크에서, 무기는 리비아에서 지원되었다. 뒤이어 PLO는 티레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며 독립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PLO는 자의적이고, 때로는 잔인한 행위로 빠르게 레바논계 주민들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대를 이어 팔레스타인에 온정적이던 원로 정치인 자파르마저 PLO가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반, 훼손했다'며 비판할 정도였다. 1976 여름, 시리아의 레바논 침공 당시 리타니 강을 넘지 말라는 아랍 연맹의 권고가 수용된 것이 티레에게는 몇 안 되는 위안거리였다.[56] 다만 젊은 남성 상당수는 내전 참전을 위해 북으로 향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은 PLO의 보급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티레 등 남부 항구들에 대한 해상 봉쇄를 가하였고, 이로써 티레의 해상 교역은 파탄이 났다. 1977년 티레 어부 3명이 이스라엘군에 피격당해 사망하자, PLO가 로켓으로 보복하여 국경 너머 이스라엘령 나하리야에서 역시 민간인 3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 농촌 지역에 보복 공습을 가하여 1백 명 이상의 시아파 농민들이 사망하였고, 티레 및 근교 난민촌[57]들에도 육/해상 포격 및 공습이 가해졌다.

1978년 3월 11일에는 베이루트 사브라 난민촌 출신 달랄 무그라비 등 11인의 PLO 소속 페다인(결사대)이 티레를 떠나, 텔아비브 븍쪽 해변 잠입한 후 무차별 발포하여 38명의 이스라엘 민간인을 살해하였다(해안 도로 테러).[58] 3일 후 이스라엘군은 처음으로 지상군을 동원해 국경을 넘어 진격하였고, 빠른 속도로 (티레 일대를 제외한) 레바논 남부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때 티레는 비록 점령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군은 PLO의 무기 공급처로 지목된 항구와 난민촌들을 집중 타격하였다. 그 결과 많은 민간인이 사망하고, 유구한 유적들이 다수 파괴되었다. 베이트 샤다드 등의 옛 건물들이 파괴 혹은 파손되었고, 로마 시대 히드포룸도 폭격으로 손상되었다. 하산 보로 병영 역시 타격을 받았고, 이로써 레바논 아랍군이 철수했으나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남았다. 일주일간 이어진 이스라엘군의 리타니(지혜의 돌) 작전은 티레에 또다시 대규모 민간인 피해를 야기하였다.

국제연합평화유지군(UNTSO)의 보고에 의하면 남부 레바논에서 약 1100-2000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25만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6만명의 티레 주민 중 3백여 명만이 잔존했다는 보고도 있다. 사태가 악화되자, 3월 19일 유엔 안보리 결의 425 및 426호는 레바논에 진입한 이스라엘군의 전면 철수와 레바논 임시 주둔 유엔군(UNIFIL) 배치를 선포하였다. 3월 23일부터 프랑스, 세네갈 병력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티레로 향하여 병영들의 접수에 나섰다. PLO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는 유엔군의 지시에 응할 것을 명했지만, 일부 급진 세력과 아랍 해방 전선 등은 항명하고 교전에 나섰다. 4-5월간의 충돌 끝에 유엔군은 7명이 전사하고, 지휘관 살방을 포함한 10여 명이 중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59] 이렇듯 급진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티레의 거점들을 고수하며 사상자가 증가하자, 유엔군은 티레의 병영을 포기하고 여전히 이스라엘군이 점거 중인 남부 국경 지대로 기지를 옮겼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유엔군 작전 지역 내의 '고립지(enclave)' 로 인정되어 '티레 포켓(Tyre Pocket)'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후 PLO는 드루즈 계열 동맹인 인민해방군(NLM)[60]과 함께 티레의 지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다만 이미 '티레 인민 공화국'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은 억눌린 채로 유지되었다. 여기에 계속되는 정치 갈등과 전란으로 일반 대중의 피해가 가중되자, 또다시 티레발 서아프리카 이민이 급증하였다. 이번에는 기존의 세네갈 대신 코트디부아르가 주요 대상지였다. 갈등이 지속되던 1978년 8월 31일, 아말의 지도자인 이맘 무사 사드르가 리비아 방문 후 갑자기 실종되었다.[61] 한편, 유엔군 당도 후 주춤했던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티레가 유엔군 관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자 재개되었다. 1979년 1월, 이스라엘 함대가 티레에 함포 사격을 가하여 2명이 사망하고 가옥 수십채가 파괴되었다.[62]

2.6.5. 이스라엘의 점령 (198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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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 해변가에 세워진 적십자사 대피소

이스라엘의 지속된 공격에 PLO는 소련에게서 T-34 전차, 카츄샤 다연장로켓 등의 무기를 구매하고 1천 5백 명의 '정규군'을 갖추어 대비하였다.[63] 1979년부터 PLO는 매일 로켓으로 이스라엘령 갈릴리를 타격하였고, 이스라엘군은 1981년 7월 23일 티레를 공습하였다. 이는 티레에 대한 이스라엘의 7번째 공격이었고, 이후 휴전이 체결되었다. 한편, 이-팔 분쟁에 끼어 고통받는 시아파 민중의 분노와 팔레스타인 민병대 및 아말 사이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64] 결국 1982년 들어 아말과 PLO 및 파타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고, 4월 후자가 아말측 시설을 포격하였다.[65] 따라서 이어진 이스라엘의 침공[66] 당시 아말은 침공군의 진격을 묵인하였고, 이에 반발한 강경파가 떨어져 나가 반이스라엘 투쟁의 선봉이 되는 헤즈볼라를 창설하게 된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 육/해/공군은 순식간에 유엔군을 무력화시키며 다방면에서 진격하였다.

같은 날 이스라엘 함대와 전투기들은 티레를 무차별 폭격하였고[67] 그 결과 80여명이 사망하였다. 역설적이게도 PLO는 전투 개시 직전에 이미 도심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터라, 희생자는 전부 민간인이었다. 공습과 함께 동시에 북쪽 해안에 이스라엘 지상군 선발대가 상륙한 후 남쪽에서도 전차들을 앞세운 보병이 도시에 접근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난민촌들은 곧 폐허로 변했지만, PLO는 굴하지 않고 결사 항전을 이어갔다.[68] 라시디예와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은 폐허로 변하였고, 후자에서는 백린탄을 맞은 건물 하나에서만 1백 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기도 하였다.[69] 6월 7일,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의 대주교 지르지스 하다드가 적십자 스위스 대표와 함께 이스라엘 장군을 설득한 후에야 이스라엘 전차 부대의 공격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후 시민들은 해변으로 소개되었고, 적십자사가 급조한 대피소에는 1천 명 이상이 수용되었다. 대피소는 기존의 Tyre Rest House에 세워졌다.

레바논 정부 추산에 의하면 6월 6-7일간의 공격에 무려 1200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2천 명 이상의 비전투원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70] 유엔 난민 구제 사업국(UNRWA)은 라시디예 난민촌 한 곳에서만 6백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5천 명 이상의 난민들이 노숙자로 전락했다고 보고하였다.[71] 휴전 후에도 이스라엘군의 지속적인 건물 철거로 인해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1만 3천 명으로 늘어났다. 1982년 당시 도심과 가까운 엘바스 난민촌만이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인명 피해 외에도 세라일과 칸 수르[72] 등의 옛 건물들이 파손되었다. 휴전 이후, 사실상의 군정을 시작한 이스라엘 군부는 티레에서 1만 4천 명을 임의 체포하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이때 대상자 명단 작성에 기여한 부역자들도 복면을 쓴 채로 뒤따랐다. 이스라엘군은 티레에 군사 기지를 세우고, 무사에 의해 축출된 봉건 유지들의 귀환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1982년 7월, 카젬은 7년 만에 티레로 돌아왔다.

한편, 티레에 남은 아말 조직은 이스라엘 측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중립을 유지했으나, 카젬과의 화해 협상이 결렬된 후 13인의 아말 지도부가 체포되자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 그 후 카젬은 이스라엘의 협조하에 40인의 민병대를 조직하였다.[73] 반격에 나선 아말은 그해 9월, 무사의 실종을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무려 25만의 조직원을 티레에 결집시켜 무력 시위에 나섰다. 이러한 투쟁 기류 하에 헤즈볼라의 조직화가 비밀리에 시작되었다. 11월 11일,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가족을 여럿 잃은 15세의 청년 아흐메드 카시르[74]가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 인근의 티레 주둔 이스라엘군 본부[75]에 차량을 통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였다. 강력한 폭발로 7-8층의 건물 전체가 붕괴하여 90여 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하였고, 약 15명의 레바논-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이 사망하였다.[76] 이는 이스라엘군에 있어 사상 최악의 테러 중 하나였다.

아무도 테러의 배후를 주장하지 않자, 이듬해 6월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티레 일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들을 돌며 대대적인 체포를 벌였다. 이에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은 이스라엘 차량에 대한 매복 공격으로 3명의 이스라엘 군인을 죽였다. 당황한 이스라엘 당국은 레바논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에 협조적인 민병대 조직을 추진하였다. 이때 하르타위라는 사람이 그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1년 후인 1983년 10월, 또다시 티레의 이스라엘군 본부에 테러가 발생하여 군인 29명 및 수감자 32명이 사망하였다.[77] 두 테러의 배후는 당시까지만 해도 비밀 조직어었던 헤즈볼라였고, 2년 후에야 헤즈볼라는 책임을 인정하였다. 이에 고무된 아말 역시 1985년 2월, 티레 조직원 중 하나가 부르즈 엘쉬말리의 이스라엘군 수송대에 자살 테러를 가하여 10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스라엘군은 보복으로 티레 외곽을 공격했고 이에 민간인 15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하였다. 지속되는 공격에 시달리던 이스라엘군은 1985년 4월, 티레에서 철수하였다. 대신 국경 지대에 '보안 구역' (Security Zone)을 두어 완충 지대로 삼았다. 이스라엘은 자유 레바논국이란 괴뢰국을 운영하던 마론파 계열 남레바논군에게 보안 구역의 통치를 맡겼다. 하지만 구역 내의 주민 대다수는 수니파-시아파 무슬림이었다.

2.6.6. 아말 vs PLO (난민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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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동맹이 된 진보사회당의 왈리드 줌블라트(左)와 아말의 나비흐 베리(右)[78]

이스라엘 철군 후 티레는 자파리야 졸업생인 나비흐 베리[79] 지도하의 아말 운동이 장악하였다. 아말은 우선 '수르 발전 위원회'를 설립하여 기간 시설 복구에 나선 후, 점차 레바논 당국에 책임을 이관하였다. 티레 출신 해외 이민자들의 송금 덕에 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말은 친이스라엘 민병대장 이브라힘 파란과 부역자 샤우키 압둘라 등을 체포하였다. 다만 기독교에 비교적 친화적이던 아말 덕에 다른 지역과 달리 티레와 그 일대에서는 기독교도의 추방은 일어나지 않았다.[80] 동시에 아말은 자신들의 경쟁 세력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재침공 빌미가 될 수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의 귀환 저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3대 난민촌들에 대해 봉쇄와 압박을 가하였다. 그 결과, 비록 난민촌들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수니파 다수의 시돈과 달리 티레는 최소한 도심에 대해서는 PLO 조직의 귀환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티레 외곽의 PLO 조직은 건재하였고, 1986년 9월 10일 이스라엘 공군의 타격을 받았다. 이후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아말이 친이스라엘이라며 분노하였고, 양측의 갈등은 결국 레바논 내전의 가장 참담한 충돌(소위 말하는 '을과 을의 싸움') 중 하나인 '난민촌 전쟁'으로 이어졌다. 라시디예 난민촌의 아말 측 순찰대가 총격을 받은 후 아말은 해당 난민촌에 대해 한 달간 포위를 가한 드루즈 계열 진보사회당, 친시리아 팔레스타인 민병대인 앗-사이카 및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PFLP)의 협조하에 진입하여 소탕전을 벌였다. 비무장 상태이던 엘부스,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 역시 습격당하여 가옥들이 불타고 1천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한 달가량의 충돌 끝에 7천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티레에서 축출되었다. 이에 대해, 외세에 대한 연이은 테러로 입지를 넓혀가던 헤즈볼라는 무슬림 간의 싸움(피트나)이 이스라엘에만 이득이 된다며 반발하였다. 1987년 헤즈볼라의 2천 5백 명 단원이 티레로 남하하자, 아말 역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시내에서는 수천의 시민들이 아말 지지 시위를 벌였고, 결국 헤즈볼라는 철수하였다.

2.6.7. 헤즈볼라와 아말

이스라엘과 PLO가 모두 퇴장한 후 대립하던 아말과 헤즈볼라는 1988년 2월, 후자와 연계된 무장 조직이 아말 지도부와 협상하고 이동하던 UNTSO 소속 미국 대령 윌리엄 R. 히긴스를 티레의 남쪽에서 납치한 것을 계기로 정면 충돌에 나섰다.[81] 아말은 우선 본거지로 여겨지던 남부에 침투한 헤즈볼라 세력에 대한 소탕전을 벌여 나바티예를 탈환하였다. 이로써 5월에 이르면 남부 지역에 대한 아말의 지배력은 재차 공고해졌다. 하지만 베이루트와 가지예 등 중부에서는 헤즈볼라가 우세를 점하였고, 아말 단원들이 헤즈볼라로 이탈하기에 이르자 아말의 동맹인 시리아군이 개입하였다. 한편 양측의 전쟁 도중 아말의 남레바논 사령관 다우드 다우드가 전사하자, 티레에서는 대대적인 애도식이 열렸다. 아말은 전선의 일원화를 위해 12월 PLO와 휴전을 맺었고, 이듬해 1월에는 시리아와 이란의 중재 하에 헤즈볼라는 남부 지역에서 비군사 성격의 조직만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두 시아파 조직 간의 전투가 2년 가까이 이어지자, 1989년 12월 티레와 나바티에 등지에서는 무슬림 내전(피트나) 중단을 요구하는 동맹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여론에 편승하여 얼마 전의 타이프 협정에 의거한 협상이 개시되며 양측의 충돌은 잠잠해졌다. 1990년 4월, 카젬이 망명지인 파리에서 눈을 감은 후 레바논 내전 역시 1991년 3월에 종식되었다. 전후 레바논 정규군이 해안 도로를 따라 배치되었고, 티레 인근 난민촌에도 주둔하였다. 다만 전후에도 기나긴 혼란 탓에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티레 등 남부 지방은 정치적으로 헤즈볼라와 아말 간의 자존심 대결의 장이 되었다.[82] 종전 후에도 민병대 중 유일하게 무장을 유지하던 헤즈볼라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및 남부 변경지의 친이스라엘 마론파 주도 괴뢰 정부인 남레바논 안보 벨트 당국에 로켓포 공격을 가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이를 근절시키고자 1996년 4월, 분노의 포도 작전에 나섰다.

이스라엘군은 티레와 베이루트 등의 항구들에 해상 봉쇄를 가하였고, 티레 인근 고립된 마을들에 식량을 운송하는 UNIFIL 선박에도 발포하였다. 남부 레바논 각지는 포격을 받았고, 티레의 병원들은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들로 붐볐다. 6일의 공격 동안 4월 18일,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티레 동남쪽 8km 지점에 위치한 카나의 UNIFIL 대피소가 파괴되어 106명의 레바논 난민과 피지 국적의 유엔 종사자 4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카나 학살'에 대해 티레의 히드로품에서는 대대적인 추도식이 열려 라픽 하리리 총리, 네비흐 베리 및 각계의 종파 지도부 등 2만여 군중이 결집하였다. 이러한 반이스라엘 기류에도 1998년 총선 시에 아말은 헤즈볼라에 대해 압승을 거두었다. 다만 2004년 헤즈볼라가 티레에서 승리하며 아말의 영향력은 반감되었다.[83] 주도권을 장악한 헤즈볼라는 티레 외곽 농촌 등지에 로켓 발사대를 설치하여 이스라엘을 줄곧 타격하였고, 이로써 다시 전운이 돌았다.

2.6.8. 2006년 레바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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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에게 포격당하는 라시디예 난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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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무너진 시내의 아파트

​2006 7월, 이스라엘군은 헤즈볼라에 대한 전면전에 나섰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티레 외곽과 시내에 침투, 헤즈볼라 거점들을 습격하여 10여 명을 사살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레바논 군인과 더 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 병원은 다시 부상자들로 북적였다. 뒤이은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민간인 사망자는 더 늘었고, 7월 16일에만 티레 안팎에서 22명이 희생되었다.[84] 계속된 공격으로 티레는 식량 부족을 겪었고, 남부 지역의 주민 수천 가구와 고향을 방문해 휴가를 즐기던 티레 출신 이민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작정 북쪽으로 도망가야 했다. 7월 25일에는 부상자를 싣고 가던 레바논 적십자의 구급차 두 대가 이스라엘 공군의 타격을 받았고, 이로써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지탄을 받았다. 2000년 이스라엘의 남부 변경지 철수 후, 규모 면에서 크게 축소된 UNIFIL 평화 유지군은 폭격의 잔해 제거에 불도저를 지원하는 것 외에는 별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2006년 8월 8일, 적십자 회장 야콥 켈렌버거가 티레에 방문하여 이스라엘로부터 인도적 지원 선박의 티레 입항을 허가받았다. 8월 11일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 1701호에 의거하여 교전 중지가 선포되었고, 레바논군과 (1만 넘게 충원된) UNIFIL만이 주둔하는 비무장지대 내지는 완충지대가 리타니 강 남쪽에서 레바논-이스라엘 국경까지 설정되었다. 다만 8월 20일 휴전이 발효되기 전날까지 이스라엘군의 티레 일대에 대한 폭격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전후 티레 주변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다. 이때부터 티레의 남쪽에는 이탈리아군, 북쪽에는 2007년에 파견된 한국군 소속의 동명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활발히 대민 지원과 재건 사업에 나섰고, 그중 동명부대는 2015년 명예 티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이탈리아 부대 역시 UINIFIL의 마을 공동체 재건 사업에 의거하여 예술 교류, 의료, 정신 치유, 아동 시설 확보, 발굴 활동 등 각종 재건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2.6.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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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경 티레 반도의 모습. 오른쪽에 반세기가량 갈등의 장이던 라시디예 난민촌이 보인다.

평화유지군과 각종 국제 기구의 도움에도 불구, 티레와 남부 주는 2010년대 들어서도 중앙 정부의 무능 내지는 무관심 때문에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한편 2008년 정치 위기 후 아말과 헤즈볼라는 과거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시아파 연대를 구성해 밀착하였으며, 2018년 총선 때에 티레 지역에 배당된 7석의 의원직을 싹쓸이하였다.[85]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대립도 2014년을 마지막으로 점차 수그러들며 안정이 찾아오나 싶었으나, 2019년 레바논에서 10월 17일 혁명이 터지며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티레에서도 카르타고의 창건자의 이름을 딴 엘리사 중앙 광장[86]에 시민들이 결집하여 시위를 벌였고, 나비 베리의 부인 란다의 소유라는 의혹이 있던 해변의 레스트 하우스 호텔에 방화하였다. 레바논 당국은 시위대 18명을 체포하였고, 아말 조직원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시위 군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87]

2019년 들어서도 시민들은 광장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며 경제 위기 및 부패 청산을 요구하였고, 2020년 5월 6일에는 드북 티레 시장의 저택에 총격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이때 7발의 총격에 건물이 일부 파손되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뒤이어 코로나가 터지며[88] 시위의 기세는 점차 꺾였고, 5월 26일 하산 디아브 총리가 티레의 베노이트 바라카트 병영을 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2020년 여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와 함께 레바논 파운드의 가치가 폭락하자 시위는 재차 점화되었다. 인플레이션에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은행들이 현금 인출을 거부하자 시민들은 국영 은행들을 습격하였다.[89]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가 터지자 5월 13와 17일일 헤즈볼라가 티레 인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을 발사하였다. 이에 레바논군이 라시디예 난민촌을 수색하여 로켓을 압수하기도 하였다.[90]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은 그해 8월에도 서로 로켓 공격을 주고 받았는데, 모두 티레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지대에서 벌어졌고 인명 피해도 없었다.

3. 성경 속 티레[91]

에제키엘(에스겔)서에서는 티레의 무시무시한 무역 규모를 기록하면서 상아로 배를 건조하고 은으로 도로를 포장하며 금으로 높은 누대를 쌓는다고 말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너 사람의 아들아, 티로를 위하여 애가를 불러라. 바다 어귀에 자리 잡은 성읍, 수많은 섬으로 다니며 여러 민족과 장사하는 상인 티로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티로야, ′나는 더없이 아름다워.′ 하고 너는 말하였다. 너의 경계선들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조선공들은 너를 더없이 아름답게 지었다. 너의 바깥 판들은 모두 스니르의 방백나무로 짜고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가져다가 네 위에 올린 돛대를 만들었다. 바산의 참나무로 노를 만들고 키팀 섬에서 젓나무를 가져다가 상아를 박으며 갑판을 깔았다. 너의 돛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수놓은 아마포로 그것이 너의 깃발이 되기도 하였고 차일은 엘리사아 섬에서 온 자주와 자홍 색 천으로 만들어졌다.

시돈과 아르왓 주민들이 너의 노를 저었고 티로야, 너에게는 기술자들이 있어 그들이 너의 키잡이였으며 또 네 안에 머무르는 그발의 원로들과 기술자들이 너의 틈을 메우는 수선공들이었다. 바다의 모든 배와 선원들이 너에게 와서 물품들을 거래하였다. 페르시아와 루드와 풋 사람들이, 전사들이 너의 군대에 들어왔다. 그들이 너에게 걸어 놓은 방패와 투구가 너를 광채로 빛나게 하였다. 아르왓인들과 너의 군대가 너의 사방 벽 위에 배치되고 감맛인들이 네 탑들에 배치되었는데 그들이 사방 벽에 걸어 놓은 방패들이 너를 더없이 아름답게 하였다.

너에게는 온갖 재물이 많아 타르시스가 너와 무역을 하였다. 그들은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다. 야완, 투발, 메섹도 너와 장사를 하여, 노예와 구리 연장을 주고 네 물품들을 가져갔고, 벳 토가르마에서는 말과 군마와 노새를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다. 드단 사람들도 너와 장사를 하였고, 또한 많은 섬이 너의 중개상으로 일하면서, 그 대가로 너에게 상아와 흑단을 지불하였다.

너에게는 온갖 제품이 많아서 아람도 너와 무역을 하여, 석류석, 자홍 천, 수놓은 천, 아마포, 산호, 홍옥을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으며, 유다와 이스라엘 땅도 너와 장사를 하여, 민닛 밀, 기장, 꿀, 기름, 유향을 주고 네 물품들을 가져갔다. 너에게는 제품도 많고 온갖 재물이 많아, 다마스쿠스도 헬본 포도주와 차하르의 양털을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고, 단과 야완 머우잘도 너와 상품을 교환하였는데, 그들이 네 물품 값으로 가져온 것은 망치로 두드린 쇠, 계피, 향초였다.

드단은 말을 탈 때 안장에 까는 천을 가져와 너와 장사를 하고, 아라비아와 케다르의 제후들도 너의 중개상으로서, 새끼 양과 숫양과 숫염소를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였으며, 스바와 라마 상인들도 너와 장사를 하여, 온갖 최고급 향료와 보석과 금을 주고 너의 상품을 가져갔다. 하란과 칸네와 에덴, 그리고 스바의 상인들과 아시리아와 킬맛도 너와 장사를 하였는데, 그들은 화려한 의복, 수놓은 자주색 옷, 여러 색으로 짠 융단, 단단히 꼰 밧줄을 너의 시장으로 가져와서 너와 장사를 하였다. 그리고 타르시스의 배들이 너의 물품들을 싣고 항해하였다.'"

(에제 27, 1-25 티로를 위한 애가 中)
에제키엘서에서 다른 이방 민족들과 달리 티레는 심판에 대한 길이가 길고 왕에 대한 심판과 애가까지 따로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과연 너는 다니엘[92]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에제 28, 1-5, 티로 임금에게 내리는 심판 中)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 티로 임금을 두고 애가를 불러라. 그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완전함의 본보기로서 지혜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서 살았다. 너는 홍옥수와 황옥, 백수정과 녹주석과 마노, 벽옥과 청옥과 홍옥과 취옥, 온갖 보석으로 뒤덮였고 너의 귀걸이와 네가 걸친 장식은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네가 창조되던 날 그것들이 모두 준비되었다. 나는 우람한 커룹을 너에게 보호자로 붙여주었다. 너는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 살면서 불타는 돌들 사이를 거닐었다. 너는 창조된 날부터 흠없이 걸어왔다.

그러나 마침내 너에게서 불의가 드러났다. 너의 그 장사 때문에 너는 폭행을 일삼으며 죄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럽게 여겨 하느님의 산에서 쫓아냈다. 보호자 커룹이 너를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너의 아름다움으로 네 마음이 교만해지고 너의 영화 때문에 너는 네 지혜를 타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임금들의 구경거리로 내놓았다. 너의 그 많은 죄와 부정한 장사로 너는 네 성소들을 더럽혔다. 그래서 내가 네 한가운데에서 불이 나와 너를 살라버리게 하였고 구경하는 모든 이의 눈앞에서 너를 땅바닥의 재로 만들어버렸다.'"

(에제 28, 11-18, 티로 임금을 위한 애가 中)
솔로몬 왕을 연상시키는 대단한 부유함이 나오는데 이 내용을 보아 평소 이스라엘은 티레와 장사 문제로 인한 시비가 꽤 많았던 것 같다.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은 서로 말이 통하였는데[93]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 지방에서 살면서 페니키아어를 입말로 썼기 때문이다. 이후 이스라엘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을 때도 따로 고센이란 지역에서 이집트인과 동화되지 않고 살았기에 페니키아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의 차이는 히브리 문자와 페니키아 알파벳의 차이일 뿐 입말은 서로 같았기에 통일 이스라엘은 물론 분열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 역시 페니키아와 인적교류가 활발하였다. 히브리 문자도 페니키아 알파벳을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티레는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몰렉 외에 전 페니키아 지역에서 숭배받던 아슈타르테 여신도 섬겼는데, 이 아슈타르테가 그리스의 다신교적 특성에 따라 아프로디테로 바뀌었다는 근거있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을 따른다면 아프로디테가 우라노스의 정액과 바다가 만나서 태어났다는 신화는 티레의 강력한 해양문화를 뜻하는 의미가 될 수 있다.

3.1. 티레와 이스라엘 왕국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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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세기에 티레는 최전성기를 누렸는데, 특히 기원전 950년 전후 히람 1세 때가 정점이었다. 히람 1세가 구약성경에서 솔로몬 왕과 동맹을 맺었다고 나온 히람 왕이다(1열왕 5, 15-32). 히람 1세는 다윗 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친해 백향목과 함께 목수, 석공, 공학자, 금속기술자, 상아기술자들을 보내 다윗 왕궁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다. 솔로몬 시대가 되면 식량을 공급받는 대가로 페니키아 건축가들을 보내 솔로몬 왕의 사역을 돕게 하였는데, 다윗이 세웠던 시온 성 북쪽의 증축된 솔로몬 성은 페니키아 기술자들이 설계한 페니키아식 도시였다. 솔로몬 성 외에 유명한 솔로몬 성전도 페니키아 건축가들이 건축했다. 그 외 레바논 백향목 나무기둥 36개를 써서 열주식으로 세운 상아궁과 솔로몬 왕좌도 죄다 페니키아 사람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당시 백향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야파로 보낸 다음 육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동맹관계를 맺고 함께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티레는 솔로몬 왕과 조약을 맺어 홍해와 인도양으로 통하는 히브리의 항구를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사용하고 그 지역의 광산개발과 조선소도 공동으로 운영했다. 솔로몬 왕의 상선대는 하람 1세의 도움으로 티레의 식민지에 진출해 히브리인들이 지중해 여기저기에 상권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 페니키아의 도시 하디스에 히브리인들이 정착했다.[94] 열왕기 상권 10장에는 아랍 반도 아덴 왕국의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만났다는 내용을 서술하며 솔로몬 시대에 세운 페니키아식 건축물이 얼마나 장엄한지 간접적으로 묘사했다.[95]

이사야서와 에제키엘서에서 티레의 파멸을 길게도 예언하는 등 이들간의 관계를 싫어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훗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갈라진 뒤에도 여전히 경제적 벨트를 유지했다.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과의 우호관계가 돈독하였다. 이웃 시돈의 공주 이제벨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하여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의 동맹은 후일 예후가 아합 왕가를 멸문시키고 페니키아와의 우호관계를 파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반면 유다의 선지자 이사야, 에제키엘 등은 티레 왕을 사탄에 비유하며 강하게 저주했다.[96] 비록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도 티레는 살아남았으나 바빌로니아에게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 같이 사이좋게 멸망했다. 다만 육지의 티레 말고 섬 티레는 살아남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 멸망했다. 때문에 폐허가 된 페니키아 본토의 유적에서보다 이스라엘에서 페니키아의 건축얼개를 찾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기존 페니키아 지역의 유적은 죄다 헬레니즘화되어 페니키아 양식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와 막역한 관계였던 이스라엘 영토에는 남았던 것이다.

4. 여담

미국 뉴욕 주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는데, 창립자 제이슨 스미스가 티레의 역사와 유적에 경도되어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1829년). 미국의 티레(영어 발음으로는 티어)에도 레바논의 티레의 것과 유사한 수도교가 세워졌고, 그 일부가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인 히람 농가 역시 티레의 고대 군주 히람에서 따온 것이다. 다만 인구 1천 명의 소도시로, 인지도는 듣보잡 수준이다. 여담으로 티어가 속한 군의 이름 역시 고대 로마에서 차용한 세네카이다.

5. 관련 문서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바위'라는 뜻이다.[4] 그리스 신화에서 으레 튀로스산 세마포를 가리키면 매우 값비싼 세마포를 뜻하는데 그 튀로스가 바로 티레다.[5] 《가톨릭 성경》[6] 《공동번역 성경》[7] 《개역성경》 번역판[8]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정복한 왕들의 숫자만 72명에 달할 정도로 도시국가적 성격이 아주 강했던 것이 특징이다.[9] 당시의 식민지 중에는 튀니지의 카르타고와 스페인의 타르테소스 등이 있었다.[10] 고층 건물과 다양한 민족이 왕래하는 활발한 무역 도시인 공통점이 있다.[11] 바트룬~아크레 일대.[12] 요세푸스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왕권과 사제 계급 간의 대립이 남매간 분쟁의 원인이라고 기록했다. 한편 북아프리카에 당도한 엘리사는 소가죽만 한 땅을 주겠다는 현지 원주민 군주의 어이없는 제안에, 소가죽 띠를 이어 붙이는 계략으로 도시를 세울 만한 땅을 얻어 카르타고의 창건자가 되었다. 티레에는 지금도 그녀를 기리는 '엘리사 광장'이 있다.[13] 티레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다. 멜카르트는 본디 암몬인의 신이었고,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게헨나 산에서 멜카르트에게 인신공양을 행했다는 기록이 《구약성경》에 나온다. 그 때문에 '게헨나'는 유대교에서는 '지옥'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아랍어로도 '자한남'으로, 같은 어근이다. 다만 카르트 하다쉬트의 이야기에서 보면 알다시피 몰렉의 인신공양으로 가장 유명한 동네가 티레였던 것도 사실이다.[14] 물론 해상무역 부문에서 고대 이스라엘은 티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15] 한편 티레의 동맹이었던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신아시리아에게 멸망되었다.[16]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수비대가 21년간 공방전을 벌였다.[17] 2세기 경의 로마 역사가인 유스티누스에 의하면 페르시아 지배기에 노예 봉기가 일어나 노예 소유주가 거의 다 살해되었고, 봉기군이 유일하게 살려둔 스트라톤이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높지 않다.[18] 그와 함께 돌고래가 화폐에 새겨지기도 했다(~기원전 400년).[19] 사업상의 비밀로 보안이 매우 철저했다고 한다.[20] 그는 페르시아어에 능통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서 페르시아 포로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21] 이후 그리스에 남은 아들 안티고노스 2세가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을 열게 된다.[22]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저서에 스스로의 연설과 성당의 연혁을 상세히 기록했다.[23] 그럼에도 멜카르트 신앙은 유지되었다고..[24] 1122년 말엽, 동로마 제국의 코르푸 섬을 점령한 후 출항했다. 일명 베네치아 십자군은 출발부터 기독교 국가와 싸운 것이다. 이는 82년 후 더 크게 재현되었다.[25] 그녀는 1180년경 살라딘의 조카인 하마 아미르에게 시를 헌상하고, 필담을 나누었다.[26] 정확히는 옹프루아 사후 장의 과부이자 위그 3세의 누이였던 마가렛 드 뤼지냥이 여성 영주로 등극했고, 그녀는 1286년 맘루크 왕조의 칼라운과 영토 협상을 타결했다. 그리고 1291년 마가렛은 조카인 애므리 드 뤼지냥에게 티레를 넘기고, 키프로스 섬 니코시아의 티레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으로 은퇴했다.[27] 혹은 칸 수르, 칸 압도 엘-아쉬카르, 마아니 궁전[28] 그는 1865년 사촌 싸미르 알-후사인과의 권력 투쟁 끝에 사망했다.[29] 당시 독일 발굴팀은 현지 당국의 협조하에 120명의 주민들에게 토지를 보상으로 주어 이주하도록 했다. 한편 독일인들이 식민지를 세운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30]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도시에만 살았다.[31] 러시아계 프랑스인으로,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의 후원자였다.[32] 시아파의 성지인 나자프에서도 그의 책이 교육 자료로 출판될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33] 위임통치 내내 셰이크 무그니야가 판관을 맡았다.[34] 2개의 로마 시절 기둥을 사용했다.[35] 87%의 무슬림 중 시아파 83%, 수니파 4%[36] 팔미라갈릴리 방면의 육군과 해군 등이 동원되었다.[37] 아랍어로 재앙이란 뜻이다. 티레 등 레바논 남부에도 걸맞은 표현이었다.[38] 난민들의 유입 이후 1950년대의 자파리야 학교에는 '이민자들의 건물'인 비나야트 알-무하지르가 더해졌고, 많은 팔레스타인계 학생 및 교사들이 있었다.[39] 시위는 시아파 무슬림이 주도했지만, 정교회 등 기독교도들도 상당수 동참했다. 진압 측에도 역시 시아파 무슬림과 기독교가 섞여 있었다.[40] 이에 대해 카젬은 시위대가 다이너마이트 등을 던져 부득이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했으나, 검증되지 않았다.[41] 다만 당시 이 일대를 방문한 미국인 외교관은 정치 현안보다는 가문간의 대립이 주된 동기라고 분석했다.[42] 다만 돌아온 카젬은 수차례에 걸친 총기에 의한 암살 시도를 겪는 등 혼란이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았다.[43] 1960년대 티레의 의원 자파르에 의하면 티레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의 1964년 의회 연설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60개 마을들 중 12곳에만 포장 도로와 학교가 있었고, 40곳에는 학교가 없었으며 모두 물과 전기의 부족을 겪고 있었다. 또한 청년들이 죄다 서아프리카나 베이루트로 이주하는 바람에 시내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그러면서 그는 티레의 '문명'을 정부가 나서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44] 1974년에는 그 산하 민병대로 아말 운동 (حركة أمل)을 두기에 이르렀다.[45] 3,900명은 엘바스, 7,160명은 부르즈 엘쉬말리, 13,170명은 라시디예, 나머지는 마추크나 잘 알 바하르 등지에 정착했다.[46] 당선자 3인은 각각 변호사, 남미에서 성공한 사업가, 그리고 자파르 샤라펫딘으로 구성되었다. 카젬은 재차 도전했으나 4위에 그쳤고, 무장 시위대와 체포 및 뇌물을 탓했다. 다만 카젬 본인 역시 주레바논 미국 대사관에 자금을 요청했었다.[47] 다만 당시의 분노는 이스라엘 정부에만 집중되었기에 레바논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유로이 티레를 왕래했다.[48] 그곳에서 니카라과의 산티니스타 혁명군도 훈련했다고도 한다.[49] PLO 때문에 함께 이스라엘에게 공격당한다고 여겨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에 대한 혐오가 점점 쌓여가던 차였다.[50] 알-아사드 가문은 1974년 총선을 마지막으로 정치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고, 정치계에 복귀한 카젬 역시 무사가 세운 단체들에 의해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다.[51] 한편 무사는 정치적으로 기존 동맹이던 레바논 드루즈 지도자 카말 줌블라트와 내전 직후 관계를 단절하였고, 카말 휘하 레바논 국가 운동(NLM)은 PLO와 연대하게 된다.[52] 5월 19일 라시디예 함포 사격, 5명 사망 및 11명 부상. 6월 20일 공습, 라시디예에서 5명 사망 및 2명 부상당하고 부르즈 엘쉬말리에서 8명 사망 및 30명 부상.[53]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다.[54] 이스라엘 민간인 8명, 이스라엘 군인 3명 사망. 특공대 7명 사망.[55] 8월 5, 16, 29일 타격, 9월 3일 추가 타격.[56] 따라서 레바논 남부 지역은 내전 발화점이었음에도 내전의 참화에 비교적 덜 노출되었다. 대신 후일 이스라엘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57] 라시디예, 엘바스,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58] 아이 13명을 포함하여 민간인 38명 사망, 71명 부상. 페다인 중 9명 사망. 직후 PLO는 자신의 소행이라 인정하였다.[59] UNIFIL 선발대로 프랑스 공수부대 당도, 1978 3.23 리타니 강 도하, 티레로 향함. 아라파트 영향력 하의 하산 바로 병영, 프랑스군에 기지 넘기려 했으나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내의 아라파트 반대파 및 아랍해방전선은 협조 불복, 4.30 교전. 민병대 1명 사망, 2명 부상. 5.1 티레 인근 차량 지뢰로 세네갈 유엔군 3명 사망. 5.2 남레바논 인민해방전선은 프랑스군 기지에 발포하고 수송대를 기습하여 1명의 세네갈, 2명의 프랑스 군인 및 1명의 팔레스타인 연락 장교가 사망하였다. 또한 지휘관 살방을 포함한 9명의 UNIFIL 병사가 중상을 입었다.[60] 무사 사드르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틀어진 후, 아말 대신 PLO와 동맹을 맺었다. 1977년 그 지도자인 카말 줌블라트의 암살과 함께 쇠약해졌다.[61] 지금까지도 무사 사드르는 시아파 공동체를 다른 레바논 종교 공동체들과 동등한 지위로 올려 놓은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그의 실종은 레바논, 특히 남부 지역에서의 시아파 공동체가 뭉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62]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에서 여성 2명 사망. 가옥 15채 파괴되고 70채 파손.[63] 다만 이후 약 2년 가까이 큰 사건은 없었다. 1981년 4월 27일,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유엔군 소속 병사인 아일랜드인 케빈 조이세를 디아르 느타르에서 납치하여 티레의 난민촌으로 옮긴 후, 그가 몇 주 후 민병대와 유엔군 과의 교전에서 총살된 채로 발견되는 불상사가 있었다.[64] 이는 PLO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사담 후세인의 수용소에 찬성하자 이란 편인 아말 측이 분노한 것도 한몫했다.[65] 파타군이 부르즈 엘쉬말리 난민촌 인근 아말의 기술 위원회를 10시간 동안 타격했다.[66] 표면상으로는 주영국 이스라엘 대사 살로모 아르고프에 대한 암살 기도에 대한 보복. 6월 6일 월경. 이른바 '갈릴리 평화 작전'.[67] 당시 베이루트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종군 기자 존 블로치에 의하면 라시디예 난민촌의, 미국이 후원하는 구호 시설에도 집속탄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시장 지역이 주로 폭격을 당하였다.[68] 유엔군 소속 장교에 의하면 이는 '대포로 나는 새를 맞히는' 수준의 부질없는 시도였다고 한다.[69] 비전투원 민간인의 사망자 수는 집계하기 어렵지만, 부르즈 엘쉬말리에서만 최소 2백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70] 이에 대해 이스라엘군은 56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71] 당시 라시디예와 부르즈 엘쉬말리에는 등록된 난민만 각각 15,356명과 11,256명이었다. 도심과 가까운 엘바스 난민촌에는 5,415명의 등록 난민이 있었다. 도심 자체에는 2만 3천 명의 주민이 있었다.[72] 2차 대전 후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대주교 가문인 알-아슈카르 가문이 접수한 이후로 칸 알-아슈카르로 불리고 있었다.[73]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시아파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카젬의 이러한 매국 행위는 민중뿐만 아니라 시리아에까지 분노를 유발하여, 그의 정치 경력에 있어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되었다.[74] 1978년 당시 여러 가족을 잃었고, 1982년 침공 때도 친척들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5] 정규군뿐만 아니라 준군사조직인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군사 첩보국인 아만과 국내 보안부인 쉰 베트의 지부이기도 한 고층 건물이었다.[76]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67명이었다고도 한다.[77] 이스라엘군 부상자 수는 30여 명이었다.[78] 1세대인 무사 사드르와 카말 줌블라트가 동맹이다가 결국 헤어졌으나, 둘 다 사망한 후 재차 손을 잡았다.[79] 시에라리온의 보 출신으로, 선조들의 고향인 레바논으로 돌아와 1980년 아말 지도자가 되어 현재까지 역임 중이다. 또한 1992년부터 현재까지 레바논 의회 대변인이다.[80] 이스라엘 철군 후 레바논 각지에서는 카테브 당을 위시로 하여 이스라엘에 협조한 마론파 기독교도들에 대한 공격과 추방이 일어났다.[81] 히긴스는 현지 아말 지도자와 면담한 후 티레에서 나쿠라로 향하던 후 납치되었고, 각종 고문에 시달린 끝에 1990년 7월 사망이 확인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분노를 야기한 헤즈볼라 지도자 압바스는 1992년 가족과 함께 암살당한다.[82] 그 와중에 1992년 선거에서 아사드, 칼릴 가문 모두 아말에 패배하였다. 2006년에야 알리 하산 알-칼릴이 아말 후보가 되어 아흐메드 알-아사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다만 그 역시 티레가 아닌 남부 시골인 마르자윤 하스바이야 지역구에서 승리한 것이다.[83] 한편 1996년 이스라엘 침공 직후 티레 마론파 대주교는 하이파 및 성지 대주교좌 창설 기념으로 기존 티레의 재산 일부를 포기하였다.[84] 7.16 정오 경 자발 아멜 병원(시돈 협회) 근처 아파트 타격, 8명 사망. 동시기 부르즈 엘쉬말리에서 아동 3명 포함 5명 사망. 같은 날 오후 군대 주둔 다세대 아파트에 공습, 1살 아기 및 스리랑카인 하녀 포함 14명의 민간인 사망. 21일 레바논 장병들은 72구의 민간인 시신을 매장하였다.[85] 92% 득표, 리아드 아사드 8% 득표.[86] 레바논에서 제일 높은 32.6m 높이 깃대가 있고, 11 x 19 m 크기의 깃발을 게양한다.[87] 물론 아말은 혐의를 부인하였다. 대중 운동으로 시작한 아말이 40년이 지나자 점차 기득권화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88] 티레에서는 5월경 서아프리카에서 유입되었다. 7월에는 티레의 레바논 이탈리아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가 사망하였는데, 레바논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첫 의사였다.[89] 한 시민의 모친 치료비를 위한 예금 인출을 거부한 은행이 첫 습격 대상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La Casa De Papel의 영향으로 은행 직원 및 지점장을 인질로 삼기도 하였다. 그 전에도 4월 26일 아침 레바논 신용 은행에 몰로토프가 투척되는 등의 사건이 있긴 했다.[90] 5월 13일 라시디예 남쪽 클라일레에서 헤즈볼라가 로켓 3발을 발사하여 북부 이스라엘로 향했으나 모두 지중해 해안에 떨어졌다. 레바논군은 라시디예를 수색하여 로켓 몇 발을 발견했으나 기존 발사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5월 17일 헤즈볼라는 로켓 2발을 티레 남쪽에서 추가 발사하였다.[91] 개역개정에선 '두로'. 시돈과 함께 세트로 묶이는 그 두로 맞다.[92] 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아니라,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페니키아 전통의 유명한 의인이다. 에제키엘 14장 14절에 "비록 그곳에 노아와 다니엘과 , 이 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다니엘이 이 사람이다. 노아는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그 사람이고 욥은 욥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시대 의로운 아랍인 부자로 알려졌다. 에제키엘서에서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욥의 일화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 알려진 이야기였던 듯하다.[93] 페니키아의 아스타르테가 이스라엘에서 아슈토레트로 불리는 등 미세한 차이는 있었지만 사투리에 가까웠다.[94] 하디스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도시로 현재의 카디스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타르테소스(성경의 타르시스)와 교역하기 위해 세웠다. 근대까지 스페인에서 제일가는 항구였고 콜럼버스 탐험의 시작점이기도 하다.[95] 시바 여왕은 시온 성에서 솔로몬 성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층계와 층계 양 옆으로 장엄하게 비춰지는 황금 궁전과 상아 궁전, 그리고 대회랑을 따라 있는 솔로몬 성전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도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보니 오히려 소문이 실제만 못하다고 찬사를 보내고, 솔로몬에게 이러한 영광을 누리게 한 신을 찬미하며 가져왔던 보물을 솔로몬에게 주었다. 솔로몬은 이것을 가지고 류트를 연주하는 자들을 위한 누각을 지었다고 한다.[96] 이사야서 23장, 에제키엘서 27, 28장은 티레에 대한 저주로 채워진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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