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7 20:08:16

아르사케스 2세(아르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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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샤쿠니 17대 샤
Արշակ | 아르사케스 2세
제호 한국어 아르사케스 2세
아르메니아어 Արշակ
라틴어 Arsaces II
존호
생몰 년도 미상 ~ 369년 또는 370년
재위 기간 350년 ~ 36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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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샤쿠니 왕조의 17대 .

2. 생애

티그라네스 7세의 아들이다. 350년, 사산 제국샤한샤 샤푸르 2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티그라네스 7세를 생포하고 양눈을 멀게 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로마군의 지원에 힘입어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싸웠고, 샤푸르 2세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티그라네스 7세를 풀어줬다. 티그라네스는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는 로마군 덕분에 왕위에 올랐고, 358년경 콘스탄티우스 2세의 제안으로 근위대장 플라비우스 아블라비우스의 딸 올림피아스를 아내로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사산 왕조의 침략을 두려워했기에, 양국 중 한쪽을 지지하기 보다는 둘다 우호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한편, 그는 재위 초기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동료인 네르세스를 고문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당시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는 서로 전쟁을 벌이길 꺼렸기에, 아르메니아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틈에 군대를 강화하고 경제를 회복하고 토목 공사를 벌이는 한편, 아버지의 통치 기간 때 숙청되었던 이들을 재고용했다. 특히 바삭 마미코니안을 군대 사령관으로 삼아 군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마미코니안 씨족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였다. 또한 아르메니아 군대의 가장 강력한 전투 부대인 중기병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이들의 수를 늘리고 전투력도 강화했다.

353년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에 선임된 네르세스는 남부 아르메니아의 타론 지방에 있는 아쉬티샤트 마을에서 최초의 아르메니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여러 교회 규칙과 다양한 법률이 채택되었는데, 특히 이교 관습에 대한 엄격한 금지 조항이 채택되었다. 가까운 친척의 결혼, 장례식에서 음란한 행위를 벌이는 것, 신체 상해, 일부다처제 및 기타 이교 관습은 철저히 배격되었고, 이를 행한 자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또한 주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아르메니아어로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기로 했다.

이렇듯 아르메니아는 평온을 누리며 국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나, 아르사케스 2세가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한 것에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상황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주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원 토지를 빼앗았다. 또한 귀족들에게 철저한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했다. 그리고 카고빗 지방의 아르샤카반 시를 건설해 상업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는 이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포고문을 발표해 이 도시에 들어가는 자는 세금을 몇년간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주변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밀려들면서, 토지를 운영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358년, 네르세스는 왕에게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귀족들과 음모를 꾸몄다. 그는 왕이 부재한 틈을 타 아르샤카반 시로 쳐들어가서 그곳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3만에서 4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아르사케스는 이 소식을 듣자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네르세스 일당과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고, 결국 왕은 신하의 권리를 존중하고 신하는 왕을 충실히 섬기기로 하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은 뒤 학살을 자행한 신하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359년, 티그라네스 7세와 알려지지 않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그넬이 반란을 꾀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넬의 사촌은 티리다테스는 그넬의 아내 프란쳄(Phrantzem)의 미모에 반해, 그넬을 제거한 후 프란젬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 했다. 그는 아르사케스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고변했다.
"그넬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싶어하고 왕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모든 장로들과 낙사라 가문과 그넬과 같은 아자트 가문은 모두 왕보다 그를 더 선호합니다. 그들은 그넬에게 '임금님, 자신을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아르사케스는 그 말을 믿고 그넬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는 나바사르 축제 즈음에 그넬과 프렌젬을 사하피한으로 유인한 뒤 그넬을 긴급 체포하여 뤼신에서 살해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넬을 죽인 걸 후회했고, 티리다테스가 프란쳄과 결혼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듣고 "네가 그녀를 탐하여 거짓 고변을 하였구나!"라고 비난했다. 티리다테스는 이에 두려워하여 밤에 달아났지만, 바센 지역의 숲에서 추격대에게 사살되었다. 그 후 아르사케스는 프란쳄과 결혼하여 파파스를 낳았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에서 분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간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359년 샤푸르 2세의 10만 대군이 아마다 요새를 포위 공격하여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손실한 끝에 가까스로 함락시키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카이사리아로 진군해 페르시아군이 더이상 침입하는 걸 막았다. 그 후 아르사케스 2세를 불러 아르메니아를 협공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로마의 공세는 서방의 부제 율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중단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토벌하려고 서진하다가 361년 11월 3일 킬리키아에서 사망했다. 이후 단독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363년 동방 원정을 단행하여 크테시폰까지 몰아붙였지만, 샤푸르 2세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도중에 적군이 내던진 창에 배를 찔러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며칠 만에 사망했다.

율리아누스 사후 황위에 오른 요비아누스는 샤푸르 2세에게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샤푸르 2세는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일찍이 로마 제국이 뜯어간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사산 왕조의 영도하에 있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요비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뒤 귀국길에 올랐다가 몇 달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샤푸르 2세는 6만 대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이때 메루즈한 아르츠쿠니, 바한 마미코니안 등 몇몇 아르메니아 장수들이 사산 왕조에 투항했고, 사산 왕조군은 수개월간의 공성 끝에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하고 아르자네, 잉길리네, 므주르, 소펜 및 아킬리세네를 잇따라 함락한 뒤 아르샤쿠니 왕조의 역대 군주 영묘를 파헤치고 유해를 페르시아로 끌고 갔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바삭 마미코니안은 아라랏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과 반역자들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르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성채와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해 사산 왕조군의 만행을 되갚았다. 그 후 사산 왕조는 4년간 아르메니아를 꾸준히 공격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쉽사리 정복하지 못했다. 이에 샤푸르 2세는 아스사케스 2세에게 평화 협약을 논의하자고 제안했고, 강대국인 사산 왕조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점점 더 많은 관료들이 사산 왕조 쪽으로 넘어가는 것에 부담을 느낀 아르사케스 2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367년 그와 바삭 마미코니안이 티즈본에 도착했을 때, 사산 왕조군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실명형에 처해졌고, 바삭 마미코니안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샤푸르 2세는 아르메니아의 주요 도시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을 페르시아로 압송했으며, 기독교를 버리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고 자신에게 협조한 메루즈한 아르츠쿠니와 바한 마미코니안을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삼았다.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 대체되었고, 기독교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조국이 무너지고 두 눈이 멀어버린 것에 심히 절망한 아르사케스는 369년 또는 370년 티그라네스 7세와 자신의 밑에서 관료로 일했던 아르메니아인 환관 드라스타마트가 감옥에 찾아왔을 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앗고 가슴에 꽂아 자살했다. 드라스타마트는 그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아르사케스 2세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은 뒤 자신도 스스로 찔러 죽었다.

아르사케스의 아내 프란쳄과 아들 파파스는 아르토게르사 요새에서 2년간 버텼다. 그러나 369년 요새가 끝내 함락되었고, 프란쳄은 페르시아 궁전으로 끌려간 뒤 적군 병사들에게 윤간당한 후 피살되었다. 반면 파파스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발렌스 황제의 도움으로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반역자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