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18:45:28

스테판 토마셰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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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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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토마셰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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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jepan Tomašević}}}
파일:스테판 토마셰비치.jpg
출생 1438년
사망 1463년 5월 25일 (향년 25세)
보스니아 왕국 야이체 인근 클류치
재위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데스포티스
1459년 3월 21일 ~ 1459년 6월 20일
보스니아 국왕
1461년 7월 10일 ~ 1463년 5월 25일
아버지 스테판 토마시
어머니 보자차
부인 옐레나 브란코비치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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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제8대이자 마지막 국왕.

2. 생애

1438년경 스테판 토마시와 보자차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토마시는 제4대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사생아였고, 보자차는 평민이자 보고밀파 신도였다. 1443년 11월 트브르트코 2세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보스니아 국왕에 추대된 뒤 사회적 신분이 격상되었다. 1445년 아버지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스테판 오스토야의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때 그 역시 개종했다. 이후 보자차는 토마시와의 결혼이 취소되어 수도원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446년, 스테판 토마시는 보스니아 대공으로서 자신과 대적하던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의 딸 카타리나 코사차과 결혼해, 코사차 가문과 화해했다.

1453년, 스테판 토마시는 아들 토마셰비치를 크로아티아의 전임 반(Ban) 페터르 탈로바츠의 미망인인 헤드비히 가라이와 결혼시킴으로써, 탈로바츠 가문의 영지를 보스니아에 편입하려 했다. 이때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가 자기가 헤드비히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이 때문에 토마시와 코사차간의 무장 충돌이 벌어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해 두 사람을 중재하면서 없었던 일로 처리되었다. 1455년 4월 30일,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보스니아 국왕과 그의 아들을 교황청의 보호 아래 두겠다고 선포했다. 1456년, 스테판 토마시는 교황에게 아들의 신부를 구해달라고 청하면서, 그 신부는 왕가의 공주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곧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의 사생아와 토마셰비치의 결혼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토마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1458년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인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사망했다. 그는 세 딸만 두었고 아들은 없었기에, 시력을 잃은 동생 스테판 브란코비치와 미망인인 엘레니 팔레올로기나가 권력을 공유했다. 이에 스테판 토마시는 엘레니에게 접근했고, 라자르와 엘레니의 세 딸 중 장녀인 옐레나 브란코비치를 토마셰비치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토마시는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혈통인 공주와 아들을 짝지워서 위상을 드높이고,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보스니아 왕국에 편입하려 했다. 토마시는 명목상 보스니아의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자기 계획을 설명했고, 마차시 1세는 보스니아 왕국과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오스만 제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해 헝가리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헝가리 의회는 1459년 1월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세르비아에 대한 권리를 확인했다.

그 후 부더에서 옐레나와 결혼식을 치른 토마셰비치는 삼촌인 라디보이 오스토이치와 함께 세르비아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보스니아 수도 보보바츠에 대한 오스만군의 습격을 받고 가까스로 체포를 모면했다. 1459년 성주간 동안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중심지인 스메데레보에 도착한 뒤 3월 21일 스테판 브란코비치를 밀어내고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자국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토마셰비치의 집권을 자기 권리에 대한 부당한 침해로 간주했다. 1459년 6월, 메흐메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스메데레보로 진격해 단숨에 포위했다. 이에 겁을 먹은 토마셰비치와 삼촌 라디보이는 6월 20일 보스니아로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스메데레보 요새와 마을을 넘겼다. 오스만군은 1년 안에 세르비아 전역을 장악하고 자국에 합병했다.

토마셰비치는 보스니아로 도피한 뒤 아버지의 궁정에 피신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는 토마시와 라디보이가 가장 중요한 요새를 적에게 팔았다고 주장했다. 토마시는 교황 비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형과 아들이 스메데레보를 지킬 가망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을 뿐이며, 자신은 이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한 7월에 만토바 공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오스만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밀라노 공작부인인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가 안코나를 통해 병사 300명을 보스니아에 파견했지만, 다른 유럽 군주들은 그를 외면했다.

교황 비오 2세는 유럽 군주들이 그를 도우러 오지 않는 이유는 보고밀파가 여전히 보스니아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라며, 백성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힘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이에 토마시는 1459년 보고밀파 성직자들에게 개종하거나 자신의 영토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보스니아를 떠난 보고밀파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2년간 12,000명이 강제로 개종했고, 성직자 40명은 보고밀파를 신봉하는 코사차 가문의 영지로 도주했다. 1461년, 토마시는 이단 혐의로 기소된 세 사람을 로마에 있는 후안 데 토르케마다 추기경에게 보내 심문받게 했다.

1461년 7월, 스테판 토마시가 사망했다. 세간에는 형제 라디보이와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대 학계는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토마셰비치는 라디보이가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그해 9월 18일에 헌장을 발행해, 라디보이의 모든 요새와 왕국 내의 다른 소유지를 "왕관에 대한 충실하고 진정한 봉사"로 인정했다. 그는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왕실 내의 모든 불화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우선 계모 카타리나의 직위와 특권을 보장했으며, 아버지와 줄곧 갈등을 벌였던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와 완전히 화해했다. 이후 경제를 개선하고 금속 가공 무역에 더 많은 이익을 챙기도록 힘을 기울였다.

한편, 토마셰비치는 교황 비오 2세에게 주교, 십자군, 대관식을 위한 왕관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비오 2세는 모드루시의 주교 니콜라스를 파견했고, 니콜라스는 '보스니아의 수호자'로 선포된 성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의 축일인 11월 17일에 야이체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대관식을 주관하고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것은 보스니아에서 거행된 마지막 대관식이었다. 그러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는 "보스니아는 헝가리 왕국의 봉신인데 어찌 왕관을 전달했는가?"라며 반발했다. 비오 2세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비테츠 야노시는 보스니아와 헝가리 국왕 간의 분쟁을 중재했지만,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62년 봄, 로마 왕 프리드리히 3세와 분쟁을 벌이던 마차시 1세는 그가 왕관을 받은 걸 용인하기로 했다. 토마셰비치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특정 도시를 양도하고 경의를 표하며,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걸 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를 완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토마셰비치는 교황에게 조속히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촉구했고, 라구사 공화국과 알바니아의 스컨데르베우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 보고밀파 신자들은 토마시 말기부터 이어진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오스만 제국이 보스니아를 석권해 자기들을 해방해주기를 희망했다. 여기에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와 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 헤르체고비치가 또다시 갈등을 벌였고, 블라디슬라프는 메흐메트 2세에게 아버지를 꺾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갔지만, 헝가리와 교황청, 라구사, 베네치아, 그리고 스컨데르베우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은 토마셰비치는 1462년 6월 오슴만 제국에 바치던 조공을 거부하고 사바 강과 보스나 강의 합류 지점에 오스만 제국이 건설한 마을을 습격해 파괴했다. 메흐메트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보스니아를 멸망시키기로 했다. 이에 토마셰비치는 사방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어디에서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1463년 봄, 메흐메트 2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결했다.[1]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긴 토마셰비치는 사절을 보내 철저히 복종할 테니 15년간 휴전 협약을 맺자고 청원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계속 진군해 보스니아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보스니아의 수도 보보비츠가 위협당하자, 토마셰비치는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야이체로 도주했다.

토마셰비치는 보보비츠 요새가 적어도 몇 달은 버티리라 여기고, 야이체에 보스니아군을 집결하고 해외에 원조를 청했다. 그러면서 아내 옐레나와 재산을 달마티아로 보냈으며, 계모 카타리나를 라구사로 보냈다. 그러나 보보비츠는 며칠 만에 함락되었고, 토마셰비치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야이체 인근 클류치에서 따라잡혔다. 추격대 지휘관 마흐무드 파샤 안젤로비치는 클류치 요새에 그를 가둬놓고 4일간 포위했다. 그는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지자 절망에 빠졌고, 항복하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안젤로비치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항복했다. 이후 70개가 넘은 마을에 직접 서신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고, 그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은 보스니아를 별로 어렵지 않게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5월 25일 메흐메트 2세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토마셰비치는 안젤로비치가 자신의 안위를 보장하겠다고 서약한 문서를 가져와서 파디샤에게 바쳤다. 그러나 페르티아 태생의 무슬림 물라[2] 알리 알 비스타미는 파디샤는 자신의 하인이 한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는 파트와를 발표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바스타미가 자기가 발표한 파트와의 타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검을 뽑아 메흐메트 2세 앞에서 토마셰비치를 죽였다고 한다. 연대기 작가 베네데토 데이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가 직접 토마셰비치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는 토마셰비치의 가죽을 벗기거나 사격 표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삼촌 라디보이 오스토이치와 조카 트브르트코도 처형되었고, 계모 카타리나의 아들 지그문트와 카타리나는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이스탄불로 끌려갔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왕국은 멸망했고, 보스니아 전역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1] 당대 기록에는 15만 대군이었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2] Mullah: 이슬람 성직자와 모스크 지도자를 부르는 존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