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14 17:06:22

신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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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동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시게미츠 토카(重光東夏)
본관 영월 신씨[1]
출생 1923년 9월 30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모서리[2] 425번지[3]
사망 1984년 10월 16일[4] (향년 61세)
경상북도 경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41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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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3년 9월 30일 경상북도 경주군(現 경주시) 강동면 모서리 425번지에서 아버지 신덕근(辛德根, 1905 ~ 1957. 1. 19)과 어머니 벽진 이씨(1906 ~ 1993. 2. 22)[5] 사이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 효고현 고베시 하야시다구(林田區) 하마나카초(濱中町)[6]로 건너가 직공으로 근무하던 중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체험하면서 점차 민족의식에 눈떠갔다. 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42년 1월부터 김두갑(金斗甲)·이종철(李鍾哲) 등의 재일 조선인 동포 청년들과 교류하며 이른 바 '고베시 소재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운동'을 전개하며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분석, 비판하고 그룹 구성원들끼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또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소속 전투기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일어났을 때 이에 따른 혼란을 이용해 일제히 봉기한 뒤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들을 모으던 중 1943년 3월 31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0월 4일 고베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하였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84년 10월 16일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경주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가 2011년 3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판서공파(判書公派) 34세 하(夏) 항렬.[2] 영월 신씨 집성촌이다.[3] 1943년 10월 4일 수형인명부.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은 1913년 당시 신동하와 17촌 지간의 족증조(族曾祖) 신양조(辛養祚, 1863 ~ 1940. 11. 25)의 소유였다.[4]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0월 18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이승해(李承海)의 딸이다.[6] 현재는 고베시 나가타구 소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