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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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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원범.jpg
자 / 호 찬두(贊斗) / 근암(勤菴)
본관 거창 신씨[1]
출생 1908년[2] 2월 6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노노리
(현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3] 175번지[4])
사망 1970년 8월 5일[5] (향년 62세)
전라남도 영암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68호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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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신승남검찰총장은 5촌 당질(堂姪)이다.

2. 생애

1908년 2월 6일 전라남도 영암군 북일시면 노노리(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 175번지)에서 아버지 신성립(愼成立, 1885.10. 26 ~ 1969. 7. 2)[6]과 어머니 함평 이씨(1882 ~ 1969. 4. 30)[7]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6월 덕진면 영보리 영보정(永保亭) 일대에서 김판권(金判權), 최판옥(崔判玉) 등의 지도하에 동료 70여 명과 함께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과 일제의 지주 옹호를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판권은 일찍이 도쿄에 있으면서 1920년대 초부터 신사상에 심취하였고, 1931년 7월 고향인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로 돌아온 뒤로는 최판옥, 곽명수 등과 교유하면서 신사상의 연구와 운동방침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일에 경계가 엄중하여 이를 기념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 음력 5월 1일에 해당하는 같은 해 6월 4일에 시위운동을 하고 농민층을 규합할 것을 계획하였다.

신원범은 이에 동조하여 운암리와 백계리 방면에서 소작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규탄하며 큰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노동가를 크게 외치며 대오를 지어 산을 내려와 운암리 방면을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신원범은 체포되어 영암경찰서에 구류되었으며, 1933년 6월 2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가택침입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해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로 벌금형 50원(납부치 않을 시 50일간 노역장에 유치함)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였으나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가택침입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 벌금형 50원(완납치 않을 시 1원당 1일씩 노역장에 유치함)을 그대로 선고받아 결국 50일간 노역장에 유치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0년 8월 5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별세하였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2년 1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통례공파 31세 범(範) 항렬.[2] 거창신씨인터넷족보 4권 268쪽에는 190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도 이 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신일선교보생명그룹 초대 회장 신용호 형제는 옆 동네인 송내마을 출신이다.[4]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신원범의 아버지 신성립(愼成立, 족보명 신덕성(愼德晟), 1885. 10. 26 ~ 1969. 7. 2)의 소유였다.[5]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4월 25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거창신씨인터넷족보 4권 268~269쪽에는 1968년 2월 5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6] 족보명은 신덕성(愼德晟).[7] 이홍서(李洪緖)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