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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스 퍼거슨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2. 이스트 스털링셔 FC, 세인트 미렌 FC 감독
국내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부임 이전 퍼거슨의 커리어는 그렇게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퍼거슨은 1974년에 감독 생활을 시작했으나 국내에 해외축구가 널리 퍼진 건 2000년대 중반 즈음이기 때문이다. 해외축구의 선구자들로 대접받는 이들도 빨라야 1990년대 초 즈음에 입문한 경우가 많으니 맨유 이전 퍼거슨의 경력이 유명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퍼거슨의 진정한 진가는 맨유 부임 이전에 드러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퍼거슨은 맨유 이전의 커리어 또한 엄청난 감독이다. 사실 맨유 부임 이전 경력만으로도 퍼거슨은 이미 명장으로 대접받기 충분했고, 또 이미 그렇게 대접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저는 구단의 회장한테 가서 말했습니다. "회장님, 아시다시피 축구 경기를 하려면 11명이 필요합니다." 회장은 환상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는 상황이 나쁠수록 더 줄담배를 피웠거든요.
알렉스 퍼거슨, 출처
신인 감독 퍼거슨은 이 팀이 정상적으로 시즌을 치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선 100파운드에 그의 감독 커리어 첫 영입으로 골키퍼를 영입했고, 2주 사이에 2000파운드(한화 약 330만 원 가량)를 써 5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와 엄격한 규율로 선수단을 장악하고 엉망이었던 구단을 뜯어고쳤다. 당시 퍼거슨이 얼마나 매섭게 나왔는지, 이스트 스털링셔의 공격수였던 바비 맥컬리는 훗날 "그 전까지 누구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는데 퍼거슨은 처음부터 무서운 놈이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훈련해야 했고, 그는 사납고 팔을 휘두르고 이것저것 걷어차는 사람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심지어 퍼거슨은 자신도 축구화를 신고 자신이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강도의 훈련을 함께 소화했다. 알렉스 퍼거슨, 출처
동기부여 방법도 다양했다. 퍼거슨은 관중석에 빈 자리가 선수들의 의욕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하고 직접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경기를 홍보하고 다녔다.[1] 폴커크와의 경기를 앞두고 마을에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던 '폴커크 헤럴드'를 들먹이며 지역 언론이 폴커크만 편애한다고 연설했고 경기에서 2:0으로 이긴 일화도 있다. 시즌을 치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이스트 스털링셔의 상황이 급격히 개선되며 좋은 성적을 내자, 초짜 감독의 재능은 다른 구단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1974년, 32살의 나이로 세인트 미렌에 부임하다 |
감독을 시작했을 때 내가 가졌던 자산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나는 학생 시절에 팀을 선택할 때조차도 내 결정에 대해 불안감을 갖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런 나에게 선수 시절 나를 지도한 감독 중 한 명인 윌리 커닝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거 알아? 넌 진짜 밥맛 없는 놈이다."
퍼거슨 본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49p
이후 40년의 세월 동안 퍼거슨이 명장으로 군림하도록 만든 과감함과 선수단 장악 능력, 선수를 보는 날카로운 눈 등 감독직에 대한 천부적 재능은 감독 생활 초기부터 두드러졌다. 시즌 도중에 부임했음에도 퍼거슨은 시작과 동시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주장 리드를 내쫓았고, 팀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켰다. 특히 선수들이 게으르거나 술을 마시면 곧바로 엄벌이 날아왔다. 거기에 빌리 스타크[4], 피터 위어[5], 프랭크 맥가비[6], 토니 피츠패트릭 등 팀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 1군으로 끌어왔다. 막 1군에 올라온 선수들의 열정과 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는 기존 선수들의 긴장은 팀의 분위기를 바꾸었다.퍼거슨 본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49p
가장 파격적이었던 것은 피츠패트릭의 주장 임명이었다. 유소년 팀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7살의 피츠패트릭을 눈여겨 본 퍼거슨은 그를 주전으로 쓰더니 돌연 주장 완장을 채워버렸다.[7] 이는 누구의 자리도 안전하지 않으며 퍼거슨 자신이 원하면 그 어떤 파격적인 결정도 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퍼거슨이 피츠패트릭에게서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실로 날카로웠다. 피츠패트릭은 주장직뿐만 아니라 훗날 세인트 미렌의 감독, 심지어는 CEO까지 역임하게 될 타고난 리더였다. 2022년, CEO직에서 은퇴하는 피츠패트릭를 축하해주는 퍼거슨[8] 피츠패트릭은 주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퍼거슨의 라커룸 장악을 도왔다.
기존 주장의 추방, 32살의 어린 감독에 대한 반항이 예상된 상황에서의 엄격한 규율 적용, 유소년 선수들의 잇따른 1군 콜업, 17살 선수의 주장 임명 등 도박수들로 보였던 파격적 선택들이 연달아 적중했다. 세인트 미렌은 퍼거슨 시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갔고, 결국 퍼거슨은 팀을 반등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순위가 몇 개 올라가거나 경기력이 좀 좋아지는 수준의 반등이 아니었다. 부임 당시 3부 리그 하위권이었던 세인트 미렌을 퍼거슨은 중도 부임 시즌인 1974-75 시즌에 2부 리그로 곧장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라커룸에서 세인트 미렌의 1부 리그 승격을 축하하고 있는 퍼거슨 |
퍼거슨 감독 커리어 첫 1부 리그 시즌이었던 1976-77 시즌, 세인트 미렌은 10개 팀 중 8위를 기록하며 강등당하지 않고 1부 리그에 잔류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또 다시 예상을 뒤집은 이변이었다. 하지만 퍼거슨은 시즌 직후 클럽과의 마찰 과정에서의 복잡한 문제[9]로 세인트 미렌에서 경질되었고, 몇 개월 뒤 애버딘 FC 감독 부임을 결정하였다. 이는 퍼거슨의 감독 경력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경질이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10]
당시 주장이었던 피츠패트릭이 2022년 회상한 퍼거슨과 세인트 미렌 |
3. 애버딘 FC 감독
애버딘 FC는 나름대로 매년 리그에서 4위권 정도에 위치하는 스코틀랜드의 유명 구단이기는 했으나[11] 1955년 우승이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은 그때도 레인저스 FC와 셀틱 FC의 양강 체제로 두 팀이 우승컵을 나눠갖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면은 10~20년도 아니고 1890년 창설 이래로 쭉 지속되어 왔다. 퍼거슨은 늘상 올드 펌이 다 해먹던 스코틀랜드 축구판에 혁명과도 같은 강세를 보여줬기에 아직까지도 스코틀랜드 축구팬들에게 회자된다.[12] 단적으로 퍼거슨의 애버딘 이후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에서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우승한 적은 없다. 여기에 유럽 대항전 성적까지 더해지며 퍼거슨이 가장 위대했던 시절로 애버딘 시절을 꼽는 팬들도 있는 편이다.퍼거슨은 여전히 36세의 젊다 못해 어린 감독이었고, 당연히 퍼거슨과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도 있었다. 이스트 스털링셔나 세인트 미렌은 부임 당시 3부 리그 팀이었지만 애버딘은 1부 리그 팀이었고, 퍼거슨은 라커룸 장악에 애를 써야 했다. 때문에 첫 시즌은 쉽지만은 않았다. 올드 펌의 양강을 무너트리길 꿈꿨던 퍼거슨은 라인을 올리고 강팀의 축구를 하고 싶어했지만, 이를 반대한 윌리 밀러, 조 하퍼를 비롯한 고참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퍼거슨을 저격하며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1978-79 시즌, 애버딘은 리그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컵 대회들은 스코티시컵은 준결승, 리그컵은 결승까지 가며 우승컵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이 시즌에 퍼거슨은 팀을 정비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선수들을 휘어잡으며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퍼거슨은 이를 위해 일부러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키거나, 하프타임에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스코틀랜드 언론들이 글래스고에 연고지를 둔 셀틱과 레인저스에게만 호의적이라고 연설하며 지역감정까지 자극했다.[14] 결국 퍼거슨은 라커룸을 확실히 장악하기 시작했고 애버딘 선수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퍼거슨 부임 후 두 번째 시즌인 1979-80 시즌, 애버딘은 더 빠른 템포, 높은 라인을 가진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애버딘은 퍼거슨의 의도대로 강팀이 되었고 시즌 말까지 2위에 위치했다. 다만 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애버딘은 4월까지 셀틱과 승점 7점 차로 2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기 때문에 이는 지금으로 치면 승점 10점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버딘은 시즌 막판 연승을 질주했고,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5:0으로 승리하고 셀틱이 0:0 무승부를 거두며 극적인 역전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올드 펌 이외의 구단이 스코틀랜드 1부 리그 우승을 한 것은 15년 만이었고, 애버딘이 25년 만에 들어올린 두 번째 리그 우승 트로피였다. 셀틱의 1/10도 안 되는 금액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올드 펌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1980년, 첫 리그 우승을 알리는 종료 휘슬 직후[15] |
다음 시즌이었던 1980-81 시즌은 팀에 부상 악재가 덮치며 무관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레인저스를 밀어내고 리그 2위를 차지하며 애버딘은 완전한 강팀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이후 애버딘은 승승장구했고 1981-82 시즌부터 3년 연속 컵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8시즌 간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스코틀랜드의 대표 강호로 자리잡았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양강은 무너졌고 이젠 퍼거슨의 애버딘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 시기가 스코틀랜드 리그의 양강 체제가 마지막으로 붕괴된 시기이자 마지막 황금기였다. 1985년 애버딘 이후 현재까지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리그를 우승한 사례는 없다.
1983년, 축제 분위기가 된 애버딘 시내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다 |
우리가 만난 것은 축구 팀이 아니었다. 그건 불굴의 투혼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당시 퍼거슨은 UEFA 클럽 랭킹 100위대의 클럽이었던 애버딘을 단 8년 만에 UEFA 클럽 랭킹 6위로 끌어올렸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애버딘의 UEFA 클럽 랭킹)
1978년 - 106위 ← 애버딘 감독 부임
1979년 - 116위
1980년 - 97위
1981년 - 78위
1982년 - 45위
1983년 - 20위
1984년 - 16위
1985년 - 13위
1986년 - 6위 ← 이때를 끝으로 맨유 감독 부임
2023년 기준 UEFA 클럽 랭킹 116위는 헝가리 리그의 몰 비디, 106위는 토리노 FC이며 6위는 파리 생제르맹 FC이다. 100위권 클럽이 6위까지 올라가는 게 어떤 일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1978년 - 106위 ← 애버딘 감독 부임
1979년 - 116위
1980년 - 97위
1981년 - 78위
1982년 - 45위
1983년 - 20위
1984년 - 16위
1985년 - 13위
1986년 - 6위 ← 이때를 끝으로 맨유 감독 부임
정말 믿기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모든 스코틀랜드 시민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지 않았냐구요? 그가 사람일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내 수사국에 마법사라는 고소가 수십 건 들어왔고, 실제로 그를 체포해 조사하기도 했답니다.
애버딘 FC 박물관
애버딘 FC 박물관
애버딘의 홈 구장에 있는 퍼거슨의 동상[18] |
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5년, 퍼거슨은 애버딘 감독직과 함께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직도 수행하고 있었다. 웨일스와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지역예선 경기에 스코틀랜드의 월드컵 플레이오프 진출이 달려있던 상황에서 조크 스타인 감독과 퍼거슨은 엄청나게 긴장했다.[21] 이 경기에서 비긴 스코틀랜드는 웨일스와 전적은 같았지만 골득실에서 앞서 간신히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조크 스타인은 경기 종료 휫슬이 불리고 심장마비로 사망했고[22] 졸지에 퍼거슨은 갑작스레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됐다.조크 스타인과 알렉스 퍼거슨 |
그러나 악재는 계속되었다. 스타인 체제부터 대표팀에 소극적이었던 앨런 한센[25]이 갑자기 퍼거슨과의 관계 악화[26]를 이유로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고, 이어 리버풀의 전설이자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 케니 달글리시가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아웃,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월드컵 직전에 거대한 전력 손실과 계획 수정이 불가피했다. 결국 본선에서 스코틀랜드는 서독, 덴마크, 우루과이와 한 조가 되었는데 서독과 덴마크에게 패하고 우루과이와 비겨 승점 1점 1무 2패 조 4위 월드컵 19위로 탈락했다. 물론 스코틀랜드는 24강 본선도 간신히 올라온 전력이었고, 모시던 은사의 갑작스런 사망과 충격, 클럽팀 감독 겸직, 짧았던 월드컵 준비 기간, 주요 선수 이탈 등 상황을 고려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일단 혼란스런 상황에서 당초 스코틀랜드가 목표하던 월드컵 본선까지는 보내놨다는 점은 성과였다.
퍼거슨은 월드컵이 끝난 1986년 6월 중순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그 해 여름 퍼거슨은 애버딘 또한 떠날 거라는 징후를 보이면서 토트넘 홋스퍼 FC, 아스날 FC 등 잉글랜드 클럽으로의 이적설에 휩싸였다.[27] 그리고 1986년 11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오퍼를 받아들이며 스코틀랜드를 떠나게 된다.
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감독
자세한 내용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퍼거슨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
[1] 실제로 관중이 느는 등 효과는 있었다고 한다.[2] 이스트 스털링셔의 선수들에게 자신이 떠난다고 말했을 때 윙어였던 톰 도널리가 "이 개자식아!(You bastard!)"라고 소리쳤다고 한다.[3] 손등을 뒤로 보이며 브이를 만드는 사인. 영국의 대표적인 손가락 욕이다.[4] 퍼거슨의 부임 당시 유소년 팀에 있던 선수로, 미드필더로 대성해 세인트 미렌에서 255경기 60골을 기록했다. 훗날 퍼거슨을 따라 애버딘 FC로 이적해 애버딘의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우승까지 함께했다.[5] 포지션은 윙어로, 빌리 스타크와 같이 훗날 애버딘 FC까지 퍼거슨을 따라갔다.[6] 포지션은 공격수. 퍼거슨의 부임 당시 18세였다. 이후 세인트 미렌의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132경기 52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7] 피츠패트릭은 어릴 적부터 키가 작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고, 그가 성인 팀으로 올라온 직후 퍼거슨이 "이번 주 화요일에 누가 남고 떠날지 발표하겠다."라고 말해 자신이 방출되리라 예상하고 체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화요일에 퍼거슨은 사무실로 선수들을 한 명씩 불러냈고, 가장 먼저 불려간 피츠패트릭에게 퍼거슨은 대뜸 "몇 주 동안 널 지켜봤다. 넌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회상했다.[8] 17살에 주장이 되어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세인트 미렌의 감독, CEO까지 역임하며 구단의 레전드가 됐다. 2022년 66세의 나이로 구단과의 49년 간의 동행을 마치고 CEO직에서 은퇴했다. 이때 퍼거슨도 영상 인터뷰로 경의를 표한다며 축하해줬다.[9] 당시에는 선수들에게 임금을 무단 지불하는 등 계약 위반이 경질 이유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퍼거슨을 경질했던 세인트 미렌 경영진은 2008년 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1977년 애버딘과의 접촉 과정에서 퍼거슨이 최소 한 명의 선수에게 자신과 함께 애버딘으로 가자고 한 것이 경질 사유였다고 밝혔다. 문제는 퍼거슨은 고민하다가 이 오퍼를 거절했고 세인트 미렌에 남기를 바랬다는 것인데, 해당 경영진은 시즌 도중에 퍼거슨에게 접근한 걸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애버딘을 비판하면서도 경질 결정은 후회한다고 밝혔다. 퍼거슨은 세인트 미렌에서 경질된 후 부당 해고로 복직 소송까지 검토했으나 애버딘이 본인에게 다시 접근했고, 이번에는 오퍼를 수락했다.[10] 이후 세인트 미렌은 퍼거슨이 만들어놓은 평균 연령 20세의 팀이 전성기 나이대에 들어가며 10년 정도 황금기를 보냈다. 퍼거슨의 경질 두 시즌 후인 1978-79 시즌에 기록한 1부 리그 3위가 현재까지 세인트 미렌의 리그 최고 성적이다. 참고로 그 시즌 우승팀은 퍼거슨의 애버딘이었다. 이후 황금 세대가 나이가 들어가며 1980년대 후반에는 강등을 두고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결국 몰락했던 팀이 퍼거슨을 기점으로 현재까지도 1부 리그 팀으로 꾸준히 자리잡는데 성공했다.[11] 다만 위에서도 설명됐듯이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는 1부 리그에 10개 팀이 있었으므로 4위면 중상위권 정도에 해당한다.[12] 현재까지도 올드 펌 두 팀이 다 해먹으며 리그가 정체된 양상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 양강 체제를 무너트렸던 퍼거슨이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올드 팬들은 퍼거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부임하면서 다시 양강 체제가 복구된 것을 스코틀랜드 리그가 죽어버린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13] 퍼거슨을 다룬 다큐멘터리 'Never Give in'(2021)에서 언급된다.[14] 참고로 퍼거슨은 글래스고 출신인데,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어찌나 불같았는지 당시 애버딘의 수비수였던 스튜어트 케네디는 퍼거슨이 나중에 맨유에서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명을 얻자 인터뷰에서 "헤어 드라이어? 그놈 애버딘 초기에는 헤어 드라이어가 아니라 그냥 용광로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5] 훗날 이 장면을 토대로 애버딘의 홈구장에 퍼거슨 동상이 건립된다.[16] 현 UEFA 챔피언스 리그[17] UEFA 컵위너스컵의 이전 명칭으로, 유럽 각국 컵대회 우승팀들이 그 중 최강자을 가리는 대회였다. 위상은 현 UEFA 챔피언스 리그인 유러피언컵이 더 높았지만, 당시는 리그 우승팀은 유러피언컵으로, 컵대회 우승팀은 UEFA 컵위너스컵으로 가는 시스템이라 상위, 하위 리그가 뚜렷히 나뉘는 지금의 챔피언스 리그와 UEFA 유로파 리그의 관계와는 달리 우승 난이도는 비슷했다.[18] 맨유에 이어 애버딘도 구장에 퍼거슨 동상을 만들며 퍼거슨은 살아 생전에 이미 두 경기장에 동상이 세워진 인물이 됐다.[19] 이때 토트넘의 제의를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20] 마틴 에드워즈는 1986년 이후로 맨유의 감독을 선임한 최후의 맨유 경영진이었으나, 퍼거슨의 은퇴로 데이비드 모예스가 선임되며 기록이 중단되었다.[21] 퍼거슨의 아내 캐시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중 카메라에 잡힌 남편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퍼거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곧 심장 발작이라도 일으킬 사람처럼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퍼거슨은 그랬던 자신보다도 조크 스타인이 휠씬 긴장했다고 회상했다. 손을 떨고 식은 땀을 흘리며 경기를 지켜봤다고.[22] 조크 스타인은 셀틱 FC에서 유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이라는 엄청난 실적을 남긴 감독으로, 축구 전문지에서 매기는 명장 순위에서도 높은 편에 드는 뛰어난 인물이다. 퍼거슨도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사제 관계로 묘사될 정도로 그를 따랐다.[23] 퍼거슨이 감독의 길에 들어선 것도, 세인트미렌의 정식 감독직 제의를 수락한 것도 그 뒤에는 조크 스타인의 조언이 있었다. 애버딘의 감독이었음에도 대표팀 수석코치직을 수락한 것도 평소 스승으로 모셔왔던 조크 스타인이 감독으로서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퍼거슨은 맨유에 부임할 때도 조크 스타인이 생전에 자신에게 맨유 감독직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며 자신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24] 당시 플레이오프에는 4팀이 올라왔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스코틀랜드로서는 네덜란드를 피하고 호주를 만난 건 대진운이 따라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25] 문서를 계속 읽다 보면 알겠지만 훗날 은퇴 후 출연한 방송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중심으로 맨유를 리빌딩하던 퍼거슨에 대해 "꼬맹이들을 데리고 우승할 수는 없다."라고 일갈했다. 나름 타당한 비판이었지만 문제는 그 꼬맹이들이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필 네빌,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였다는 것. 결국 앨런 한센의 발언은 영상으로 박제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26] 당시 한센은 리버풀 FC 선수였는데, 리버풀의 동료 선수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고 심지어 차출 거부까지 했었다. 이는 퍼거슨 때만이 아닌 그 이전 스타인 감독 시절부터 그랬다고 한다.[27] 2009년 BBC 보도에 따르면 아스날은 확실히 감독직을 오퍼했었고, 수락 직전까지 갔으나 퍼거슨이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