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 (Aurelius Heracl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268년 |
직위 | 근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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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근위대장. 트라키아 출신 장군으로 전장에서 활약하다가 갈리에누스에게 근위대장으로 발탁되었으나, 268년 갈리에누스를 암살한 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명령으로 자결했다.2. 생애
출신지와 전반적인 생애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히 알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동료 군인 트라야누스 무키아누스가 그를 기리는 비문이 불가리아 '스타라 자고라'[1]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로 보건대 그는 트라키아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씨(노멘)가 아우렐리우스라는 것을 보건대, 카라칼라가 213년 전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령을 반포한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 칙령이 포고될 당시 자유민과 자녀들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사용했기 때문에, 만일 그가 반포 전 태어났다고 해도 213년 이전까지는 속주민 신분의 자유민 출신이다.군 경력을 쌓은 시기는 불명확하나, 그가 이름을 날린 시기는 갈리에누스 때였다. 그는 트라키아 전선에서 게르만족의 침략에 맞서 두각을 드러냈고, 갈리에누스에 의해 근위대장에 선임되었다. 3세기의 위기와 일리리아 출신 기마대장들을 연구한 하우, 미하일로프 등 서구권 로마사 학자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등과 마찬가지로 3세기 다누비우스 강[2] 이남 수비, 방어를 맡던 로마군 장교 집단 중 기마대장이나,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보다 선배격인 사람이다.[3]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267년 팔미라의 오다에나투스가 살해된 뒤 갈리에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팔미라로 쳐들어갔지만 패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외에는 어디에도 확인할 수 없고, 이 역사서의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267~268년 무렵에 발칸 반도에서 고트족과 헤룰리 족의 침략에 맞선 갈리에누스의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아우레올루스가 갈리아 황제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밀라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작전을 취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진압하러 갔다. 갈리에누스는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그는 포위 공격 도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역사가 조시무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로 마르키아누스를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존경해 그와 자신을 어떻게든 연결짓고자 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누스 왕조 황족들의 입김이 들어간, 4세기의 반(半) 위서《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이 음모는 경비대 지휘관인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마르키아누스가 주도했다고 적혀 있다. 어느 내용이 맞는지 몰라도, 핵심 주동자 내지 총대를 메고 갈리에누스와 그 동생 소 발레리아누스를 살해한 사람은 헤라클라이누스였고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등에 직접 칼을 꽃은 암살범이 되지 않았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사관에 따라 저술된 여러 궁중 기록을 참고해 적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새 황제에 즉위한 클라우디우스는 헤라클리아누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그가 전임 황제를 살해한 자에게 정당한 복수를 한 것인지,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해 전임 황제를 암살한 후 자신이 암살에 가담했다는 걸 은폐하기 위해 토사구팽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조나라스가 클라우디우스의 갈리에누스 암살 의혹을 배제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클라우디우스를 존경했다는 걸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 로마 시대 당시에는 '아우구스타 트라이아나'라고 불렸다. 트라키아를 넘어 일리리쿰 전역에서도 상당히 큰 도시였다.[2] 오늘날의 다뉴브 강[3] 프로부스의 경우, 여러 정황상 아버지 달마티우스에 이은 2세대 장교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고대 기록《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아버지가 농부라는 말이 있고, 이 고대 저서가 위서라고 해도 프로부스 아들, 손자의 증언도 적혀 있어 이 역시 달마티우스의 아들 프로부스가 그보다 나이가 많은 헤라클리아누스, 클라우디우스 2세, 퀸틸루스, 아우렐리아누스보다 한 세대가 완전히 내려간 일리리아 기마대장 출신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렵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