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08:58:03

알리 샤리아티

1. 개요2. 사상3. 사망

1. 개요


이란이슬람주의 혁명가이자 이슬람 사회주의 사상가. 시아파 신도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시아파 12이맘파 신학 사이의 통합을 추구했는데 이는 하산 알 반나 같은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이 비공식적으로 레닌주의의 교리를 흡수한 것과 차이가 있었다.

2. 사상

이슬람을 투쟁의 종교라고 해석한 종래의 시아파 전통 신학은 "검은 시아파" 혹은 "사파비 시아파"[1] 자신의 이슬람 사회주의 이념은 "적색 시아파"라고 부르며 구분하였으며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이슬람적 가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세속주의 무신론 계열의 공산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분지었는데 남미의 이른바 해방신학과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의 독창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타일의 신학, 철학은 이란 대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란의 세속주의 지식인들 중에는 이란 시골의 율법학자들보고 "문맹 농민들을 대상으로 혹세무민하는 기생충"이라고 대놓고 디스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는데[2] 이러한 유물론적 주장은 당시 이란인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너무 급진적이었고 대안으로 그의 사상이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재교육받아 이슬람 신정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이슬람주의 철학을 전파했는데 이는 이란의 진보적 대학생들이 이란 혁명 당시 보수 율법학자였던 호메이니의 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특히 당시 이란 사회에 퍼져 있던 반영 감정을 공유했으며 서구식 민주주의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3. 사망

그의 사상을 이어받았던 이란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이란 혁명의 성공 이후 호메이니 정권에 의해 대부분 숙청당했으나 이란 혁명이 마무리되기 전에 팔라비 왕조에 의해 영국으로 추방당해 그곳에서 사망한 그는[3] 호메이니 정권에서 어느정도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 이란으로 옮겨진 그의 유해는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시아파 성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1] 이란이 시아파 주류 국가가 된 것은 근세의 튀르크계 사파비 제국 때문이다. 다만 사파비야 교단은 신비주의와 구세주 신앙이 강해서 사파비 왕조가 무장 집단에서 제국으로 구색을 갖추어가는 과정 와중에 12이맘파 자파리파에 밀려 도태되었다.[2] 당시 이란의 상황은 시골의 보수 율법학자들이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를 하면서(이슬람에서는 고리대를 강력 금지하는데도 율법 학자들이 연이율 30% 이상의 고리대로 소득을 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문맹 퇴치 운동을 반대하던 상황이라 이런 극단적인 주장이 나올 만 했다.[3] 사인은 암살은 아니고 심장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