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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문서

신라장적에서 넘어옴
1. 개요2. 가치3. 발견 경위 및 형태4. 내용5. 작성연대6. 기타7. 같이보기

1. 개요

신라 촌락 문서(新羅村落文書), 민정문서(民政文書) 또는 신라장적(新羅帳籍)은 남북국시대 시기 통일신라의 영역이었던 서원경 지방(현 충청북도 청주시) 4개 마을의 장부 기록으로, 신라 지방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및 각종 행정 정책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황실의 유물 창고인 쇼소인(정창원)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정창원 문서(正倉院文書)라고도 불리며, 같은 쇼소인에서 후일 비슷한 문서가 발견되어서 민정문서를 '제1신라문서', 다른 하나의 문서를 '제2신라문서'로 부르기도 한다. 다만 제2신라문서의 경우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

2. 가치

당시 신라 사회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애석하게도 한반도의 고대사 사료는 오랜 기간 외침을 겪는 과정에서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매우 지엽적인 내용만 밝혀져 있는 것이 현실이며, 특히 신라 당대의 글은 금석문목간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유물 하나하나가 감지덕지일 따름이다. 비약이 아니라 제1-2신라문서가 신라의 지방행정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실상 유일한 1차 사료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고대사 연구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들 사서는 모두 후대인 고려 시대에 편찬된 것이고, 그 사이의 후삼국시대여요전쟁 속에서 많은 원사료들이 손실된 상태에서 편찬되어왔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누락 또는 생략되어 있으며, 다른 사서와 충돌하거나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내용도 있다.

다만 민정문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뚜렷하다. 본래 존재하던 문서의 파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용이 간결하며, 따라서 이것만으로 당시 신라 전체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서원경 4개 마을이 당시 신라 전체에서 부유한 지역일지, 아니면 평균 소득 이하의 지역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워낙 여기저기 파편적인 기록이 많이 있어서 대략 도시의 윤곽이나마 그릴 수 있지만 그 외 지방도시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일단 이 문서에 나오는 서원경은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격인 신라의 소경이므로 일반적인 지방도시보다는 행정구역의 격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원경 '근교'의 4개 마을이므로, 도시 근교의 특별 관리되는 지역일지 그냥 농촌일지조차 알기 어렵다.

3. 발견 경위 및 형태

파일:external/arim.pe.kr/141-1.jpg
1933년 10월, 일본 나라현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에 위치한 일본 황실의 수장고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던 불경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을 수리하던 중에 경질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불경을 감싸고 있던 종이가 민정문서였던 것이다.

일본은 삼국시대 이래 아주 오랫동안 불경을 한국에서 수입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인들이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종이를 포장지로 덧댄 것이다.[2] 종이를 제품의 포장지로 쓰는 것은 동양에서는 흔한 방법이었다[3]. 전근대 사회에서 종이는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으므로 현대사회에서 이면지 사용을 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서류의 용도를 상실한 종이를 이런 식으로 재활용하는 사례는 매우 흔했다. 아마도 시기가 지나서 쓸모가 없어진 민정문서를 가져다가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정문서란 것은 전국의 촌락을 몇 년 주기로 조사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수천장씩 널려 있는 그저 몇 년 지난 보고서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주민센터에서 통계 조사한 이면지로 포장한 것.

사진 촬영과 불경 수리 후에는 보존을 위해 다시 원상태로 경질 속에 넣었기 때문에, 원본은 발견 후 거의 100여년이 지난 현재도 불경 내부에 있다. 즉 문서의 내용을 직접 볼 수 없고 연구도 사진을 보고 할 수밖에 없다. 가로 58㎝, 세로 29.6㎝ 정도의 한지 2매에 서원경에 근접한 군(郡)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현(縣)의 관할 아래 있던[4] 사해점촌(沙害漸村)·살하지촌(薩下知村)·모촌(某村)[5]과 서원경의 직접 관할 아래 있던 모촌의 행정 관련 내용이 해서체로 기재되어 있다. 살하지촌과 모촌의 일부분이 소실되었으며,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가 꽤 있다.

4. 내용

파일:신라 촌락 문서01.jpg
파일:신라 촌락 문서02.jpg
▲ 민정문서의 자원 내용 ▲ 민정문서의 인구 내용

4개 마을 중 사해점촌에 관한 일부내용
이 고을 사해점촌을 조사하니, 마을 크기가 5,725보이다. 공연수(호수)는 합하여 11호가 된다. 마을의 모든 사람의 숫자를 합하면 147명이고, 그 가운데 전부터 계속 살아온 사람과 3년 사이에 태어난 자를 합하면 145명이 된다. 정이 29명(노비 1명 포함), 조자가 7명(노비 1명 포함), 추자가 12명, 소자가 10명, 3년간 태어난 소자가 5인, 제공은 1명이다. 여자의 경우 정녀 42명(노비 5명 포함), 조녀자 9인, 소녀자 8인, 3년간 태어난 소녀자 8명(노비 1명 포함), 제모 2명, 노모 1명이다. 3년간 다른 마을에서 이사온 사람은 2명이다. 가축으로는 말이 25마리가 있고 그 가운데 전부터 있던 것이 22마리, 3년 사이에 보충된 말이 3마리이다. 소는 22마리가 있고 그 가운데 전부터 있던 것이 17마리, 3년 동안 늘어난 소는 5마리이다. 논은 102결 2부 4속이며 관모전이 4결, 내시령답이 4결, 연수유답이 94결 2부 4속이며 이 가운데 촌주가 그 직위로써 받은 논 19결 70부가 포함되어 있다. 밭은 62결 10부 5속이 있다. 뽕나무는 모두 1,004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이다. 잣나무는 모두 120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34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86그루이다. 호두나무는 모두 112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38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74그루이다.[6]
4대 마을 총 사항에 관해서는 민정문서 총 분석 참고.

이러한 내용을 통틀어서 당시 사회의 여러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데,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 인구를 나이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다. 정(丁)·조(助)·추(追)·소자(小)·제(除)·노(老)가 그것.[7] 이러한 6등급의 나이 구분은 당시 당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던 정(丁)·중(中)·소(小)·황(黃)·노(老)의 연령구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당령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서 신라가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국가에 가장 중요한 연령층은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정(丁)이었다. 사학계에서 정의 연령하한은 16세였고, 상한은 57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가구를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구보유의 다소 혹은 재산의 다과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최근 연구 동향의 경우 재산을 기준으로 나누는 견해가 우세하다.
  • 고대의 경제 체제를 노비에 의존하는 체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노비의 수가 적다. 4개 촌을 다 합쳐서 25명으로, 총 인구 442명 중 5.4%. 이처럼 미미한 노비의 비중은 당시의 농업사회에서 노비는 부차적인 존재였음을 말해준다.[8] 그리고 이 노비들도 조선시대 노비와 달리 일반 백성과 똑같이 나라에 세금을 냈다.
  • 4개 촌을 통틀어 남자 204명, 여자 258명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54명 많다. 특히 노동력의 핵심인 정의 연령층에서 여자가 44명이나 많다. 1가구당 1명이 병역의 의무를 져야했던 것을 감안해서 15명 정도가 변방에서 병역의 의무를 하고 있었을 거라고 감안하더라도 여자가 30여 명이나 많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남자의 평균수명이 여자보다 짧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부역이 면제된 연령층으로 추측되는 제와 노 연령층은 4개 마을을 합쳐도 불과 12명이었다. 당시의 짧았던 평균 수명을 확인할 수 있는 일례인 셈. 민정문서에 언급된 바에 의하면 3년 동안 정의 연령층에서만 13명의 사망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얼마나 당시 농민들이 부역에 시달리면서 생활 조건은 고달펐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9]
  • 사망·이동 등의 인구수 변동 내용이 3년의 차이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3년마다 인구조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문서에 표시된 토지의 종류는 연수유답,[10] 관모답,[11] 내시령답,[12] 촌주위답,[13] 마전[14] 등이 존재한다.

5. 작성연대

이 문서의 작성연대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견해가 많다. 695년설 · 755년설 · 815년설 · 875년설 등의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15] 1980~90년대 즈음만 하더라도 이 가운데에서 815년설이 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여겨졌다.

다만 2000년대 이후로는 동국대 윤선태 교수의 연구에 의하여 695년설이 무척 유력해졌다. 특히 이 문서는 일본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던 화엄경론의 포장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화엄경론의 일본 유입시기를 고려해 볼 때에 7세기 즈음의 문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점이 결정타였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사실상 이쪽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차 교육과정 이후에서 교과서에는 755년 작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실 역사 교과서가 학계의 새로운 트렌드보다는 과거에 통용되던 보수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여튼 이와 비슷한 성격의 민정문서가 더 발견되지 않는 한 이견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 연수유전·답 등으로 기록된 토지명을 놓고 신라시대의 토지제도와 토지 관념에 대해서도 꽤 많은 떡밥을 던져주고 있다. 신라통일기 촌락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유일한 자료로서, 당시 신라의 사회정책과 일반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은 이 문서가 가지는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 2009 개정 교육과정까지는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배웠으며, 삼국시대 경제파트의 사실상 1/3 이상을 차지했다. 이유는 간단한 게, 삼국시대 경제 파트는 알려진 게 너무 적기 때문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는 전근대 경제사가 대폭 삭제되면서 아예 빠졌다. 그래서 그냥 뭐 이런 게 있었다 정도로만 간략하게 서술할 뿐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
  • 원문을 보면 동그라미친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이는 숫자가 변동된 부분을 표시한 것이다. 원을 그리고 오른쪽에 변동된 수치를 써 넣었다.

7. 같이보기


[1] 분량이 적고 해독이 어려워 소수의 구결 연구가를 제외하면 역사 전공자들한테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2] 서양에서 자포니즘을 일으킨 원인이 된 우키요에 민화 역시, 당시 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해서 유럽에 가져다 팔던 무역선들이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폐지로 버려지는 우키요에 민화 복사본 폐지로 도자기를 감싸 운반해 갔기 때문이다.[3] 당장 지금도 완충재, 포장지 등의 목적으로 신문지가 소비되고 있음을 생각해보자. 물론 재질이 다르긴 하다.[4] 신라-고려-조선의 촌은 현재의 에 대응되는 행정단위였다.[5] 한자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름이 모촌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어서 모촌이라고 학계에서 부르는 것이다. 이름이 모촌이라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6] 사해점촌 만이 아니라 살하지촌과 모촌이 모두 다 ① 마을의 이름, ② 마을의 크기, ③ 호구 수, ④ 인구수, ⑤ 가축 수, ⑥ 토지, ⑦ 수목, ⑧ 호구의 감소, ⑨ 우마의 감소 ⑩ 수목의 감소 순으로 기록되어있다. 신라시대 문서작성법이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7] 조는 13세에서 15세, 추는 10세에서 12세, 소는 9세 이하, 제는 58세에서 59세, 노는 60세 이상으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8] 북한 학계에서는 이 문서를 근거로 삼국시대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그리고 이 문서에는 노비 비중이 한 지역 인구의 5%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반 평민은 농노적 존재로 편입되었다고 보고 중세의 기점을 이 때로 끌어올렸다. 남한에서 고려부터 중세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대조적.(최근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이제 이런 마르크스 유물론적 시대 구분을 중시하지 않기도 하고.) 다만 해당기록은 어디까지나 신라의 일부지역에만 해당하는것이고 이것을 당시 신라전체로 일반화할수는 없는것이 당장 조선시대때도 시기나 지역별로 노비인구의 차이가 크며 다른 기록인 <신당서>에서는 오히려 진골 귀족이 약 3,000여명의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고 기록 되어있다.[9] 한 1100~1400년 전 얘기일 텐데 산에 호랑이 늑대 표범이 풀세트로 돌아다니고 위생 별로고, 의사도 거의 없었다고 생각하면 장정이라도 죽을 만한 원인은 많다. 당장 충치만 해도 꽤 골치아플 것이다. 설사 의사가 있다한들 이 당시 의료기술 수준을 고려한다면... 동의보감이 고작 4백 년 전에 나왔다.[10] 농민들이 호별로 경작하는 토지로 작성시기를 보아 통일신라 성덕왕 재위 중 주어진 정전으로 추정된다.[11] 관청 경비 조달을 위해 설치한 사실상 관용토지.[12] 내시령(통일 신라시대의 관직이나 정확한 직책은 불명이다.)에게 할당된 관료전.[13] 촌주에게 할당된 토지.[14] 공동 경작지.[15] 60년 간격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육십갑자 때문으로, 단지 을미년에 작성되었다고만 할 뿐 정확한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추가적인 단서가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연대 추정이 어려운 고대 문서나 유물들도 갑자는 적혀있는 경우가 많기에 어느 정도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