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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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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과 성장3. 오강가의 탄생4. 세계 대전5. 저서6. 노벨평화상 수상7.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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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출생과 성장

프랑스독일 접경 지역인 알자스-로렌의 카이저스베르크(Kaysersberg)에서 태어났다.[1] 덕분에 독일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2]

위인전의 영향 때문에 부유한 목사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Aus meinem Leben und Denken)》(1931)에 따르면 사실 부친인 루이 테오필 슈바이처는 오히려 가톨릭이 초강세인 알자스-로렌에서 소수인 루터교회 목사였고, 부양 가족이 많아 살림이 빠듯했다고 한다. 다만, 목사 집안이었던 만큼 신도들이 낸 헌금이 있긴 해서 어쩌다 가끔 고기 수프를 먹을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부잣집 아들이라는 오해를 사긴 했다. 초등학생 시절에 자기와 대판 싸웠다가 개박살이 난 동네 일진 하나가 이 오해를 가지고 정신승리를 하자 그것 때문에 심란해진 탓에 한동안은 모처럼 겨우 먹게 된 고기를 마다하기도 했다고 한다.[3] 어쨌든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고등학교도 아버지가 아닌 자식이 없는 작은할아버지 내외의 돌봄 덕에 다녔다.[4]

어릴 때 친구 하인리히와 들을 잡으러 갔을 때 갑자기 떠오른 구절로 인해 새들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위인전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후대에 가봉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와중에 현지의 생태 보호에 앞장선 것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그는 다소 한성질하는 성격이 있어서, 상술한 동네 일진을 때려눕힌 일화도 있고, 카드놀이를 하다가 열받아서 같이 놀던 여동생을 두들겨팬 전적도 있었다. 이 부분은 성인이 되어서도 유해졌다뿐이지 달라지진 않아서, 뒷날 가봉에서 의료봉사를 할 때도 병원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게으름을 피우면 체격이 듬직한 현지인 간호사들을 감독으로 투입해서 찍어누르거나 본인이 직접 호통을 치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다소 개초딩스런 부분이었겠지만 이런 성격이 뒷날 아프리카의 험지에서 활동할 때는 큰 도움이 된 셈이다.[5]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의 카이저 빌헬름 대학교에서 루터 신학을 전공했다. 24살 때이던 1899년 임마누엘 칸트 연구로 철학 박사, 이듬해 복음서 연구로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의사로서의 업적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20세기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인 《예수의 생애 연구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1906)와 《사도 바울로의 신비(Die Mystik des Apostels Paulus)》(1931)는 오늘날 예수 세미나에서 고전에 속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슈바이처는 기독교의 본질적 사상인 예수의 대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강세였기 때문에 신학자가 이런 주장도 할 수 있었다. 1903년부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학부 강사로 근무하며 성 니콜라 루터교회 부목사로서의 목회도 병행했다.

신학 연구 및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한 연구, 그리고 오르간 연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6] 특히 바흐에 관한 저서를 발표하는가 하면, 파이프 오르간의 제작과 연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샤를마리 비도르(Charles-Marie Widor)와 인맥이 있는데, 사실 아프리카 봉사를 떠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기부뿐만 아니라 연주회를 열어 모으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경력과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겸 전문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훗날 아프리카에도 피아노[7]를 가져가고, 포로 수용소에서도 판자를 건반 삼아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점차 사라져가는 유럽 각지의 구형 파이프 오르간의 보존에도 열심이어서, 나중에는 "저 양반은 아프리카에서는 늙은 흑인들을 살리더니, 유럽에서는 낡은 파이프 오르간을 살리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신학 전공이지만, 19세 이상은 군복무를 하도록 했던 독일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한 사람이다. 어린이 그림 위인 전기 슈바이처(조풍연 지음, 김동명 그림, 계몽사) 참조. 자서전인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중대장의 배려로 신학교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신학교 졸업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야외훈련 중에 배낭에 신약성서를 넣어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8]

슈바이처의 신학에서의 업적은 상당히 혁명적인 것으로 그가 아프리카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도 이에 대한 엄청난 반발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3. 오강가의 탄생

하지만 그는 21살의 대학생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이 있었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그 이후에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을 가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의학과정에 입학하여 7년 동안 공부를 해서 37세인 1912년에 의학 박사가 되었다. 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의사라는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그의 통보에 깜짝 놀란 가족들과 지인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지만,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1898년에 귄스바흐에서 있었던 개인적 결단 이래로 충분히 심사숙고한 결과라며 차분하게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부인도 뜻을 같이 하여 슈바이처를 돕기 위해 간호사 면허를 땄다. 재미있는 게 의학 박사 논문의 제목은 〈예수에 대한 정신의학적 연구(Die psychiatrische Beurteilung Jesu)〉(1913)였다.

1913년 부인과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Lambaréné, 현 가봉 무아얭오고웨주 랑바레네)로 건너가 현지 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에 나섰다.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해서 당시 원주민들은 슈바이처를 '오강가(Oganga, 마법사)'로 칭송했다고 한다.[9] 당시 원주민들은 질병이나 원인을 모두 벌레나 악마의 짓으로 여겼다고 한다. 치료받은 한 흑인은 "오강가는 사람을 일단 죽이더니 고치고 나서 다시 살려놓는 거야"라며 이는 마취 받고 수술받았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많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곳에 본래 거주하고 있는 흑인 원주민들을 백인에 비해서 저급한 인간, 뒤떨어지는 '인종'으로 멸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독교인들이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슈바이처에게 안내를 한 가이드가 폐허가 된 도시를 지나가면서 소개했는데 "10년전만 해도 번창한 도시"라고 대답했고 이에 슈바이처는 "왜 저런 꼴이 되었는가?"하고 묻자 "백인들이 가져다 판 술 덕분에 저렇게 됐다"며 비웃었다. 이는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네 이웃'이 결단코 아니었던 셈이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신학 연구서를 집필하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그런 위선적인 유럽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믿고 따르는 개신교의 가르침에 누구보다 충실하고자 했던 셈이다.

4.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억류되었다. 랑바레네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독일 국적인 그는 자연스럽게 적국 국민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의 사상인 생명 외경의 윤리는 이 시기에 다듬어지게 된다. '인간이란 살려고 하는 생명, 또한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실천 윤리학의 창안이 그의 목표였다고 한다. 1917년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어머니가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깔려 사망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죽음도 의료 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강연과 연주회 및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출판으로 다시금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병원 재건과 운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열을 쏟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알자스가 프랑스로 편입되어 국적을 프랑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자[10] 그는 랑바레네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꾼다.

제2차 세계 대전냉전 때도 고생했지만 1차 세계대전 때와 달리 그의 의사로서의 명성이 높아진 데다 프랑스 국적까지 취득했으므로 이번에는 그의 병원은 무사했다. 이후 가봉이 프랑스에게서 독립한 후에도 다른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현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봉 정부에게서 훈장도 받고 병원 운영에 지장이 없었다.

1924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1928년에는 괴테상을 수상하였다. 이때부터는 슈바이처를 존경하는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 수의사들도 아프리카로 건너와 병원 규모를 더 늘릴 수 있었다.

5. 저서

의사로서 유명하지만 본업은 신학 박사로서 강단에 선 학자였고 동시에 프로 음악가이자 파이프오르간 전문가였다. 각각의 분야에 책을 냈고 오르간 연주 앨범도 시중에 나와 있다.

"아프리카 봉사에 한정한" 대표 저서로는 '나의 생애와 사상'[11][12],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랑바레네 통신' 등이 있다. 읽어보면 꽤 재미있고 솔직한 부분이 많다. 성장기와 병원 운영과 수술 이야기만 있지는 않고 다양한 주제로 쓴 단편이 때로는 몇 쪽, 때로는 한 챕터를 할애해 들어 있다.

책에 따라 신학적인 주제, 음악적인 주제를 다루기도 하고, 현지에 와서 다양한 백인과 흑인을 만나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적어 놓았다. 적도 아프리카에서 지성인으로서 살아남기, 이상적인 선교 사업, 재정 문제, 아프리카 의료의 현실, 열강의 식민지 정부 운영 문제, 식민지의 수출과 수입, 목재 산업, 강제 노동, 흑인 사회 비평, 아프리카의 자연, 병원 반경 약 2백 km 지역에 사는 부족들과 그들의 관계 등. 약 100년 전 서아프리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소스다. 그 외 사후 서한집이 국문으로 출판됐고, 철학서로는 "문화와 윤리"도 번역된 적 있다.

6. 노벨평화상 수상

그는 1952년 적도 아프리카 랑바레네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우고 생명에 대한 경외로움으로 인류의 형제애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 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수상자가 결정될 때마다 늘 논란이 잦았던 노벨평화상이지만, 그가 수상자로 결정되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평화상 자체는 받아들였으나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시상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에 직접 참석했으며, 수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오슬로 라디오 방송국에서 핵폭탄 폭발 실험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강연을 하였다.

노벨상으로 획득한 상금은 세계 언론이 예상했던 대로 아프리카에서 나환자촌을 만드는데 썼다.[13]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당시에도 개인적 명예보다는 상금으로 새 병원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을 더 기뻐했을 정도. 그 외에도 병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모금 운동과 연주회, 출판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다고 한다.

7. 죽음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는 독립하여 가봉 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어 새로 창설된 적도성십자 훈장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부인이 사망한 후부터 두 번째 고향인 아프리카에 머물며 평생 동안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

1965년에 그는 90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고, 평생을 바친 병원 옆의 무덤에 묻혔다. 간호사로서 평생 그와 함께 일했던 부인도 같은 곳에 묻혀 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딸에게 바흐의 악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으며, 그 음악을 들으면서 영면에 들었다. 그의 딸 레나 슈바이처 밀러(1918~2008)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살면서 아버지처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1875년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로 독일이 이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슈바이처의 출생 당시 국적은 일단 독일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알자스-로렌 지역이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프랑스 당국은 1870년까지 프랑스 국적을 가졌던 이들과 그들의 자손은 프랑스 국적 회복·취득을 허용해 1870년까지 프랑스 국적자였던 부모의 자식으로 프랑스 국적 취득 자격이 있었던 슈바이처는 의료활동을 하기 편한 프랑스로 국적을 바꾸면서(그가 활동했던 랑바레네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이다.) 사망 당시 국적은 프랑스이다. 슈바이처 자신은 특별히 프랑스나 독일의 민족의식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슈바이처 본인이 꿈을 꿀 때 독일어로 꾼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 참고로 그의 부모의 이름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루이 테오필(Louis Théophile), 어머니는 아델(Adèle, 혼전성은 실링거·Schillinger)로 모두 프랑스어식 이름을 썼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세기 알자스-로렌 주민들은 성은 독일어식이더라도 프랑스어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3] 유럽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신부목사 같은 기독교 성직자들은 엄연한 고위층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해도 다른 빈민들에 비하면 삶의 질이 다소 좋은 편이었다. 이는 어느 나라나 다 똑같아서 당장 북한도 명목상 고위층에 속하는 조선로동당의 간부쯤 되면 식량난 와중에도 고기 육수를 맛볼 정도는 된다.[4] 현대와는 다르게, 옛날 유럽에서는 대학과 중등교육과정에 대한 무상교육이 실시되지 않아서 비싼 수업료를 내고 다녀야 했다.[5] 실제로 아프리카남아메리카 같은 험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 이상으로 성질이 더러운 경우가 많은데, 가뜩이나 험지에서 힘들게 활동하느라 지치는 판국에 야생동물이나 범죄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도 그렇고, 현지인들이 자신을 포함한 봉사팀을 개무시하고 불신하는 것에 수시로 현타를 느끼는 데다, 최악의 경우에는 군대가 구호물자를 강탈하거나 보호 중이던 사람들을 납치하는 막장스런 상황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거친 면모를 보이게 된다. 때문에 활동지인 남수단에 설립한 보육원의 아이들이 수시로 군벌들에게 납치되자, 직접 총으로 무장해서 교전까지 벌여서 아이들을 구출한 미국인 선교사인 샘 칠더스같은 사례까지 나왔다. 슈바이처는 그나마 전쟁이 벌어지는 곳도 아니고 치안도 안정된 가봉에서 활동했으니, 그 정도면 상당히 유순한 편이라는 평을 받는다.[6] 슈바이처의 오르간 연주를 1935~6년에 녹음한 것을 오늘날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7] 랑바레네에서 기반을 잡은 뒤에 유럽의 바흐 협회에서 그에게 열대에서 쓸 수 있는 피아노를 선물했다. 파이프오르간 연습을 할 수 있는 것으로.[8] 개발시대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식인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학 재학생이 입대하면 부대장의 배려를 받아 근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거나 학업을 일부 계속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금지된 일이었지만 본인이 그렇게 회고했고 복무기록은 남아있으니.[9] 처음 머물 당시에는 버려진 닭장을 진료소로 개조해 원주민들을 치료했다고 한다.[10] 1차대전 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 주민들 중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사람과 그 자손에게 프랑스 국적 취득을 허용했다. 슈바이처의 경우 부모가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 취득이 가능했다.[11] 판본에 따라 노벨상 수상 때의 연설문이 번역돼 있다.[12]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이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인데, 번역자가 그리스 고전을 번역하는 것으로 유명한 천병희 교수다. 원래 독문학자였으니 이상할 게 없다.[13] 노벨상을 받기 전에는 병원에 입원된 나환자가 수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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