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11:29:15

신도형

파일:종교표지_원불교_검은색.png
원불교 대각여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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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형
A 2024. 5. 7 동시 추존
<colbgcolor=#ffc224> 원불교 대각여래위
신도형
辛道亨 | Shin Dohyung
파일:각산 신도형.jpg
출생 <colbgcolor=#fff,#121212>1936년 3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입성리 도골
사망 1973년 2월 1일 (향년 38세)
법호 각산(覺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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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224><colcolor=#221f20> 대각여래위 추존 2024년 5월 7일
본관 영월 신씨
속명 신학규(辛學珪)
출가 1957년 }}}}}}}}}

1. 개요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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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불교 대각여래위.

2. 일생

1936년 음력 3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입성리 도골에서 부친 신대현과 모친 인타원 정인선행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다고 알려졌으며, 3세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 후 아버지와 형제자매의 사랑을 받으며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 기간인 약 3년간 집에 머물며 한문을 습득했으나 당시 건강을 크게 상해 아픔을 겪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다시 영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겨울방학이 되어 전무출신 친누나인 균타원 신제근 종사의 인도로 전라북도 정읍군(現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에 위치한 신태인교당에서 열린 조전권 선생의 교리강습에 참석했다. 교리강습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남성고등학교로 전학하여 더욱 공부에 매진하면서 정산 송규 종법사를 만나고 법문을 받들게 되었다.

남성고 재학 시절 성적도 뛰어나고 교우관계도 좋아 명문대학 진학을 앞두고 ‘무엇이 참다운 삶인가’를 누나와 함께 고민하다가 누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정산 송규 종법사를 만나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선생님들의 반대로 출가에 위기에 처했으나, 한 번 결심한 서원에 확신을 가지고 1957년 초 출가했다.

출가 결심을 전해들은 정산 종사는 ‘큰 도인이 왔다’며 기뻐했으며. 학비 마련이 어려운 것을 알고 당시 목포교당의 은산 김현관 대호법과 그의 아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학비를 기꺼이 후원해주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지병인 결핵이 재발해 휴학하고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휴식과 마음공부를 시작하게 되다. 그는 구도를 위해 병을 잊은 듯 법열에 차 “대소유무는 마음의 나타난 바요, 시비이해는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다. 동하고 정하는 마음, 마음의 하염없는 곳 시방세계가 다 내 집의 소유로구나”라 했다.

그는 다시 거처를 정산 종사가 경전을 편수하느라 머무르던 장수교당으로 거처를 옮겨 치료를 이어가며 공부를 이어갔다. 1963년(원기 48년) 처음으로 총부 예무를 거쳐 그 해 11월 전라남도 완도군 불목리에 위치한 불목교당에 부임해 교화를 이어갔다. 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으로 무지한 지역 농어민을 교육하고 지역계 발전에도 힘을 썼다.

1965년(원기 50년)부터는 순교무로서 전국을 순회를 시작, 1966년(원기 51년)에는 교무과장의 책임을 맡아 각종 훈련과 교리 강습의 강사직을 맡았다. 또 1967년(원기 52년)에는 대산 김대거 종법사를 보좌하여 법무의 책임을 다했고, 1958년(원기 53년)부터는 동산선원에서 후진 양성의 큰일을 담당했다. 특히 동산선원에서 강의하던 자료를 편찬한 교전 해설서인 <교전공부>는 현 시대에도 원불교 교무들의 공부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후 의료사고로 온 몸이 마비되었고 결국 1973년(원기 58년) 2월 1일 사망했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떠나게 되니 대산 김대거 종법사를 비롯한 원불교 전체의 비통함이 컸다. 대산 김대거 종법사는 빈소를 찾아 “큰 사람이 다녀갔다. 갑갑하고 슬프기로 말하면 내가 수만 배 더하다” 하며 다음과 같이 법문했다.

“일원대도 영겁법자인 각산 신도형 영가여 중생제도의 큰 일이 남아있으니 속히 갔다가 속히 오소서”라 했다.

1991년(원기 76년)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기념대회를 맞아 법위를 정식 출가위로 추존하고 종사의 법훈을 추서하기로 결의했다.

2024년(원기 109년) 5월 7일, 대타원 이인의화 종사와 함께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