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A)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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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00> 양양 杨扬 | Yáng Yáng | |
출생 | 1976년 8월 24일 ([age(1976-08-24)]세) |
헤이룽장성 자무쓰시 | |
국적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5cm |
학력 | 칭화대학 |
종목 |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주종목: 500m, 1000m, 1500m |
은퇴 | 20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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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前 쇼트트랙 선수며, 중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2. 선수 경력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여자선수로 불리는 레전드다. 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중반 당시 쇼트트랙계를 수놓았는데, 1997년 당대 라이벌격인 전이경과[1] 공동으로 세계선수권 우승을 한 이후, 2003년 최은경에게 저지당할 때까지[2] 무려 세계선수권 6연패(1997-2002)를 했다. 이는 안현수의 6회 우승과 타이기록이며 연속 우승으로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양양(A)가 올림픽+세계선수권에서 획득한 메달 숫자는 무려 55개이다. (금메달 34개/은메달 15개/동메달 6개) 500m부터 3000m 슈퍼파이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목에서 최강의 모습을 보여준 올라운더였다.전성기 시절엔 아웃코스를 이용하여 한번에 선두로 치고 나가는 화려한 플레이를 주로 선보였으나 복귀 이후엔 상대적인 체력 열세를 노련하고 탁월한 경기운영으로 적절하게 커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한 예로 전성기였던 나가노와 솔트레이크에선 주로 뒷쪽에 있다가 후반부에 한번에 스피드를 내서 치고 나가는 플레이 위주였던 반면, 복귀 이후인 토리노에선 초반부터 선두권을 유지하며 적절한 체력 안배와 견제 위주의 플레이가 많았다.
실력과 세계선수권에서의 압도적 업적에 비하여 올림픽 메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금2/은2/동1), 이는 당시 전명규 감독이 지도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인해전술식 집중 견제작전 때문에 매번 올림픽에서 아쉬운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전이경과의 대결에서 줄곧 앞섰으나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는 한국팀의 단체 견제를 막아줄 수 있는 동료 없이 혼자 헤쳐나가는게 지나친 부담감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라이벌 전이경이 중요한 순간에 강한 모습을 보여서 개인전에선 빈손으로 돌아갔고 계주 은메달에 그쳤다. 나가노 올림픽의 충격으로 은퇴하려고도 생각했다고 하나 마음을 다잡고 복귀하여 4년 간 세계 여자 쇼트트랙을 평정했다. 전이경은 올림픽에서만 승리하고 나머지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등에서는 양양을 별로 이기지 못했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500m와 1000m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1500m에서 최은경의 견제와 고기현의 깜짝 등장으로 메달은 따내지 못했다. 2003 세계선수권에서 7연패가 무산된 뒤 2003-04 시즌을 스킵하면서 휴식을 취했고, 복귀한 2004-05 시즌에는 나이에 따른 체력저하와 진선유라는 괴물의 등장으로 장거리보다는 단거리에 집중했다. 2005-06 시즌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만 30세의 나이로 1000m 동메달을 따고 은퇴했다.
양양A의 현역 시절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볼 수 있는 영상.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당시의 좌절과 시련,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일궈낸 첫 금메달의 순간, 그녀의 마지막 출전이었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양양A의 족적이 잘 축약되어 담겨져 있다.[3] 유튜브 자체 자막을 이용하면 큰 무리없이 내용을 이해하며 감상할 수 있다.
3. 은퇴 이후
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중반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쇼트트랙 여자부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중국의 동계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긴만큼, 중국에선 인민영웅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은퇴 후에는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2010년 IOC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2019년부턴 세계반도핑기구 WADA의 부회장직을 겸하고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성화봉송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CCTV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중국 선수들이 연이어 실격 판정을 받자 이해할 수 없다며 울상을 짓기도 했는데, 이후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딴 중국 선수들에겐 메달을 걸어주며 기뻐하는 모습도 보였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때도 성화 봉송 주자로 등장했다.
보면 선수 생활 때도 그렇고 은퇴 이후에도 아직 큰 구설수 없이 잘 지내고 있다.
4. 평가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기량을 지녔던 선수로 평가받는다. 덕분에 선수 생활 내내 한국 여자대표팀의 견제와 팀플레이를 감내해야 했던 선수였지만,그나마 1996 하얼빈 동계 아시안 게임 1500m 결승 당시 전이경에 이어 2위로 들어왔지만, 주심인 왕시안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금메달을 딴 사건 정도가 옥의 티인데, 여기서도 양양의 더티 플레이는 없었다.
5. 기타
원래 이름은 양양이나, 양양(A)가 된 건 동시대 활약했던 또다른 중국 쇼트트랙 간판 선수 양양(S)와 이름의 발음이 완전히 같았기 때문이다.[4] 그래서 구분을 위해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였는데, 원래는 양양(S)가 1살이 적다는 점에 착안한 Small의 S였고, 양양(A)는 첨엔 '대(大) 양양'이랍시고 Large를 따와[5] 양양(L)였으나, Large와 Small로 구분하는 것을 싫어한 양양(A)가 자신이 태어난 달인 8월(August)에서 딴 A를 써서 양양(A)가 되었다.[6]이게 단순히 중계할 때만 구별하려고 쓴 게 아니라 공식 선수명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의 활동 시기 장내 아나운서가 '양양에이~', '양양에스~'라고 외치는 소리를 올림픽 및 여러 대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둘 중 한 명이 출전하지 않는 대회에서도 그냥 양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에이와 에스를 붙여서 불렀다. 두 사람은 이름만 비슷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잘 아는 사이였다.
6. 수상 기록
대회 | 금 | <colcolor=#ffffff> 은 | <colcolor=#ffffff> 동 |
올림픽 | <colbgcolor=#ffe970,#554600> 2 | <colbgcolor=#c0c0c0,#444444> 2 | <colbgcolor=#d7995b,#442910> 1 |
세계선수권 | 26 | 8 | 4 |
세계 팀선수권 | 4 | 4 | 0 |
아시안 게임 | 7 | 1 | 0 |
합계 | 39 | 15 | 5 |
올림픽 | ||
금메달 | 2002 솔트레이크시티 | 500m |
금메달 | 2002 솔트레이크시티 | 1000m |
은메달 | 1998 나가노 | 3000m 계주 |
은메달 | 2002 솔트레이크시티 | 3000m 계주 |
동메달 | 2006 토리노 | 1000m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97 나가노 | 종합 |
금메달 | 1997 나가노 | 500m |
금메달 | 1997 나가노 | 1000m |
금메달 | 1998 비엔나 | 3000m 계주 |
금메달 | 1998 비엔나 | 종합 |
금메달 | 1998 비엔나 | 1000m |
금메달 | 1998 비엔나 | 1500m |
금메달 | 1999 소피아 | 3000m 계주 |
금메달 | 1999 소피아 | 종합 |
금메달 | 1999 소피아 | 500m |
금메달 | 1999 소피아 | 1000m |
1위 | 1999 소피아 | 3000m S.F. |
금메달 | 2000 셰필드 | 3000m 계주 |
금메달 | 2000 셰필드 | 종합 |
금메달 | 2000 셰필드 | 1000m |
금메달 | 2000 셰필드 | 1500m |
금메달 | 2001 전주 | 3000m 계주 |
금메달 | 2001 전주 | 종합 |
금메달 | 2001 전주 | 1000m |
금메달 | 2001 전주 | 1500m |
1위 | 2001 전주 | 3000m S.F. |
금메달 | 2002 몬트리올 | 종합 |
금메달 | 2002 몬트리올 | 500m |
금메달 | 2002 몬트리올 | 1000m |
금메달 | 2002 몬트리올 | 1500m |
금메달 | 2003 바르샤바 | 3000m 계주 |
금메달 | 2003 바르샤바 | 500m |
금메달 | 2005 베이징 | 500m |
은메달 | 1994 길퍼드 | 3000m 계주 |
은메달 | 1996 헤이그 | 3000m 계주 |
은메달 | 1998 비엔나 | 3000m |
은메달 | 1999 소피아 | 1500m |
2위 | 2000 셰필드 | 3000m S.F. |
은메달 | 2001 전주 | 500m |
은메달 | 2002 몬트리올 | 3000m 계주 |
은메달 | 2003 바르샤바 | 종합 |
은메달 | 2005 베이징 | 3000m 계주 |
동메달 | 1994 길퍼드 | 500m |
동메달 | 1997 나가노 | 3000m |
동메달 | 2003 바르샤바 | 1000m |
동메달 | 2003 바르샤바 | 1500m |
세계 팀선수권 | ||
금메달 | 1998 보르미오 | 단체전 |
금메달 | 1999 세인트루이스 | 단체전 |
금메달 | 2000 헤이그 | 단체전 |
금메달 | 2001 노베야마 | 단체전 |
은메달 | 1995 조테미어 | 단체전 |
은메달 | 2002 밀워키 | 단체전 |
은메달 | 2003 소피아 | 단체전 |
은메달 | 2005 춘천 | 단체전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96 하얼빈 | 3000m 계주 |
금메달 | 1996 하얼빈 | 1500m |
금메달 | 1999 강원 | 500m |
금메달 | 1999 강원 | 1000m |
금메달 | 2003 아오모리 | 500m |
금메달 | 2003 아오모리 | 1000m |
금메달 | 2003 아오모리 | 3000m |
은메달 | 1999 강원 | 1500m |
6.1. 월드컵 성적
월드컵 우승 기록 | ||||
종합 우승 |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2001 시즌, 2001-02 시즌 | |||
1000 m 1위 |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2001-02 시즌 | |||
1500 m 1위 |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2001-02 시즌 |
월드컵 수상 기록 | ||||
월드컵 랭킹 | 우승 | 2위 | 3위 | 포디움 |
종합 | 4 | 0 | 1 | 5 |
500 m 랭킹 | 0 | 3 | 1 | 4 |
1000 m 랭킹 | 3 | 1 | 0 | 4 |
1500 m 랭킹 | 4 | 1 | 1 | 6 |
합계 | 11 | 5 | 3 | 19 |
월드컵 메달 | 금 | 은 | 동 | 포디움 |
종합 | 15 | 3 | 3 | 21 |
500 m | 8 | 3 | 3 | 14 |
1000 m | 14 | 4 | 2 | 20 |
1500 m | 16 | 2 | 1 | 19 |
3000 m | 7 | 7 | 1 | 15 |
개인전 합계 | 60 | 19 | 10 | 89 |
3000 m 계주 | 10 | 0 | 0 | 10 |
메달합계 | 70 | 19 | 10 | 99 |
랭킹 + 메달 합계 | 81 | 24 | 13 | 118 |
월드컵 랭킹[7] | ||||
시즌 | 종합 | 500 m | 1000 m | 1500 m |
1998-99 | 1위 | 2위 | 2위 | 1위 |
99-2000 | 1위 | 5위 | 1위 | 1위 |
2000-01 | 1위 | 2위 | 1위 | 1위 |
2001-02 | 1위 | 2위 | 1위 | 1위 |
2004-05 | 3위 | 3위 | 10위 | 3위 |
2005-06 | 18위 | - | 18위 | 2위 |
랭킹 20위까지 표기[8] |
[1] 냉정하게 평가하면 전이경이 밀렸다. 그래서인지 전이경은 동갑임에도 양양(A)보다 훨씬 이른 90년대 후반에 은퇴를 하게 된다.[2] 이것도 양양(A)의 7연패만큼은 막아야 된다는 절박함에, 당시 코치진들이 비한체대파 조해리를 희생시켜 한체대파 에이스인 최은경에게 노골적인 팀플레이를 하도록 조치해 얻은 결과였다. 물론 이런저런 일들이 쌓여 90년대~2010년대까지 이어진 한체대/비한체대간 파벌 갈등은 유명하다. 이땐 겉으로나마 협력이라도 했는데, 나중 가면 차라리 중국선수가 우승하면 우승했지 한체대/비한체대 서로 상대쪽 선수는 우승시키면 안된다는 황당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3] 2002 솔트레이크시티 쇼트트랙 첫 종목인 1500m에서 그녀가 심적으로 굉장히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4] 양양(S)의 이름은 阳이다. 정체자로 쓰면 양양(A)는 揚이고 양양(S)는 陽이라 표기로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5] 보통 이런 경우는 (the) Great-Lesser나 Senior-Junior로 구별하는데, 당사자와 (선수등록을 관장하는) 기관이 이런 표현법을 몰랐던 모양.[6] 양양(S)는 Small이나 September(9월 14일생이다)나 첫 글자가 같아서 이런 불만은 없었던 모양.[7] 월드컵 랭킹 표기는 랭킹 20위까지 표기를 기준으로 한다. 20위를 넘는 성적은 전체 커리어의 상위 80%를 기준으로 기재한다.[8] 랭킹 표기: 20위까지 표기(전체 랭킹기록 29개 중에 80%인 23개까지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