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21:02:50

앙브루아즈 드 로레

이름 앙브루아즈 드 로레
Ambroise de Loré
출생 1395년
프랑스 왕국 페이 드 라 루아르 오와소
사망 1446년 5월 25일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앙브루아즈 드 로레
어머니 마리 드 프레
배우자 기유메트 드 쿠세리에, 카트린 드 마실리
자녀 마리, 암브로신, 잔
직위 기사, 파리 총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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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2. 생애

1395년경 프랑스 왕국 페이 드 라 루아르 오와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앙브루아즈 드 로레는 기사였고, 어머니 마리 드 프레는 프레앙파일의 영주인 기욤 드 프레의 사생아였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으며,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아르마냑파를 지지했고, 도팽 샤를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18년 5월29일 부르고뉴군이 파리로 쳐들어왔을 때, 그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함께 도팽 샤를을 구출해 멜룬으로 모셨으며, 샤렌틴 다리에서 도팽 샤를을 쫓는 부르고뉴군을 저지했다.

1418년 메인의 프레네쉬르사르트를 점령한 뒤 그 성의 대장이 되었으며, 보베의 영주이자 앙주와 메인의 총독인 피에르 1세 드 보베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습격전을 전개했다. 1420년 4월 19일 빌렌느라주헬 인근에서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뒤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후 생트수잔을 은신처로 삼고 소규모 프랑스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계속 항전했다. 1422년 도팽 샤를에 의해 정식으로 생트수잔의 성주가 되었다. 1422년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오말레 백작 장 8세 다르쿠르와 함께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해 바티이에서 잉글랜드 분견대를 격파했고, 귀환하던 중 모르타뉴로 가는 길에서 잉글랜드군을 재차 격파했다. 그는 아군이 진군했을 때는 선봉을 맡았고, 철수할 때는 후위대를 맡았다.

1423년, 앙주 공작부인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그에게 존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앙주 목초지에서 가져온 1,200마리의 소와 군수물자를 대동한 채 메인 국경을 넘을 것이라는 사실을 오말레 백작 장 8세 다르쿠르에게 알리도록 지시했다. 그는 지시에 따랐고, 장 8세 다르쿠르는 그와 앙드레 드 라발 몽모랑시와 함께 라 브로시니에르에서 잉글랜드군을 격멸하기로 하고 병력을 규합했다. 그해 9월 26일 일요일 아침, 라 브로시니에르에 먼저 도착한 프랑스군 6,000명은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적이 오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병을 파견했다. 2시간 후, 양측 정찰병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프랑스 정찰병들이 돌아가자 잉글랜드인들이 쫓아갔지만 프랑스 기병대에게 가로막히자 곧바로 물러났다. 존 드 라 폴은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파악하고 기병대로부터 병사들을 숨기기 위해 수송 마차로 이동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지휘관들의 인도하에 잉글랜드 보병대를 공격했지만 수송 마차에 의존하여 저항하는 적을 쉽사리 뚫지 못했다. 이에 일부 프랑스 기병대가 돌아서서 수송 마차가 커버하지 못하는 적의 측면을 요격했고, 잉글랜드군은 급격히 전의를 잃고 큰 계곡으로 흩어졌고, 프랑스 보병대가 이들을 쫓아가서 무차별 학살했다. 결국 존 드 라 폴을 비롯한 잉글랜드 장교들은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1,200~1,400명이 전사했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붙잡혔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스군 측에서는 기사 장 르 루 한 명만 전사했고, 종자 몇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한다.(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1424년 노정과 라 페르테 베르나르를 접수했다. 1425년 8월 2일,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가 르망을 포위하자, 앙브루아즈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강력한 공성포를 앞세운 잉글랜드군의 맹포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8월 10일에 항복했다. 이후 200골드 에스퀴의 몸값을 지불한 후 샤블레로 물러났다. 1426년, 앙브루아즈는 병사 150명과 함께 생트수잔으로 돌아와서 그곳을 접수했던 헨리 브랜치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라 크루실과 암브리에 사이에서 브랜치와 잉글랜드군 장병들을 사로잡았고, 한때는 르망 교외까지 과감히 진격했다가 잉글랜드군이 반격해오자 철수했다.

1427년 가을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메인을 떠나 샤텔로로 간 뒤 메인의 지휘권을 갖게 되었고,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에 합류하고자 진군하고 있던 잔 다르크에게 가담했다. 그해 4월 29일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오를레앙에 식량이 부족한 걸 알게 되자 잔 다르크와 함께 잉글랜드군 점령 지역에 둘러싸인 블루아로 가서 식량을 최대한 확보해 5월 4일 오를레앙으로 돌아와서 식량을 반입했다. 이후 잔 다르크가 5월 6일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와 5월 7일 투렐 요새 공략전을 지휘할 때 열정적으로 참여해 공략에 기여했다. 잉글랜드군은 투렐 요새를 빼앗긴 다음날인 5월 8일에 오를레앙에서 철수했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이 어느 방향으로 후퇴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앙브루아즈와 라 이르에게 100명의 기병과 함께 적군의 행보를 정찰하게 했다. 두 사람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잔 다르크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이후 잔 다르크의 루아르 원정에 가담했고, 1429년 6월 18일 파테 전투에 참여했다. 뒤이은 랭스 행진 때 선두 대열에 서서 도팽 샤를의 행진을 인도했고, 샤를 7세랭스에서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참여했다. 뒤이은 잔 다르크의 1차 파리 공방전에도 참여해 최전선에서 공성을 이끌었지만 파리 공략에 실패했다. 8월 29일 일드프랑스의 요충지인 라니쉬르마른 시가 샤를 7세에게 복종한 후 그곳의 수비대장에 선임되었다. 11월 루앙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성문 하나를 지키고 있던 루에나 그랑피에르라는 인물을 회유해 성문을 열어두게 한 뒤 병사들을 침투시켜 루앙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잉글랜드군 사령관 베드퍼드 공작 존을 사로잡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실 의회가 계획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미뤄지다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429년 12월 말 장 2세 달랑송에 의해 군 사령관에 선임된 뒤 노르망디 남부의 요충지인 생세네리르제레이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잉글랜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1432년 1월 16일부터 2월 22일 벌어진 푸앙세 공방전에서 장 2세 달랑송 측 군대를 이끌어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에 맞서다가 장 5세의 동생이자 프랑스군 사령관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중재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자 철수했다. 이후 생세네리르제레이 요새를 재차 공략하려 했지만,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후퇴했다. 하지만 군대를 추스려서 요새를 재차 포위했고, 주민들이 내부에서 호응한 덕분에 수비대를 몰아내고 그곳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요양 생활을 하던 그는 1432년 5월 ~ 8월 20일 베드퍼드 공작 존의 라니쉬르마른 공략 시도를 프랑스 수뇌부의 지원 덕분에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매년 9월 30일 생 미셸의 날에 캉 교외에서 유명한 박람회가 열리는 사실을 이용해, 그곳을 습격해 식량과 포로들을 확보하기로 하고 병사 700명을 이끌고 여러 성을 지나쳐가며 행진해 캉을 성공적으로 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 3천 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그러나 1433년 5월 1일 생세네리르제레이 요새로 쳐들어온 프레네쉬르사르트 주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성벽 밖에서 맞서 싸우다가 적군이 후퇴하자 추격했다가 랄프 호데스턴이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의 매복 공격으로 많은 병사를 잃고 사로잡혔다. 이후 파테 전투 때 사로잡혔던 존 탈보트와 교환되었다. 생세네리르제레이 요새는 1433년 9월 5일에서 11월 26일 사이에 함락되었다.

1435년 8월 말 ~ 10월 4일 생드니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생드니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이 그곳을 끝내 공략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렇지만 1436년 2차 파리 공방전에서는 여전히 뛰어난 전투력과 용기로 두각을 드러내 파리를 공략하는 데 크게 기여한 뒤, 샤를 7세로부터 파리 총독에 선임되었다. 그 후 10년간 파리 총독으로서 직무를 수행한 그는 파리에서 잉글랜드 지지자들이 일으킨 폭동을 강경 진압했으며, 퐁투아즈를 포위한 프랑스군에게 센 강을 통해 군수 물자를 보급해, 프랑스군이 1441년 9월 17일에 퐁투아즈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1446년 5월 24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기유메트(또는 길레민) 드 쿠세리에
    • 앙브루아즈 드 로레: 로레 영주.
    • 마리 드 로레
  • 카트린 드 마실리
    • 암브로신 드 로레: 파리 총독 로베르 7세 데스토트빌의 아내.
    • 잔 드 로레: 토르베셰 영주 장 드 사후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