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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i Lanka Freedom Party ශ්රී ලංකා නිදහස් පක්ෂය[1] இலங்கை சுதந்திரக் கட்சி[2] | |
한글명칭 | 스리랑카 자유당 |
상징색 | 파란색 |
대표 |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
창당일 | 1951년 9월 2일 |
당사 | 307, T. B. Jayah Mawatha, 콜롬보 10 |
이념 | 사회민주주의 좌익 내셔널리즘 싱할라인 내셔널리즘 |
정치적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청년 조직 | SLFP 청년 전선 |
정당 연합 | 인민자유동맹 |
국회 의석 수 | 14석 / 225석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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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리랑카의 중도좌파 정당.2. 역사
2.1. 반다라나이케 가문의 당
변호사 출신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싱할라족 문화와 사회적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1936년에 싱할라 마하 사바(සිංහල මහා සභා)를 설립했던 것이 전신이다. 이후 통일국민당이 창당되자 단체가 흡수되면서 당 내에서 활동을 한다. 그러면서 당 내 갈등으로 인해 반다라나이케는 탈당하고, 지금의 정당을 창당하게 되었다.다음 해에 있었던 총선에서는 9석으로 가지면서 야당에 머물렀다. 당시 경제가 저조해지면서 자유당이 사회주의 강령을 옹호하고 영어 대신 싱할라어 공식 언어 대체화에 나서면서 소규모 공산주의 정당들과 정당 연합을 구성하고 첫 여당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런 도중에 타밀족의 타밀어 공식 언어화까지 거세게 나서자 민족 간 갈등이 커지던 와중에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의 부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르게 되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총리로 재직했던 기간에는 국유화 정책과 외교적으로 1962년 중인전쟁 조정자 역할로 나서면서 스리랑카 국제적 위상을 높인다. 1970년 3차 집권에 성공한 후 1972년에 국호를 실론 자치령에서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하면서, 영연방 왕국에서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1977년 총선에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원집정부제로 다시 전환되면서 대통령 권한이 강화되고 1982년 국민투표에서 의회 임기가 연장되는 바람에 야당이 연장되다가 1989년 총선를 거쳐 1994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자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에 올랐고, 쿠마라퉁가는 1999년 대선에서도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2.2. 마힌다 라자팍사의 당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에 따라 2005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으므로, 총리인 마힌다 라자팍사를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본인은 자유당 대표직을 유지하며 정계에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려 했다.2005년 대선에서 라자팍사는 1999년 대선에 이미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쿠마라퉁가와 맞붙은 적 있는 라닐 위크레메싱게 전 총리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둘다 나이대가 비슷하고 총리직을 역임하긴 했지만, 두번째 대선 출마라서 더 노련한 위크레메싱게가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50.29% 대 48.43%로 라자팍사가 신승을 거두었고, 이로써 쿠마라퉁가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라자팍사는 전임자의 바지사장 역할에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집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마라퉁가와 치열한 당권 투쟁을 시작했고, 대통령 취임 1년만인 2006년에 쿠마라퉁가를 꺾고 당 대표 자리를 쟁취하는데 성공했는데, 이로써 자유당은 반다라나이케 가문의 당이 아닌 마힌다 라자팍사의 당이 되었다.
이후 라자팍사는 타밀족 반군(LTTE) 진압에 집중하여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 동안 지속되던 내전을 종식시켰고, 전쟁영웅의 이미지를 앞세워 재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라자팍사 휘하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내전 종식에 기여한 또다른 전쟁영웅 사라트 폰세카가 야권단일후보로 2010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당권 투쟁 패배 이후 4년간 잠행을 이어가던 쿠마라퉁가 전 대통령이 폰세카 지지를 선언하면서, 라자팍세의 재선 가도에 먹구름이 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라자팍사의 재선은 위크레메싱게를 상대했던 초선 때보다도 힘겨운 박빙 승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57.88% 대 40.15%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라자팍사가 승리했다.
이로써 초선 때보다도 막강한 지지 기반을 확보한 라자팍사는 폰세카를 쿠데타 혐의로 감옥에 집어넣으며
그러나 스리랑카 헌법은 앞서 말했듯이 재선까지만 허용하고 3선은 불허했기에 지지율이 아무리 높아도 라자팍사는 2015년 대선 출마가 불가능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3선 개헌에 나섰다.
물론 굳이 헌법을 개정하기 보다는 대통령직에 바지사장을 앉혀두고 여당 대표로서 실권을 휘두르는 꼼수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 방법은 쿠마라퉁가가 이미 썼다가 라자팍사 본인에게 밀려 나가리되면서 실패했고, 라자팍사 역시 그렇게 했다가 똑같이 후임자에게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꼼수를 쓰기보다는 개헌이라는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이다.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대법원의 반발이 있기도 했으나, 라자팍사는 대법원장을 교체하는 초강수를 쓰면서까지 밀어붙여 2015년 대선후보로 등록하는데 성공했다.
2.3. 라자팍사 VS 시리세나
여기까지만 보면 마힌다 라자팍사의 3선을 통한 장기집권의 길이 열린 듯 했으나, 라자팍사 정권의 각료였던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가 2015년 대선에 자유당 당적을 유지하면서 야권단일후보로 출마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고, 이로써 자유당 후보만 2명이 격돌하는 전무후무한 대선이 치러졌다.물론 이러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10년간의 집권을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진 라자팍사가 시리세나를 꺾고 3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싱할라족의 56%만이 라자팍사에게 투표하고, 타밀족 등 라자팍사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수민족의 84%가 시리세나에게 결집하면서, 47.58% 대 51.28%로 시리세나가 승리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시리세나는 라자팍사의 정적인 통일국민당의 라닐 위크레메싱게가 총리직에 복귀하도록 했으며, 라자팍사에 의해 투옥되었던 사라트 폰세카를 석방하고 복직시켜 스리랑카군 최초의 원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라자팍사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대선 직후에 있을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로서 권좌에 복귀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시리세나를 자유당 대표로 추대했다.
뜬금없이 얼마 전까지 대선에서 극딜을 주고받던 라이벌을 자당 대표로 추대하다니 무슨 약을 했나(...) 싶겠지만, 시리세나도 어쨌든 자유당원이고, 대통령 임기 초반의 높은 인기에 편승하여 지지율을 올린다는 효과를 노릴 수 있으므로 나름대로 그럴듯한 선거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꼼수를 대선에서 라자팍사를 심판했던 국민들이 모를리가 없었기에, 2015년 총선은 위크레메싱게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더이상 당 대표도 아닌 일개 평의원에 불과한 라자팍사가 대신 현직 대통령이자 대표인 시리세나에게 자유당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2.4. 라자팍사의 탈당
하지만 마힌다 라자팍사는 위와 같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재집권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시리세나와 투쟁하는 대신, 자유당을 대신할 본인의 사당을 새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이를 위해 본인의 최측근인 G.L. 페이리스를 비롯한 일부 자유당 의원들이 탈당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뒤, 그들이 우리 스리랑카 자유전선(OSLFF)이라는 군소정당을 테라포밍하여 스리랑카 인민전선(SLPP)으로 재창당하도록 했다.
라자팍사 본인은 일단 자유당에 잔류했고 인민전선의 공식적인 대표는 페이리스였으나, 인민전선의 실질적인 당권은 라자팍사에게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인민전선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의 지지 기반을 잠식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라자팍사는 그 여세를 몰아 시리세나에게 라닐 위크레메싱게와의 연정을 파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여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러자 위크레메싱게는 라자팍사가 의회 과반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시리세나가 의회 해산을 선언하여 조기총선을 시도하자, 라자팍사는 드디어 자유당을 탈당하고 본인의 사당인 인민전선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의회 해산 과정이 위법했다고 판단하여 조기총선이 무산되었고, 라자팍사는 잦은 불신임을 견디지 못하고 사임하여, 위크레메싱게가 총리직에 복귀했다.
2.5. 라자팍사 형제와의 연정
마힌다 라자팍사가 자유당에서 정식으로 탈당하여 스리랑카 인민전선(SLPP)에 입당하면서 자유당에는 시리세나를 지지하는 계파만 잔류하게 되었는데, 자유당의 지지 기반은 이미 대부분 인민전선에 넘어간 상태였기에, 시리세나는 2019년 대선에 불출마하고 인민전선과 연대할 것을 선언했다.인민전선이 마힌다 라자팍사의 사당이므로 당연히 그가 출마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2015년에 3선 출마를 했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힌다 라자팍사의 불출마일 뿐, 라자팍사의 불출마는 아니었는데, 대타로 출마한 인물이 바로 마힌다 라자팍사의 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사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민전선과 자유당 등이 결집한 정당연합인 스리랑카 통일인민자유동맹의 후보로 출마한 고타바야 라자팍사는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전 대통령의 아들 사지트 프레마다사를 꺾고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마힌다 라자팍사는 총리로서 권좌에 복귀했는데, 이로써 자유당은 비록 자당 대통령을 배출한 건 아니지만 연립정부의 일원으로서 여당으로 남게 되었다.
2020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비록 이전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인 14석 확보에 만족해야 했지만, 연립정부에는 꾸준히 참여할 수 있었다.
2.6. 라자팍사 형제와의 결별
2022년 스리랑카 경제위기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어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과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 형제가 모두 하야하자, 자유당은 인민전선과의 연정 파기를 선언하고 다른 군소정당들과 함께 인민자유동맹(FPA)이라는 새로운 정당연합을 결성했다.이듬해인 2023년에는 현직 대표이자 전 대통령인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가 2024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는데, 해당 선거가 자유당이 당세를 회복할지, 아니면 영원히 군소정당으로 전락할지 가를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3. 역대 대표
- 초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1951~1959)
- 2대: 찰스 퍼시벌 드 실바 (1959~1960)
- 3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1960~1994)
- 4대: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1994~2006)
- 5대: 마힌다 라자팍사 (2006~2015)
- 6대: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2015~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