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2:55

아시가라(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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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코급 중순양함
묘코 나치 아시가라 하구로

파일:ashigara.jpg

1. 개요2. 함생
2.1. 굶주린 늑대2.2. 제 2차 세계대전
2.2.1. 자바 해전2.2.2. 16전대 기함2.2.3. 시마 함대 시절2.2.4. 례호 작전. 그리고 최후
3. 평가4. 참고 링크

1. 개요

足柄. 함종 성능에 관해서는 묘코급 중순양함 참조.
이름은 카나가와 현의 아시가라 산에서 따왔으며 1929년 8월 20일에 취역하였다.

2. 함생

2.1. 굶주린 늑대

1933년에서 1935년까지 묘코급 중순양함 모두가 근대화 개장을 받아 벌지를 추가하고 선체내부에 있던 어뢰발사관들을 모두 상갑판 위에 새로 만든 구조물에 수납하여 거주성을 높였다. 1935년 9월 14일에는 2번 포탑에서 사고가 발생했는데, 영문 위키에서 flashback이라고 한 걸로 봐서는 포격 연습 중 화염이 역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 위키에서는 13명, 영문위키에서는 41명이 사망했다고 나왔다. 왜 이런 기초적인 자료도 어긋나는 걸까?

1937년 영국 해군관함식에 참가하였으며 조지 6세의 대관식 행사에 참석했고 이후 독일 군항을 방문, 아돌프 히틀러의 영접을 받고 각종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영국의 관함식에 참가했을 당시 영국 해군에게 굶주린 늑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영국 기자에게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진정한 군함을 보았다. 지금까지 본 것은 전부 여객선이었다"##[1]는 찬사(?)를 들었다고. 일본군높으신 분들께서는 이 코멘트들을 인용해 자국의 중순양함이 세계 최고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영국식 유머를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였다(...).

이런 오해를 부른 이유는 유럽과 일본에서 늑대를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어서다. 일본에서 늑대는 용맹한 동물로서 가끔은 신격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늑대라는 단어가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화권에서는 늑대를 좋게 보지 않기에 벌어진 오해가 부른 해프닝이다. 영국 군사 관계자들은 "강력하지만 아름답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평했는데, 1만톤급 함체이면서 8인치 주포가 10문이나 되는 영국군의 상식을 벗어난 과다탑재에 주포를 많이 탑재한 만큼 거주성이 심각하게 열악했던 탓이다. 일본어 위키에서는 미녀와 야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예술가 장 콕토 등이 아시가라의 기능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호평을 했다며 열심히 변명했다.

이 여행에서 아시가라의 승조원들은 유명한 문학서적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구매했다. 일본 세관이 검사하지 않기에 마음껏 구매한 모양이다. 이 일화를 기자로부터 전해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폭소.

2.2. 제 2차 세계대전

2.2.1. 자바 해전

전쟁 초기인 1941년 말에는 필리핀 침공에 참가하여 상륙부대를 엄호했고, 남방작전에서는 1942년 3월 1일에 벌어진 2차 자바해 해전에 참가하여 영국 순양함 엑세터와 구축함 3척을 격침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묘코급답게 포탄 낭비가 좀 심하긴 했다. 자세한 내용은 2차 자바해 해전을 서술한 나치(중순양함)자바 해전 항목 참조.

2.2.2. 16전대 기함

이후 아시가라는 제2남파함대(제16전대)의 기함이 되어서 싱가포르 주변에 머물며 동남아시아 각지의 수송·경계·시찰 등의 임무에 종사했다. 당시 격전이 벌어지던 솔로몬 해역과 달리 한가했던 16전대를 어느 승조원은 집보기 부대라며 놀리기도 했다(...)

1943년 12월에는 과달카날에서 용맹을 떨친 중순양함 아오바가 16전대에 들어왔다. 아오바의 별명이 '솔로몬의 늑대'임을 감안하면 늑대 두 마리가 16전대에 배치된 셈이다. 그러나 아시가라의 '굷주린 늑대'가 반조롱으로 붙은 별명이라면, 아오바에게 붙은 '솔로몬의 늑대'는 경외의 의미였다. 늑대 문서에 나오듯이 일본에서는 늑대가 원래 농작물의 신으로 숭상받았다. 일본인들이 아오바에게 붙여준 별명인 만큼, 좋은 의미로서의 늑대라는 뜻이다. 이후 아시가라는 아오바에게 16전대 기함 자리를 넘기고 1944년 2월 25일부터 5함대 21전대에 소속되어 알류산 방면의 경비를 맡았다.

2.2.3. 시마 함대 시절

아시가라가 떠나고 아오바가 기함이 된 후, 16전대는 구르기 시작했다. 우선 인도양 통상파괴전에 투입되었는데, 아시가라가 없어서 빈 자리를 메우려고 7전대의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가 잠시 배속되었다. 그러나 토네는 작전을 모조리 말아먹더니, 작전이 끝나고 16전대의 지휘에서 벗어난 지 사흘 후에 베허호 사건을 일으켜 베허호 선원 80명을 학살했다. 16전대가 맡은 베허호 승조원들은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16전대장 사콘조 나오마사는 이 일로 전후에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와 토네 승조원들이 학살을 저질렀음은 명백했지만, 마유즈미 하루오는 4년만 형을 살고 석방되었고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사콘조 나오마사만 사형당했다. 학살 명령을 내린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가 전쟁 중에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누가 책임자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실제로 손에 피를 묻힌 살인마들이 처벌받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관련 내용은 베허호 사건 문서 참조. 토네 대신 아시가라가 작전에 참가했다면 16전대장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이후 16전대는 혼 작전에 투입되었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시마 함대에 배속되었다. 아시가라도 시마 함대 소속으로 해전에 참가했으므로 16전대와 아시가라의 재회가 이뤄질 수도 있었겠지만, 16전대는 시마 함대 본대와 합류하지 않고 수송선들을 호위하며 레이테 섬 오르목 만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1차 다호작전이며, 16전대는 기함 아오바가 대파되어 회항하고 경순양함 키누와 구축함 우라나미가 피격되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는데도 끝까지 전진한 끝에, 레이테 섬 돌입임무를 성공하고 병력을 양륙시켰지만 돌아오던 중 미군의 공격으로 괴멸되고 만다. 레이테 만 해전에 참가한 부대 중 오자와 함대와 더불어 임무에 성공한 유이한 부대라는 이름을 남긴 채로.

그러나 시마 함대 본대는 전황에 기여하지 못했다. 시마 함대와 함께 하기로 했던 니시무라 함대가 미군 구식 전함들의 공격으로 전멸했기 때문이다. 후소급 전함 2척을 거느린 니시무라 함대가 전멸할 정도라면 중순양함 2척이 주력인 시마 함대로서는 레이테 섬 돌입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시마 함대는 후퇴했지만, 니시무라 함대의 중순양함 모가미가 불타는 것을 보고 침몰했다고 착각했기에 모가미가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모가미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후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시마 함대의 기함인 묘코급 2번함 나치가 모가미를 들이받았고, 모가미는 큰 피해를 입고 도망가다가 결국 침몰했으며 나치 역시 대파되었다. 이후 나치는 16전대 기함이었던 아오바, 구리다 함대 소속 중순양함 쿠마노와 함께 수리에 전념했으나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아오바는 쿠마노와 함께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나치는 피해가 너무 심했기에 같이 가지 못했고 미군의 공습으로 침몰했으며, 쿠마노 역시 미군 잠수함에게 어뢰를 맞고 함수가 날아가서 탈출에 실패했다. 이후 쿠마노는 미군에게 공격받아 격침되었지만, 아오바는 대파되어 6노트밖에 못 내는데도 미군의 공격을 모두 피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아시가라는 시마 함대의 새 기함이 된다. 첨언하자면 묘코급 1번함 묘코는 레이테 만 해전으로 대파되어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가다가 잠수함의 어뢰에 맞고 탈출에 실패한 후 싱가포르에 주저앉았고, 4번함 하구로는 동남아에 남았다.

2.2.4. 례호 작전. 그리고 최후

이후 아시가라의 5함대는 12월 5일 부로 남서 방면 함대에 전속, 기무라 마사토미의 지휘 하에 12월 24일 례호 작전에 참가, B-25의 500파운드 폭탄을 얻어맞았지만 산소어뢰 유폭 없이 성공적으로 진격, 미군의 수송함과 해안가의 물자집적소에 포화를 퍼붓는데 성공한다.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미군 수송함 1척을 격침시켰다고 하며, 이 해전은 일본군 해군 최후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이후 아시가라는 침몰한 구축함 키요시모의 생존자를 구출하는 기함을 엄호했고,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1945년 5월 16일, 아시가라의 자매함 하구로가 페낭 해전에서 침몰했다.

1945년 6월 8일, 아시가라는 방카 해협에서 영국 잠수함의 어뢰 8발 중 5발을 맞았고, 이후 2발의 어뢰를 더 맞고 침몰한다. 853명의 생존자들은 방카 해협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구축함 카미카제가 구조했고, 함장 역시 구출되었다. 배가 금방 침몰하지 않았기에 생존자가 많았다고.

이것으로 묘코급 4척 중 3척이 격침되었고, 1번함 묘코만이 전후생존함이 된다. 그러나 묘코는 전후배상함으로 영국에 넘겨진 후 표적함으로 침몰하게 된다. 묘코급은 단 한 척도 고향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3. 평가

묘코급 중순양함 중에서는 비교적 평온한 함생을 살았다. 자바 해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자매함인 묘코, 나치, 하구로에 비하면 매우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아시가라도 동남아시아에서 나름대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지만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혈전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 최후의 승리인 례호 작전에 참가했지만, 기무라 마사토미가 구축함을 기함으로 삼는 바람에 조연으로 밀린 경향도 있다. 제독님 저 좀 기함으로 삼아주세요 이건 아시가라의 문제가 아니라 기무라 마사토미가 구축함에 더 익숙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굶주린 늑대' 에피소드 때문에 유명세는 꽤 높은 편이며, 격침된 군함치고는 많은 생존자를 남겼다는 점에서 승조원들에게는 좋은 군함이었다.

4. 참고 링크

영문 위키 아시가라.
일본어 위키 아시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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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료 문헌으로 구글에서 "ashigara real warship"으로 검색하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