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f022b 0%, #c70243 20%, #c70243 80%, #7f022b); color: #fff;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후아나 1세 &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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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4E4EE><colcolor=#000> 스페인의 인판테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Infante Carlos María Isidro de España | ||
이름 |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베니토 데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Carlos María Isidro Benito de Borbón y Borbón-Parma) | |
출생 | 1788년 3월 29일 | |
스페인 왕국 아란후에즈 왕궁 | ||
사망 | 1855년 3월 6일 (향년 66세) | |
오스트리아 제국 트리에스테 | ||
배우자 |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프란시스카 (1816년 결혼 / 1834년 사망) | |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1838년 결혼) | ||
자녀 | 루이스, 후안, 페르난도 | |
아버지 | 카를로스 4세 | |
어머니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 |
형제 | 카를로타 호아키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도 7세, 마리아 이사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1. 개요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왕자. 왕위요구자로서 자칭 "카를로스 5세" (Carlos V).2. 생애
형 페르난도 7세가 슬하에 아들이 없고 늘그막에 딸 둘만 겨우 두었기에 살리카법에 따르면 그가 왕위 계승자로 카를로스 5세로 즉위할 수도 있었으나 형인 페르난도 7세가 왕위계승 규정을 바꿔서[1] 딸 이사벨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그녀가 이사벨 2세가 되었다. 당연히 카를로스는 이에 크게 반발하고 내전이 일어났으나 카를로스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카를리스타가 패배하여 이사벨 2세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갔다.카를리스타는 내전이 패배한 후에도 주요 정치세력 중 하나로 남아 왕위를 주장하였으며 이사벨 2세가 9월 혁명으로 퇴위하고 스페인 제1공화국이 들어섰다가 말하고 아마데오 1세가 옹립되었다가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기까지 스페인 왕실의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공화파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는 등 이사벨 2세 일가로부터 왕위를 뺏는 것에 열중하였으나 결국 1936년 카를로스의 친손자 알폰소의 죽음을 끝으로 카를로스의 남계 후손이 끊어졌고, 이 이후로는 살리카법을 따르더라도 이사벨 2세가 친사촌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결혼했기 때문에[2] 분쟁의 여지가 없어졌다.
3. 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인판테 카를로스 (Infante Carlos) |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로스 4세 (Carlos IV) | <colbgcolor=#ffffe4,#323300>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
펠리페 5세 (Felipe V) |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Elisabeth Farnese)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 |||
아우구스트 3세 (Augustus I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Maria Luisa of Parma) | |||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Philip, Duke of Parma) | |||
펠리페 5세 (Felipe V) |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Elisabeth Farnese) | |||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Élisabeth of France) | |||
루이 15세 (Louis XV) | |||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ńska)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카를로스 루이스 (Carlos Luis de Borbon) | 1818년 1월 31일 | 1861년 1월 13일 |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3] |
2남 | 후안 (Juan de Borbon) | 1822년 5월 15일 | 1887년 11월 18일 | 외스터라이히에스테의 마리아 베아트리스[4] 슬하 2남 |
3남 | 페르난도 (Fernando de Borbon) | 1824년 10월 19일 | 1861년 1월 2일 |
3남 페르난도는 죽을 때까지 독신, 장남 카를로스 루이스(자칭 카를로스 6세)는 결혼은 하였으나 자녀가 없어 직계가 없다. 결국 후계는 장남 카를로스 루이스를 거쳐 차남 후안(자칭 후안 3세[5])에게로 넘어갔다. 후안은 공식적으로 스페인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대신 공식적으로 몬티손 백작으로는 인정받았는데 친가 쪽으로 11촌 조카뻘인 프랑스 왕위 요구자 샹보르 백작 앙리(일명 앙리 5세)가 죽자 프랑스 왕위 요구자 자리(장 3세)까지 물려받았다.[6]
- 인판테 카를로스 (1788 ~ 1855): 자칭 카를로스 5세(명목상 재위:1833 ~ 1855)
- 카를로스 루이스 (1818 ~ 1861): 자칭 카를로스 6세(명목상 재위:1855 ~ 1861)
- 후안 (1822 ~ 1887): 자칭 후안 3세(명목상 재위:1861 ~ 1887)이자 장 3세(명목상 재위:1883 ~ 1887)
- 카를로스 (1848 ~ 1909): 자칭 카를로스 7세이자 샤를 11세(명목상 재위:1887 ~ 1909)[7]
- 하이메 (1870 ~ 1931): 자칭 하이메 1세이자 자크 1세(명목상 재위:1909 ~ 1931): 독신.
- 알폰소 카를로스 (1849 ~ 1936): 자칭 알폰소 카를로스 1세이자 샤를 12세(명목상 재위:1931 ~ 1936): 무자녀.
- 페르난도 (1824 ~ 1861): 독신.
[1] 사실 스페인은 이사벨 1세로 잘 알려져 있듯 원래는 딸에게도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압스부르고 왕가의 대가 끊겨 프랑스 출신 보르본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본가인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살리카법까지 스페인에 들여온 것이다. 거기다 그동안은 그런 논의를 할 일 자체가 없었는데 보르본 왕조에서 페르난도 7세 이전까지 그동안의 모든 스페인 왕들은 자식이 있는 왕들은 전부 아들이 있었고 그밖에는 아들이건 딸이건 자식 자체가 없는 왕밖에 없었다.[2] 다만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파울라 왕자는 카를로스 4세의 아들로서 살리카법 상 계승권이 있지만 카를로스보다는 동생이라 1936년 이전까지는 카를로스의 후손보다는 계승서열이 낮았다. 물론 이사벨 2세는 삼촌 카를로스가 왕위를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친사촌과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한 것이기에 부부사이가 나빠 부부 모두 서로 맞바람을 피고 다녔다.[3] 양시칠리아 왕국 프란체스코 1세의 6녀.[4] 모데나 레조 공국 프란체스코 4세의 차녀.[5] 아이러니하게도 이 왕호는 그렇게 대립하던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왕위요구자 시절 명목상의 왕호이기도 했다.[6] 계승서열 상으로서의 추대도 있지만 기존 왕위요구자였던 샹보르 백작 앙리의 부인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사(1817~1886)의 지지를 받은 것이 컸는데 이는 후안이 마리아 테레사의 여동생인 마리아 베아트리스와 결혼했기 때문이다.[7] 이 사람의 장녀 블랑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국 분가 출신 레오폴트 잘바토어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와 결혼해 5남 5녀를 봤다. 1936년 카를로스파의 왕위요구자 알폰소 카를로스가 죽자, 카를로스파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카를로타비스모(Carloctavismo)라는 분파가 이들 사이의 자식을 스페인 국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