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6:52:56

야나기사와 아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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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사와 아쓰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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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J1리그 엠블럼.svg
1998 · 2001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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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前 축구선수
파일:yanagisawa.jpg
<colbgcolor=#eeeeee> 이름 야나기사와 아쓰시[1]
柳沢 敦 / Atsushi Yanagisawa
출생 1977년 5월 27일 ([age(1977-05-27)]세)
일본 도야마현 이미즈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포지션 스트라이커
프로 입단 1996년 가시마 앤틀러스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가시마 앤틀러스 (1996~2003)
UC 삼프도리아 (2003~2004)
FC 메시나 (2004~2006)
가시마 앤틀러스 (2006~2007)
교토 상가 FC (2008~2010)
베갈타 센다이 (2011~2014)
지도자 가시마 앤틀러스 (2015~2018 / 코치)
국가대표 58경기 17골 (일본 / 1998~2006)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이후4. 기타5.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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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축구 선수. J리그 베갈타 센다이 등 여러 클럽에서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배번으로 '13번'을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며,[2] 미즈노의 스폰서를 받고 있어 경기할 때는 미즈노에서 제작한 축구화를 신는다. 배우자는 모델이자 가수인 오바타 유카리(小畑由香里)이다.

2. 선수 경력

1996년에 가시마 앤틀러스에서 데뷔했으며, 1997년 리그에서 25경기에 출전해 8골을 넣어 'J리그 올해의 유망주'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7년 FIFA 청소년 월드컵 당시 일본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98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

이후 2000 시드니 올림픽[3] 당시 일본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2000년 AFC 아시안컵[4]에 출전해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득점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리그에서 26경기에 출전해 12골을 넣어 소속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5골을 넣어 '일본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2002 월드컵 당시에도 국가대표팀 대표로 16강 진출을 하였으며[5], 2003년까지 J리그에서 총 178경기에서 71골을 넣으며 리그를 대표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 이탈리아 세리에 AUC 삼프도리아가 200만 유로에 야나기사와를 영입하기로 합의해 일본 선수로서는 다섯 번째로 이탈리아 무대에 진출했으며, 시즌이 끝난 이후 삼프도리아를 떠나 ACR 메시나로 팀을 옮겨 이탈리아 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적응 실패로 출장 기회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며 1시즌 반만에 자신의 친정팀인 가시마 앤틀러스로 복귀해 무득점으로 이탈리아 생활을 마감했다.

가시마 앤틀러스로 복귀한 뒤 가진 첫 경기인 2006년 J리그 개막전에서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해 유럽에서 세 시즌 동안 한 골도 뽑아내지 못한 선수가 복귀하자마자 해트트릭을 터뜨렸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2006 FIFA 월드컵 직전에는 발가락골절상을 입어 월드컵에 나오지 못할 뻔 했으나, 다행히 회복해서 전설로 남을 본선 무대를 밟았다.

이후 2008년부터 교토 퍼플 상가로 이적했으며, 2011년 베갈타 센다이로 다시 팀을 옮겨 뛰다 2014년 이후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2015년가시마 앤틀러스 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2018년 4월 6일 쇼난 벨마레전 전날에 호텔에서 한 여성과 밀회하고 있는 장면이 한 매체에 포착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결국 4월 8일 그는 구단 측에 사의를 밝히고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참고로 야나기사와는 현역 시절에도 필립 트루시에 재임기에 있었던 시드니 올림픽 예선 때 숙소를 이탈해 유명 연예인이었던 린카를 만난 전적이 있었으며 당시 J2 득점 상위랭커이자 콘사도레 삿포로의 레전드 요시하라 코타에게 올림픽 대표 포워드 자리를 뺏기기도 하였다.

4. 기타

이 선수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계기는 희대의 개발 슈팅 두 개 때문이었다.



2003년 세네갈과 벌인 A매치 경기에서 바로 앞에서 주워먹으라고 찔러 준 패스를 어이없게 뒤로 보내는 개발슛을 날렸고, 벤치에서 그걸 지켜보던 지쿠 감독은 머리를 싸매며 안타까워했다.

이 영상은 특히 한국 축빠 사이에서 후지산 대폭발 슛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며 개그 요소가 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이 장면을 보고 뒷목잡은 팬들이 이 상황에 대한 야나기사와의 발언을 두고 QBK(갑공와;갑자기 공이 와서)라며 깠다.


2006 독일 월드컵 일본크로아티아의 조별리그 2차전, 역시 이번에도 툭 차면 바로 골이 될 수 있었던 패스를 골키퍼 가랑이 사이로 날리며 이번에도 지쿠 감독이 뒷목을 잡게 했다. 이른바 신칸센 대탈선슛. 이 경기에서 야나기사와가 골을 넣지 못한 탓에 결국 일본은 크로아티아와 무승부로 끝났고, 다음 경기였던 브라질에는 1-4로 대패하며 곧바로 짐을 쌌다.

그래도 팀에 전혀 보탬이 안 됐던 건 아니다. 1차전 호주전에서 나카무라의 크로스 때 마크 슈워처와 충돌하여 공을 못 잡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야나기사와이다. 그 덕분에 일본이 공짜로 한 골 넣을 수 있었으니 저 나름대로 밥값은 한 셈이다.

결국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2011년 8월 20일, 역습 상황에서 상대 팀의 골키퍼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수비수의 실책으로 따낸 공을 또다시 빈 골대 왼쪽으로 대탈선 시키는 사고를 저질렀다. 신칸센에 비하면 충분히 여유로운 상황에서 저랬으니 임팩트는 이 쪽이 더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희대의 개발슛만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일본 축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겠지만 연계 능력은 꽤나 뛰어나다.



이 영상에서 야나기사와의 연계능력이 잘 드러난다. 코너킥 → 일본 수비 클리어링 → 야나기사와 다이빙 헤딩 패스 → 나카무라 드리블 → 다이빙 헤딩 후 넘어진 야나기사와 어느새 일어나서 전진 → 나카무라 야나기사와에게 패스 → 야나기사와 원터치 패스 → 다카하라 찬스 생성

2014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5. 관련 항목



[1] 아츠시라고도 한다.[2] 프로 데뷔 이후 등번호로 13번을 달지 못한 경우는 메시나에 임대되었던 시즌(20번), 베갈타 센다이 이적 첫 시즌(30번), 1997년 FIFA 청소년 월드컵(10번) 뿐이다.[3]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4] 마지막 12개국 본선 진출 아시안컵 대회[5] 2002월드컵 일본 16강 9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