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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해군법

미합중국 해군 건함계획
1938년 해군법 빈슨-월시 법
양양해군법
Two-Ocean Navy Act
<colbgcolor=#a5adb9><colcolor=#fafafa> 전체명 An Act to establish the com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Navy, to authorize the construction of certain naval vessels, and for other purposes.
제정일 제76회 미국 의회
1940년 7월 19일
제정역사 1940년 6월 19일 법률안 제출
1940년 6월 22일 미국 하원 통과
1940년 7월 10일 미국 상원 통과
1940년 7월 19일 대통령 서명 및 법안 제정
1. 개요2. 배경3. 내용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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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wo Ocean Navy Act / Vinson-Walsh Act(빈슨-월시 법) / 70% Expansion Act

1940년 7월 19일 비준된 미합중국 해군초대규모 건함계획.

2. 배경

일본 제국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후속조약에 서명을 거부하고 조약을 탈퇴하자 미국은 사전에 대비한 대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의 함포를 16인치로 교체하는 등[1] 재빠르게 대응했으나 역시 이 정도로는 모자랐고, 1936년 해군법과 1938년 해군법[2]에서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4척과 아이오와급 전함 4척, 그리고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1척(CV-8 호넷)과 에식스급 항공모함 3척 등 대규모의 건함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던 중 1939년 9월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고, 정세가 점점 불안해지자 1940년 6월 3차 빈슨 계획이 제안된다. 초기에는 해군 배수량의 11%의 증가와 해군 항공대의 확장을 주요골자로 하는 내용이었으나,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털리자 17일 해군참모총장이였던 해롤드 스타크 대장은 기존안에 추가적으로 전력의 70% 향상(총 1,325,000톤-257척의 전투함 추가-40억달러 제시. 의회에서 85억달러로 변경)을 목표로 하는 내용이 제안되었다. 6월 19일자로 양양해군법이 하원에 제출된다. 같은 달 22일에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후, 7월 10일 상원을 통과해서 7월 19일 대통령 사인과 동시에 법안이 발효되었다.

3. 내용

주력함 38만 5천 톤, 항공모함 20만 톤, 순양함 42만 톤, 구축함 25만 톤, 잠수함 7만 톤 등 총 132만 5천 톤의 정신나간 양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이 골자였으며, 소요 예산은 85억 5천만 달러[3]로 오직 천조국만이 가능한 초거대 건함계획이었다. 처리 예상 기간은 5년에서 6년으로 잡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승인된 계획은 다음과 같다.

4. 결과

양양해군법은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긴 했지만 적절한 시점에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진주만 공습으로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빅 E의 분전에 힘입어 과달카날 전역 이후 1943년부터 이법에 의해서 건조를 시작했던 항공모함을 2~4달에 한 척씩 취역시키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4을 통째로 날려먹고, 동부 솔로몬 해전산타크루즈 해전을 거치면서 그나마 남은 정예 파일럿들을 모두 손실했다. 일본은 미국이 아니었기에 상실한 정규 항모 4척 이상의 성능을 가진 정규 항모들을 양산해낼 수 없었고, 만들어낸 다이호운류급 항공모함은 너무 늦어 다이호는 제대로 된 실전 없이 바로 투입되어 숙련도 문제로 침몰했으며, 운류는 더 늦어서 아예 항공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에 사실상 운류급 수송함으로 사용되기만 했다. 물론 미국도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를 제외한 태평양함대 소속 항모를 전부 다[4] 날려먹으면서 위험한 순간(심지어 둘 다 중파되어 함대에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는 기간이 있었다!)이 있기는 했지만 손실을 뛰어넘는 숫자의 에식스급이 발주가 되어있었고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그리고 호위항모들도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항공모함을 제외한 주력함선들의 할당 쿼터는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항모 찍어내느라 대형 건선거가 부족해서 나머지 13척의 대형함 중 실제로 완성된 것은 CB-1 알래스카와 CB-2 괌뿐이었다. 특히 주 피해자는 몬태나급 전함. 아예 건조가 시작도 못 해보고 취소되었다.

일본의 대미 조기 개전에 영향을 줬다는 관측도 있다. 일본해군은 조약 파기전까지는 미국의 70% 전력에 묶여 있었으다. 동일한 배수량 쿼터를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약 탈퇴후 마루 계획에 의해서 해군 전력 증강을 계속했지만 양양해군법에 의해서 미국이 넘사벽의 해군 전력을 갖추는게 가능해지면서 시간이 지나면 전력비가 50%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우려했었다. 결국 일본해군 입장에서 군축조약 파기는 일본의 리미터를 해제한게 아니라 미국의 리미터를 해제시켜준 자충수가 되었다.[5]

[1] 영국은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16인치에 준하는 신형 15인치 주포로 교체할 생각이었으나, 15인치 대응방어 장갑을 두른 탓에 너무 무거워져 탑재에 실패했고, 물량으로라도 만회해 보려 4연장 주포 3기를 장착하려 했더니 구조상의 문제로 유폭 확률이 급증해 결국 14인치 4연장 2기, 2연장 1기라는 괴상한 배치가 되어버렸다.[2] Naval Act of 1938. 2차 빈슨 계획이라고도 불린다.[3] 2016년 현재 돈으로는 약 1444억 5천만 달러, 164조 9619억 원이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 예산이 약 500조 원이다.[4] 미국은 4척의 정규항모(렉싱턴, 요크타운, 와스프, 호넷)를 전쟁 중 잃었는데 그게 모두 1942년 태평양전선에서의 손실이다.[5] 일본제국 해군 내에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강력하게 지지하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같은 조약파쪽에서 계속 주장하던게 미국과의 건함경쟁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