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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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제3대 왕''' | ||
성 | 희(姬) | |
휘 | 직(職) | |
아버지 | 연왕 쾌(燕王 噲)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79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313년 ~ 기원전 2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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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나라의 제39대 국군이자 제3대 왕. 시호는 소양왕(昭襄王)이지만, 약칭 시호로는 소왕(昭王) 혹은 양왕(襄王)으로도 불린다. 제나라의 침공과 자지(子之)의 반란으로 피폐해진 연나라를 살리기 위해 곽외(郭隗)와 악의(樂毅)를 등용하여 연나라의 번영을 이룩한 정복군주이자 중흥의 명군이었다.2. 이름 논란
연소왕의 본명이 희평(姬平)으로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이는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시 연나라의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운 탓에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사료 혹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문에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본명은 희직(姬職)이 맞다.《사기》<연소공세가>에 따르면 당시 태자의 이름이 평(平)이었고, 평이 연소왕으로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연나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에 새겨진 연소왕의 이름은 직(職)이었다. 《사기》<조세가>에 따르면 공자 직(職)이 연나라로 가서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기》와 연나라의 유물 및 《죽서기년》의 차이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재상 자지(子之)에 의해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太子 平)이 살해되고, 다른 나라에 가 있었던 공자 직(公子 職)이 와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죽서기년》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 소양왕 희직(姬職)은 형의 이름인 희평(姬平)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진나라의 소양왕 역시 한자는 다르지만 이름이 직(稷)이었다. 둘 다 왕위에 오르기 전 타국에서 인질로 있다가 형이 죽자 왕위에 오른 점, 진 소양왕은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 연 소양왕은 제나라와 조선, 동호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진 소양왕은 어머니인 선태후와 함께 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었다.
3. 생애
3.1. 왕위에 오르기 전
연왕 쾌 5년(기원전 316년), 쾌(燕王 噲)는 간신인 자지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그 결과 자지는 권력을 남용하여 연왕 쾌로부터 선양을 받아 왕을 자칭하는 등 연나라의 정세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에 태자 평(平)이 장군인 시피(市被)와 함께 거병하여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연왕 자지 3년(기원전 314년), 이틈을 노린 제나라의 선왕이 장수 광장(匡章)을 보내 연나라를 기습하여 내전에 개입하고 자지의 무리를 진압했다. 이 와중에 연왕 쾌가 자살했다.
3.2. 제나라를 치다
연 소양왕 원년(기원전 313년), 연나라가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왕 쾌의 서자인 공자 직이 연나라의 왕으로 즉위했다.재위 초기부터 연 소양왕은 마음속으로 제나라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기 때문에 절치부심하여 여러 인재를 등용하고, 부국 강병에 힘썼다. 곽외(郭隗)를 스승으로 삼고, 그 조언에 따라 널리 인재를 끌어모아 등용했다.
그리하여 들어온 인재가 바로 명장 악의였다. 그를 등용한 소양왕은 악의를 보내 제나라의 민왕을 쳤는데, 연나라 혼자서 제나라를 치기에는 제나라의 힘이 당시에 매우 막강했으므로,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진나라와 동맹을 맺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악의가 이끄는 연합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제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를 포위했다. 이에 기뻐한 소양왕은 악의의 공적을 기려 그를 창국군에 봉했다. 그리고 악의에게 제나라를 완전하게 멸할 것을 명령했다.
3.3. 재위 말기
연 소양왕 30년(기원전 284년), 제 민왕은 수도 임치가 함락되고 남은 땅이 거(莒)와 즉묵(即墨)뿐이라 결국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초나라의 장수 요치(淖齒)가 오기는 왔는데, 그가 오히려 제 민왕을 배신하여 감금하니 결국 민왕은 굶어죽고 말았다.하지만 악의의 상황도 좋아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왕손 가에 의해 즉위한 제 양왕이 연나라를 상대로 즉묵에서 항쟁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연 소양왕 33년(기원전 281년), 소양왕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을 쳐서 동호의 땅 1,000리를 포함해 요서와 요동에 걸친 2,000여 리의 땅을 차지했다.(고조선-연 전쟁)[1]
연 소양왕 35년(기원전 279년), 연나라를 중흥시킨 명군 소양왕이 훙했다.[2]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는데, '희평'(姬平)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진평'이라고 오역될 때도 있다. 그런데 정작 고대 무장으로 나와도 될법한 진짜 전한의 진평은 <삼국지 시리즈>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1] 기록에 의하면 만번한까지 넓혔다고 한다. 그 위치가 어딘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요동의 천산산맥 부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2] 일단 왕이긴 해도 주나라의 천자가 아니었으므로 '훙'으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