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43:48

양용근

파일:양용근.jpg
성명 양용근(梁龍根)
일본식 성명 야나카와 세이이치(梁川正一)
종교 개신교
이명 양복근(梁福根)
초명 양용환(梁用桓)[1]
본관 남원 양씨
생몰 1905년[2] 10월 14일[3] ~ 1943년 12월 5일
출생지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오추마을[4][5]
사망지 광주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양용근은 1905년 10월 14일 전라남도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오추마을에서 부친 양재훈(梁宰勛)과 모친 정정랑(鄭丁浪)의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양용환(梁用桓)이었지만 일본으로 유학간 후에는 양용근(梁龍根)으로 개명했다. 그는 자신보다 열살 위인 맏형 양용이(梁用伊)가 설립한 교회에 다니는 한편 한문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고, 1912년 8살의 나이로 이웃 면인 진상면에 있는 진상보통학교에 재학했으며, 이후엔 순천 매산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을 익힌 뒤 1920년에 광양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순천 매산학교에 입학했다가 보통학교 고등과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니혼대학 법학과에 재학했다.

니혼대학 법학과 졸업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몇년간 공부한 뒤 졸업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오사육영학당을 세우고 조선인 자제들에게 조선어와 성경을 가르쳤으며, 그 외에도 야구부, 축구부, 문예부를 둬서 학생들에게 체육과 음악, 미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1930년 11월 27일 진월면 면사무소의 면서기로 임명되어 3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일본어 교육을 하지 않고 아동까지 야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문제삼았으며, 교실에 일장기를 계양하지 않는 것 등을 지적해 시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양용근은 시정명령이 부당하다고 항변했고, 당국은 그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간주하고 감시했다.

결국 오성육영학당을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된 그는 1935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인 1936년에 광양읍교회 조사로 부임하여 1937년 3월까지 맡았다. 당시 광양읍교회에는 담임목회자가 없어서 그가 대신 담임 교역자로 시무했다. 그러나 광양읍교회의 교회연혁에는 양용근의 시무가 누락되어 있고 그 당시 강병담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양읍교회에서 분리개척을 한 광양제일교회의 교회연혁에 의하면, 1927년 10월 9일 강병도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했고 양용근이 조사로 사역한 기간까지 사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강병도 목사는 광양읍교회와 대방교회 그리고 섬거교회의 동시 목사였다고 기록했다. 강병도 목사가 담임목사였지만 여러 교회들을 관할했기 때문에 그 사이 양용근이 담임교역자로 시무한 듯하다.

1937년 3월 광양읍교회를 떠난 양용근은 신풍리교회에서 조사로서 일하며 그곳의 나병 환자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방청석에서 그 광경을 본 그는 울분을 토했다가 형사들에 의해 회의장에서 강제로 쫓겨난 후 평양신학교 예배당으로 돌아와서 그날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회개기도와 찬송으로 밤을 세웠다. 이후 그는 손양원, 김형모, 안덕윤 조사와 함께 이 난국을 대처해나갈 방법을 토론하였고 그 결과 다음의 11가지 사항을 함께 결의하고 각자 노트에 적어서 잊지 않고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1. 우리는 순교할 각오로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대열의 선봉장이 된다.
2.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목회를 한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 손해를 보더라도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는다.
3. 기복신앙을 타파한다. 찰나적 이생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영원하고 참된 진리(말씀)를 추구하는 성도가 되도록 가르친다.
4. 신사참배를 결사반대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은 형이상(정신적인)의 것이나 형이하(물질적인)의 것을 막론하고 모두 우상으로 여기도록 교육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살아가도록 가르친다.
5. 이 세상의 권세는 다 무너질 수밖에 없고, 오직 예수께서 다스릴 때만 영원한 것임을 가르친다. 일제의 권세는 조만간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상을 만들어서 섬긴자들의 멸망한 모습을 구약에서 시작해서 신약시대 그리고 동,서양사를 고증해 가면서 성도들이 확신하고 용감하게 우상숭배를 반대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6. 미신 타파에 총력을 기울인다. 택일, 궁합, 토정비결, 신수점 등 기타 일체의 복술행위,자연숭배,인물숭배,동물숭배,어떤 주의에의 심취, 기복신앙 등을 하지 않도록 계몽하고 교육한다.
7.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지만 성급한 위기의식을 고조해서 사도(邪道)로 이끄는 사교에 현혹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8. 일제의 탄압정책에 희생되어 가는 동포를 그 위기에서 구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는 동포가 되도록 헌신한다. 우리 동포만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도 사랑하여 구원받는 성도가 되도록 성령의 전달자가 되기에 신명을 바친다.
9. 삯꾼 목자가 되지 않는다. 사례비는 담당한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 최하의 수준이 되도록 하고, 다른 교역자가 여러 가지 형편으로 보아 기피하는 교회, 싫어하는 곳에 기쁘게 가서 헌신 봉사한다.
10. 날마다 관제로 이 몸을 바치는 정성으로 산다. 스데반이 누린 최상의 복을 우리 같은 천한 종들에게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헌신한다.
11. 즉시 각자의 교회로 돌아가서 이번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것은 진정한 총회의 뜻이 아니라 일제의 악랄한 계교와 탄압에 의하여 타의적으로 결의된 사실임을 널리 알리고 결코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말며 기복신앙에 기울지 않도록 온 정성을 다하여 지도한다.

그 후 양용근은 1939년 4월 길두교회의 담임교역자로 부임했고, 그해 5월 순천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도록 설교했고,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금줄을 철거하게 하고 봉안전 참배를 거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락민들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당산제를 지내고자 당산나무 아래에 돼지머리와 각종 음식들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려 하자, 양용근은 제사상을 엎어버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임을 알려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고 제사 지내는 것을 도중에 그만 두게 했다.

1940년 2월, 양용근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송산교회에서 개최한 고흥연합사경회(高興聯合査經會)에 참석했다. 그는 이 집회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멸망한다.’는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후 그가 곧 체포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는 고흥군에서 머물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구례에 있는 구례읍 중앙교회로 부임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고, 이름을 '양복근(梁福根)'으로 개명했다. 1940년 3월 31일 구례읍 교회에 부임한 그는 신도들에게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따르지 말 것을 권고했다. 또한 창씨개명을 할 것을 요구받자, 이름을 야나카와 세이이치(梁川正一)로 개명했다. 그러나 속뜻은 같은 발음인 양천정일(梁遷征日)로 생각하였다. 여기서 양천(梁遷)은 다시 양으로 바꾼다는 뜻이고 정일(征日)은 일본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즉, 그는 언젠가는 일본을 정복하고 다시 양씨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이름에 담은 것이다.

한편, 일제 당국은 모든 교회에 가미다나(かみだな, 神棚)를 걸어놓고 예배드리기 전에 가미다나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그는 형사에게 천조대신을 모셔놓고 잠깐 절하고 다른 신인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면 그동안 천조대신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역으로 설득을 하여 일단 돌려보냈다. 그러나 결국 1940년 11월 15일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거부한 죄로 체포되어 순천경찰서로 압송되었고, 이후 22개월 동안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1943년 11월 8일, 그는 동료 5명과 함께 형무소 광장에서 궁성요배를 하라는 강요를 거부했다가 간수들에게 곤봉을 얻어맞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형무소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입술에 찰과상이 났고 왼쪽 허벅지가 약 10센티미터 정도 찢어졌으며 머리에는 피가 흘렀고 갈빗대가 석대나 부려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형무소장은 치료하지 말고 각각 30일간 독방에 넣으라고 명령했다. 의료진은 소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양용근 등을 치료했지만, 양용근은 열악한 독방의 환경에서 고통받다가 1943년 12월 5일 새벽에 소천했다. 그는 죽기 전날 '예수 나를 오라하네'라는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양용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국가보훈처에는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0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3] 호적상에는 1905년 3월 14일 출생으로 기재되었다.[4] 남원 양씨 집성촌이다.[5]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면 봉북리로 기재되어 있는데, 1940년 구례읍 교회에 부임할 시절 주소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