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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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36대 국군''' | ||
성 | 희(姬) | |
휘 | 실전 | |
아버지 | 연후환공(燕後桓公)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333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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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燕)나라의 제36대 군주. 연후환공의 아들. 연역왕의 아버지. 이때 합종책에 참여해 연나라가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에 연문공이 있었으므로 구별을 위해 연후문공이라고 하며, 달리 연문후(燕文侯)라고도 한다.2. 생애
연 후문공 6년(기원전 356년), 후문공이 진나라의 아 땅에서 회맹했다.연 후문공 27년(기원전 335년), 주나라(周) 출신의 변사인[1] 소진(蘇秦)이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연후문공에게 나아가 합종책을 논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줄이 없어 1년이 지나고서야 후문공을 만날 수 있었다.
연 후문공 28년(기원전 334년), 후문공의 신임을 얻은 소진이 유세했다.
"연나라는 동으로는 조선(朝鮮)[2]과 요동(遼東)에 이르며, 북으로는 임호(林胡), 누번(樓煩)[3], 서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4], 남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에 이르러 2,000리에 이르며, 병사는 100,000명이고, 전거는 700여 량에 이릅니다. 그리고 군마는 6,000필이며, 식량은 10년 동안 먹을만큼 넉넉합니다. 남으로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운 생산력과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부합니다. 그러니 가히 하늘이 내린 곳간이라 할만 합니다. 백성들과 병사들이 편안하기로는 연나라 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바로 강대한 진(秦)나라를 조(趙)나라가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연나라를 해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조나라는 연나라를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나라와 합치시지요."
연후문공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소진에게 수레와 황금, 은, 비단을 넉넉히 내려서 조나라로 보내 합종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조숙후(趙肅侯), 한선혜왕(韓宣惠王), 위양왕(魏襄王)[5], 제선왕(齊宣王)[6], 초위왕(楚威王) 등이 참여해 진나라에 맞섰다. 소진은 종약장이 되어 6국 상국의 인수를 찼다.[7] 그러나 그 합종책은 서로 간의 이해 관계 때문에 와해되고 말았다. 같은 해 진혜문왕(秦惠文王)이 자신의 딸을 태자인 희퇴에게 보냈다.[8]연 후문공 29년(기원전 333년), 후문공이 죽고, 그 태자인 희퇴(姬脮)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연역왕이었다.
[1] 우리가 아는 성우의 전신격인 변사(辯士)가 아니라 종횡가에 능해 설득을 잘하는 사람을 말한다.[2] 당연히 고조선(古朝鮮)이다.[3] 동호(東胡)의 무리들.[4] 훗날 후한(後漢)시대에 병주(幷州)에 속하는 땅이었다.[5] 일설에는 양혜왕(梁惠王).[6] 《죽서기년》을 따르면 제위왕(齊威王).[7] 이것은 소진의 합종책을 따르겠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훗날 연소왕(燕昭王) 대의 장수였던 악의(樂毅)가 연나라의 대장군이면서도 조나라의 상국 인수를 지닌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8] 이 태자가 훗날의 연역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