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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ogomilist. 기독교의 중세 교파.2. 역사 및 교리
불가리아 제1제국에서 바오로파를 전도하던 일부 아르메니아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현지인들이 기원이다. 마니교와 바오로파 의 영향을 받아서 12~13세기에 서유럽에서 유행한 카타리파처럼 세상은 육신과 영혼의 대립 및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뤄졌다는 영지주의를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에게는 미카엘과 사타나엘 두 아들이 있는데, 미카엘이 나중에 예수가 되었고 물질 세계는 사타나엘이 만들었다고 여겼으며, 하느님이 만든 영적 세계는 선하지만 사타나엘이 만든 육적 세계는 악하므로 금욕을 통해 영적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는 마니교에 영향을 끼쳤고, 마니교는 다시 바오로파에 영향을 주었으며, 바오로파에서 보고밀파가 생겨났다.
보고밀교에 대한 최초의 자료는 10세기 중반 불가리아 황제 페타르(927-969)에게 보낸 짜리그라드 총대주교 테오필라카트의 서신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총대주교는 신흥 이교는 <<마니교와 혼합된 바오로주의>>라고 말하면서 황제에게 그들을 조사해 처벌할 것을 말하고 있다.
정근재, 보스니아 보고밀교의 기원과 그 성격, 그리고 발전 과정,(슬라브어학보 27권, 2012.6)
정근재, 보스니아 보고밀교의 기원과 그 성격, 그리고 발전 과정,(슬라브어학보 27권, 2012.6)
2.1. 중세 보스니아의 보고밀파 교회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에서 일찍이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극단적인 선악이원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단죄된 교리였기에 보고밀파도 이단으로 지목받았다. 1235년에는 보스니아의 보고밀파를 제거하라는 교황의 지시로 헝가리에서 이른바 보스니아 십자군이 조직되어 1241년까지 전쟁을 벌였다. 헝가리 국왕 언드러시 2세의 차남이자 크로아티아 공작인 칼만[1] 왕자가 지휘하는 십자군은 보스니아를 정복하고 보스니아에 가톨릭 교구를 설치하여 보고밀파는 거의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몽골제국이 헝가리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칼만은 급히 철수하여 몽골군에 맞서야 했고 모히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보스니아에서 헝가리 왕국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보고밀교는 예전 교세를 회복하여 형식적으로만 남은 보스니아 가톨릭 교구와 결합하여 명목상으로는 가톨릭 교구 조직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원주의 원리를 수용하고 보고밀파 교회의 조직으로 기능하는 독자행보를 걷는 보스니아 교회가 탄생한다.보고밀파, 또는 보스니아 교회는 기본적으로 바오로파와 같이 보편교회와 같은 조직, 재산 소유 및 십일조를 부정했다.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로부터 보스니아는 교회가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없는 것은 물론 성체성사와 세례성사같은 핵심적인 교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았다.[2] 하지만 보스니아의 지방 영주의 입장에서는 재산을 축적한 교권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매혹적이었고, 이는 착취에 시달리는 피지배 계층의 평신도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보고밀파에서는 마니교적 요소에서도 보이 듯 성직자에게 엄격한 도덕적, 금욕적 이상의 실천을 강조하는 요소도 있었다. 이러한 "도덕성"은 영주들이나 평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보스니아의 통치자들은 형식상으로나마 정통 그리스도교 신자를 자처했으나 보고밀파적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종종 교황청이나 헝가리 왕국 같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마니교적 오류'를 완전히 배제할 것을 압박받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 보스니아의 통치자들은 대개 '내 속마음은 신실한 가톨릭교도지만 보고밀교와 완전히 척을 졌다가는 당장에 지방영주들이나 평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나라가 결딴 나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고밀교를 용인하는 거고 보스니아에서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도울테니 좀 봐달라.(...)'는 식으로 읍소해서 무마했다. 한편으로는 정통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황에게 권위를 인정 받고 보스니아에 보편교회 조직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지방 영주들을 견제할 수 있었기에 상술한 현실적인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의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톨릭 개종은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주위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교회가 독자적인 조직과 지위는 어쨌든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끊임없이 개종작업을 수행하여 종교 재판관이 파견되어 조사하러 나오기도하고 아예 보스니아에 십자군 원정을 다시 수행하자는 견해가 수시로 터져나왔다. 실제로도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 또한 1361년에 직접 십자군 원정을 나섰으나 실패한 적이 있다. 이런 일들로 보고밀교 신도들 사이에서 가톨릭에 대한 적개감이 고조되어갔다. 지방 영주들 입장에서는 국왕이 교황을 등에 업어 자신들의 자주권을 침해하려 드는 것으로 밖에 안보이고 평민들은 기존에 없던 십일조와 같은 문제로 크게 반발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15세기 무렵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방면으로의 확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보고밀교도들은 카톨릭에 심한 반감을 드러내며 오히려 오스만 제국과 무슬림 쪽에 호감을 보였다. 특히 유력한 보고밀파 대영주 중에는 오스만과 협력하여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를 적대하거나 아예 국왕을 인정하지 않고 오스만 제국과 군사협력을 하는 등 거진 사실상의 내전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1431년, 가톨릭 측에서 보고밀파에 휴전을 제의하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공동대응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보고밀파에서는 대표 참석 조차 거부하면서 가톨릭과 보고밀파 사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져 버렸다.
보스니아의 통치자들은 오스만 위협이 심각해짐에 따라 이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회 및 국가들과의 제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점차 자국 내 보고밀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특히 1443년에 즉위한 스테판 토마시(Stjepan Toams)는 즉위하자마자 보고밀교를 완전히 탈퇴하여 가톨릭으로 회심했고, 교황청에서는 그를 '마니교적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최초의 보스니아 통치자'로 인정해주었다. 이후 탄압 정책이 점점 시행되어 보고밀파 성직자들이 보스니아에서 추방당하거나 보고밀파 신앙을 고수하는 영주들까지도 탄압을 받아 아예 보스니아 국왕이 완고하게 개종을 거부하는 보고밀파 영주 세 명을 로마의 압송시켜 심문을 받게 하는 일도 있었다.(1461년)
보고밀파 신도들은 당연히 이 같은 처사에 극렬히 반발했다. 국왕을 따라서 가톨릭으로 귀의한 영주들도 있었지만, 특히 유력한 지방 대영주들은 국왕이 교황과 서방 가톨릭 국가와 같은 외세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자주권을 탄압한다 여겼고 평민 신도들 역시 가톨릭교도인 왕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튀르크인에 협력했다. 특히 그 자신이 보고밀파인 슈테판 코사차 대공은 아예 자신의 영지인 보스니아 왕국 남부의 훔[3] 지역을 중심으로 스스로 성 사바 공국의 공작, 즉 헤르체그(Herceg)[4]임을 선언하고 아예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들어가버렸고, 보스니아왕국과도 적대했다.(…)
토마시 왕 사후 1461년, 이를 계승한 스테판 토마셰비치 대에는 보고밀파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왕국의 멸망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즉위 3년만인 1463년 보스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토마셰비치는 처형된다.
이후 보고밀파는 보스니아 지역에서 명맥을 잇다가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왕국 정복으로 보스니아 교회가 붕괴하고 17세기 보스니아, 불가리아 등지의 보고밀파 신도들이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완전 소멸하였다.
3. 기타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정교회 이단으로 구현되었다.[1] Kálmán, (1208 – 1241)[2] 교황 요한 22세가 크로아티아의 반(Ban, 총독 내지는 공작)에게 전한 편지.[3] Hum [4] 사바 공국은 이후 오스만에 합병되어 헤르체고비나 주(Sanjak, 산자크)로 재편된다. 즉 오늘날 헤르체고비나라는 지명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5] 물론, 보스니아 왕국에서 평신도들은 개종을 강조 받아 명목상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여전히 보고밀교 신앙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토마시 왕부터가 백성 대부분이 마니교도이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수행이 곤란하다고 교황청에 편지를 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