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의 추존 태후에 대한 내용은 정아춘 문서 참고하십시오.
宣太后 선태후 | ||
<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338년 추정 초나라 | |
사망 | 기원전 265년 진 함양 | |
능묘 | 진 여산(酈山) | |
재위 | 태후 |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66년 |
성 | 미(芈) | |
씨 | 알 수 없음 | |
휘 | 월(月) 추정[1] | |
부모 | 알 수 없음 | |
부군 | 진 혜문왕, 의거왕(義渠王) | |
형제 | 양후(穰侯) 위염(魏冉) 화양군(華陽君) 미융(芈戎) | |
자녀 | 진 소양왕 고릉군(高陵君) 영불(嬴巿) 경양군(涇陽君) 영회(嬴悝) 의거왕의 두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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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태후.[2][3]진 혜문왕의 후궁이자, 진 소양왕의 친모로서, 나이가 어린 소양왕 대신 섭정을 했다.[4] 초나라 출신으로 성은 '미'(芈)였다.[5]
2. 상세
선태후의 출신이나 부모 및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6], 다만 그녀가 초나라 왕족의 성인 '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동생들도 초나라가 아닌 진나라에 와서 벼슬을 한 것을 볼 때 일찍이 초나라의 방계 왕족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축출되어 진나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그녀를 '미팔자'(芈八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팔자'(八子)는 이름이 아닌 진나라 후궁(后宮)의 계급이다. 당시 후궁은 총 8계급. 즉, 왕후(王后, 정실) - 부인(夫人) - 미인(美人) - 양인(良人) - 팔자(八子) - 칠자(七子) - 장사(長使) - 소사(少使)의 순이었는데, '팔자'는 이 중 네 번째 계급이었다.[7]
3. 가족 관계
상술했듯이 진 혜문왕의 첩실로 계급은 팔자였다. 혜문왕과의 사이에서 진 소양왕을 낳았다. 여기에 고릉군(高陵君) 영불(嬴巿)[8]과 경양군(涇陽君) 영회(嬴悝) 두 아들이 더 있었다. 여기에 의거왕(義渠王)과 사통하여 두 아들을 더 낳았는데, 이것은 후술.남동생으로는 진나라의 상국(相國)이었던 양후(穰侯) 위염(魏冉)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었다. 또, 화양군(華陽君) 미융(芈戎)이 있었는데, 미융은 부모가 같은 친동생이었다.
종합적으로, 그녀에게는 최소 두 명의 남동생과 다섯 명의 아들이 (기록상으로) 있는 것이다.
4. 생애
선태후와 관련된 기록은 《사기》의 <진본기>, <저리자 감무 열전>, <양후 열전>, <범수 채택 열전>, <흉노 열전> 등에 보인다. 《사기》 이외에 《전국책》에도 선태후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4.1. 집권 과정
혜문왕을 계승한 진 무왕이 즉위 4년차(기원전 307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혜문왕과 미팔자 사이에서 출생한 이복동생 영직이 즉위했는데 그가 소양왕이었다. 당시 영직은 머나먼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었으나 무왕 사후, 진나라로 돌아왔는데 왕위를 두고 공자들끼리 분쟁이 일어났다. 영직은 외숙부 위염의 도움을 받아 즉위할 수 있었고, 모후(母后)인 미팔자는 '선태후'(宣太后)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18세였던 소양왕은 정치를 하기에는 아직 어려 선태후가 섭정을 하고, 위염이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소양왕 2년(기원전 306년), 공자 장(壯)[9]을 중심으로 여러 공자와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계군(季君)의 난이라고 했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서형 공자 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멸족당했다. 이때, 혜문후(惠文后)[10]가 죽임을 당하고[11], 무왕후(武王后)[12]는 위나라로 축출되었다. 즉, 선태후와 대등한 입장에서 그녀를 견제할 수 있는 두 왕후가 '계군의 난'의 여파로 사라진 것이었다.
4.2. 선태후의 정치
권력을 잡은 선태후는 먼저 이부 남동생 위염을 양후에 봉했고, 이에 양후가 진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어서 이복동생 미융을 화양군에, 아들 영불과 영회를 각각 고릉군과 경양군에 봉했다.특히, 양후 위염의 재산은 진나라 영성 조씨 왕실을 능가할 정도였다. 기고만장한 양후 위염은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와도 외조카인 소양왕에게 보고하지도 않았으며, 화양군 미융과 경양군 영회는 자기들 마음대로 범죄자를 처벌했고, 고릉군 영불은 형인 소양왕과 의논하지도 않고 정책과 인사를 집행했다. 이들 네 명을 일컬어 이른바 사귀(四貴)라고 했다. 물론 이 중심에는 당연히 선태후가 있었다.
소양왕 즉위 원년(기원전 307년), 초 회왕이 한나라의 옹지(雍氏)를 포위한지 다섯 달이 지나자 한 양왕은 진나라에 근상(靳尙)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했다. 《전국책》에 의하면, 근상은 순망치한의 고사를 인용하여 선태후를 설득했는데, 선태후는 모국인 초나라와의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아[13] 원군을 거절했고, 이때 선태후의 발언이 이러했다.
"내가 예전에 선왕(혜문왕)과 동침했을 때, 선왕이 대퇴(大腿)를 내 몸 위에 올리니 매우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왕이 온 몸으로 내 몸을 누르니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 자세는 나에게 이로웠기 때문이다. 한나라를 구해주느라고 1,000금의 대가를 치른다면 나에게 무슨 이로운 게 있는가?"
사신 앞에서 대놓고 이런 섹드립을 쳤는데, 사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즉, 한나라가 진나라에게 그만한 이익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원군을 거절하겠다는 뜻. '온 몸'이라고 말을 했으니 이걸 한나라 전체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한나라를 통째로 바쳐야 도와주겠다는 뜻이 된다. 결국 어느 쪽이든 '너네 도와줘봤자 너네만 좋지 우리한테 이득될 게 없는데 뭐 어쩌라고?' 라는 소리였다. [14] 일각에서는 이런 선태후의 대담한 발언이 곧 그녀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4.3. 의거왕과의 관계
의거(義渠)는 진나라의 북쪽에 위치한 부족으로 자주 진나라와 다투었는데, 혜문왕 시절 의거의 25개 성을 탈취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의거의 왕은 진나라에 조현(朝見)을 하게 되었다.《사기》와 《후한서》에 의하면, 소양왕 2년(기원전 306년)에 의거왕이 진나라 조정에 조현을 왔고, 이때 선태후와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태후와 소양왕은 의거를 완전히 멸망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소양왕 35년(기원전 272년), 의거왕을 진나라의 감천궁(甘泉宮)으로 유인하여 그를 살해하고, 의거를 멸망시켰다. 선태후와 의거왕 사이의 두 아들의 생사는 불명이다.[15]
이렇게 의거를 멸망시켰을 때, 범수가 소양왕을 찾아왔다.
4.4. 범수의 등장과 말년
당시 범수는 위나라에서 모욕을 당하고, '장록'(張祿)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소양왕의 알자(謁者) 왕계(王稽)의 도움으로 왕을 만나게 되었으나 왕은 범수를 믿지 못하고 1년여 간 그를 홀대하였다.소양왕 36년(기원전 271년), 양후 위염이 자신의 영지를 확대하려고 하자 범수는 이 기회를 틈타 왕에게 상소를 올렸고, 그제서야 범수의 능력을 알게 된 왕은 그를 궁으로 불렀다. 그러나 범수는 궁에 들어가자 일부러 길을 잃은 척 가장하여 소양왕의 행차를 가로막았는데, 환관이 "대왕께서 행차하셨다!"며 그를 꾸짖자, 범수는 크게 웃으며 "진나라에 무슨 왕이 있느냐? 단지 선태후와 양후가 있을 뿐이로다."라며 비꼬았다. 범수는 이렇게 말하여 일부러 소양왕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것이었다. 소양왕은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로 범수를 크게 신임하게 된다.
소양왕 41년(기원전 266년), 범수는 왕에게 선태후 일족의 행패를 고발하고, 소양왕이 걱정스럽다는 진언을 했다. 이에 소양왕은 선태후의 권력을 빼앗고 양후 위염을 재상직에서 해임했으며,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 등을 모두 내쫓았다.[16]
소양왕 42년(기원전 265년) 10월, 선태후가 사망하고 여산(酈山)에 묻혔다. 《전국책》에 의하면, 선태후는 위추부(魏醜夫)라는 남자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태후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위추부를 자신의 묘에 순장시켜 달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용예(庸芮)라는 사람이 선태후를 설득했다.
용예가 말하기를, "태후께서는 죽은 사람이 무언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17] 선태후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용예가 말했다. "그럼 태후처럼 영명하신 분께서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위추부)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죽은 사람과 함께 묻고자 하십니까? 설령 죽은 사람도 무언가를 알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치면 선왕(혜문왕)께서 노하신 지 오래인지라[18] 태후께서 선왕에게 사과해도 모자랄 텐데, 어찌 위추부와 함께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선태후는 "알겠다."고 하며 명령을 취소하였다. |
5. 평가
선태후 이전에도 정치에 영향력을 미친 여성들은 존재했다. 달기, 포사, 서시 등이 그렇고, 진(晉) 헌공의 여희(驪姬), 위 선공의 선강(宣姜), 위 영공의 남자(南子)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남편의 총애를 바탕으로 한 권력이었으며, 권력의 행사도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겠다는 정도였다.그러나 선태후는 남편인 혜문왕이 사망하고 아들이 소양왕으로 즉위하자 어머니로서 직접 권력을 잡은 케이스였다. 그리고 친인척 관직 임명, 한나라의 원군 거절, 의거왕 살해 등 실제 정치를 행하였다. 훗날 등장하는 여태후, 무측천 등 중국사 여성 정치인의 선조인 셈이다.[19]
다만, 선태후가 소양왕의 임기 내내 실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고, 소양왕이 어렸을 때 권력이 강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우선, 상술한 선태후의 기록은 소양왕 임기 초(1, 2년)의 것들이다. 그리고 선태후가 폐출된 소양왕 41년에 이미 소양왕의 나이는 58세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들이 이렇게 늙을 때까지 어머니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소양왕이 범수의 진언을 듣고 나서 바로 선태후 일족을 내쫓았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선태후 일족의 권력은 잘해봐야 축재(蓄財) 정도에 한정되어 있었고, 조정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20][21] 다시 말해, 선태후의 권력은 소양왕이 성장하면서 점차 왕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태후가 권력을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위 문단에서는 태후를 내쫓을 명분이 없어 행실을 알면서도 참고 있었다고 했는데, 애초에 소양왕은 즉위했을 때 당시 기준으로 성인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들이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선태후를 탄핵할 명분이 되므로 쫓아낼 명분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더군다나 상술했듯 선태후의 측근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법권, 행정권, 인사권, 외교권 등을 휘두르는데 왜 진작 쳐내지 않고 선태후를 쳐내며 같이 쳐냈단 말인가? 그냥 힘이 딸려서 못 쫓아내고 있었다는 게 더 합리적이다. 앞서 말했듯 양후 위염과 화양군 미융은 진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며, 소양왕 즉위 과정에도 이들이 관여했다. 그리 높지도 않은 팔자 계급으로 시작해 언니와 조카를 쳐내고 권세를 잡아 존재하지도 않은 호칭을 만들어내며 권력을 휘두르는 등 선태후 개인의 지략이나 정치감각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생 및 측근들이 군권을 쥔 상황이라면 충분히 아들을 압도하고 국정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소양왕 34년 진나라는 중원에서 위군과 조군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는데, 이후 소양왕은 '의거의 일이 시급하니 태후에게 청하겠다'고 말했고, 이후 모자는 의거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41년 소양왕은 선태후를 축출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의거왕을 비롯한 의거족의 군대가 선태후의 배후 세력 중 하나였고, 선태후가 의거와 갈등이 있었거나 토사구팽할 생각으로 이에 동의했으나 이후 배후 세력이 줄어들어 아들에게 군권을 뺏기고 쫓겨났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국책》 등에 수록된 선태후 기록의 진위 여부는 둘째치더라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혜문왕, 의거왕, 위추부 등 최소 3명 이상과 성관계를 가진 선태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음란한 여성'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22] 그나마 이후 등장하는 조희와 비교하면 양반이긴 하다.[23]
여담으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70에 가까운 나이에 사망했는데 남편인 혜문왕이 45세, 시아버지인 진효공이 43세에 사망한 것에 반해 본인 아들인 소양왕은 74세까지 장수했으니 소양왕의 장수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인듯 하다... 아들이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 즉위한 것은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그 아들이 60 다 되는걸 보고 죽었다(...) 또한 죽고 나서 7년 뒤에 진시황이 태어났는데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이 안국군의 서자이지만 장자라는 언급은 없으니 아마 증손자가 태어나는 것도 보고 죽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도 있다. 다만 본인 유전자가 별로 안 강한지 그 다음의 왕들인 효문왕(손자), 장양왕(증손), 진시황(현손) 모두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다. 어느정도냐면 소양왕 사후 진시황이 즉위하기까지 겨우 3년밖에 안 걸렸다(...)
6. 기타
선태후가 매장된 여산(酈山)은 바로 진시황릉이 위치한 장소인데 그 때문에 진시황릉이 사실은 선태후의 능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진시황릉 문서 참조.선태후의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나이를 추정할 수는 있다. 선태후 사망 당시 아들 소양왕의 나이는 59세였는데, 그렇다면 최소 70대 중반의 나이에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7. 대중 매체에서
여성 정치인이라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워낙 옛날이라 그런지 무측천, 여태후, 서태후 등 유명한 여인들에 비해 대중들에게는 인지도가 거의 없었던 듣보잡 인물이었다.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 선태후를 다룬 드라마 미월전과 대진제국 등이 방영되어 점차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일대기가 블로그, 뉴스, 위키에 소개되는 등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 문서는 미월전과 미월보다 늦게 작성되었다.
7.1. 미월전
2015년 방영. 배우는 손려(孙俪).
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미월(芈月)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미월전과 미월 항목을 보자.
7.2. 대진제국
7.3. 왕자영요
2015년 게임 왕자영요에 법사 영웅으로 등장한다. 라인전에 강하다.[1] 병마용 유물과 아방궁 잔와에 미월(芈月)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2] 이전까지는 부군의 시호를 따라 혜문후, 무왕후 등의 호칭이 결정되었다. 미팔자도 후궁이었지만 혜문왕의 부인이었고, 혜문후와 같은 왕의 모후였으므로, 혜문후와 호칭이 겹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게 되어 새로 올린 호칭이 태후(太后)였다. 이후로 왕의 모후는 대대로 '태후'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훗날 효문왕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 역시 효문후가 아닌 화양태후로 불리게 된다.[3] 다른 문서에 있는 조희도 최초의 황태후로 서술되어 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동서고금 근현대 막론하고 태후로서의 정통성과 권위는 정실 황후가 태후가 된 경우에 가장 인정받기 때문에 정실황후인 조희가 태후로서의 정통성이 더 높다. 다만 시기적으로 보면 진시황의 모후인 조희보다 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가 앞서며, 소양왕은 왕호를 사용했으나 시황제는 최초로 황제를 칭했기에 각각 최초의 태후 (태후, 황태후)로 볼 여지도 있다.[4] 허나 나이는 핑계에 가깝다. 소양왕은 즉위 당시에 19세이기 때문.[5] '미'(芈)는 초나라 왕실 선조의 성이다. 여기서 여러 분파(氏)가 나뉘는데, 초나라 왕은 '웅씨'(熊氏)였다.[6] 부친이 초 위왕, 이복오빠가 초 회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드라마 미월전의 설정일 뿐이다.[7] 유사한 케이스로 무측천은 소의(昭儀) 시절에 '무소의'(武昭儀)라고 불렸다.[8] 시장(市場)의 시(市)가 아니라, 슬갑(膝甲, 바지에 껴입어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뜻하는 불(巿)이다. 고릉군의 이름이 같은 발음인 '芾'(불)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9] 혜문왕의 서자로, 소양왕의 서형이었다.[10] 혜문왕의 정실이자, 무왕의 친모.[11] 그러나 《사기》 내에서도 기록이 엇갈린다. <진본기>에서는 혜문후가 무왕보다 먼저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나, <양후 열전>에서는 계군의 난 이후 혜문후가 주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무왕의 정실로, 위나라 출신이었다. 무왕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 무왕이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애도할 도'(悼)를 붙여 '도무왕후'(悼武王后)라고도 한다.[13] <저리자 감무 열전>에 의하면, 선태후가 초나라 출신이라 그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작 3년 후 제, 위, 한 3국 연합군이 초나라를 공격할 때 같이 공격해 재미를 보았던 점을 고려하면 그냥 한나라를 도와줘봤자 딱히 이득이 없다고 판단해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14] 결국 감무가 소양왕을 설득하여 진나라는 한나라에 원군을 보냈고, 초나라는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15] 살아있어봐야 태후와 멸망한 부족(그것도 골칫거리가 됐던 부족)의 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향후 골칫거리가 될 확률이 높았기에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선태후가 모정을 베풀었다고 해도 이후 소양왕과 그 신하 등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16] 다만 뒤에 나오는 위추부의 예를 생각하면 정치에만 관여못하게 했을 뿐 어머니의 성적 자유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았던 듯하다.[17]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사고하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냐는 뜻.[18] 죽은 혜문왕이 저승에서 선태후가 정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분노하지 않았겠냐는 의미이다. 현대 기준으로야 남편도 죽고 없는데 다른 남자와 함께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냐마는그 남자를 무덤에 같이 묻어버리는 건 물론 문제가 된다고대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문제가 될 일이었다. 그리고 딱히 이런 시각에서 생각하지 않더라도, 용예의 발언처럼 영혼이 진짜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생각한다면 아내와 연애했던 남자가 아내와 같이 묻히는 것은 질투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19] 사실 최초의 여성 정치인은 아닌 것이, 상나라 시절의 왕후였던 부호같은 케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경우 단순히 왕비 역할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장군 겸 제사장으로 임명되어 제사를 주관하며 직접 1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민족을 격파하기도 했으므로 정치인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그녀의 경우 남편인 왕이 버젓이 국가원수로서 존재했으며 딱히 유명무실한 왕이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 자기 업무를 훌륭하게 해낸 정치인일 뿐, 여성이 실질적으로 군주 노릇을 한 것은 중국사에서 선태후가 사실상 선조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태후'라는 말 자체가 선태후 때 최초로 등장했다.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의 여후 때부터지만.[20] 최소한 소양왕은 이전부터 선태후 일족의 행실을 알고 있기는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들을 축출할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양후 위염과 화양군 미융의 공적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특히, 위염의 경우 소양왕의 정복활동 대부분을 수행했고, 그 유명한 백기를 중용하기도 했으니까.[21] 축출될 당시에 선태후, 양후 위염, 화양군 미융은 이미 연로하여 예전만큼 활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도 하나의 이유로 추정된다.[22] 남성의 축첩은 당연시되나(일반적으로 남성 군주는 나라를 말아먹을 정도의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4명 정도의 여성 편력으로 욕을 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이 시집올 때 잉첩이라는 이름의 자매 내지 시녀 첩을 데려오는 등 축첩 자체가 권장되는 분위기였다. 당연하지만 군주의 가장 큰 책무중 하나가 후계자를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은 한 남성에게 정조를 지키는 것이 당연시되는 고대사회에서 선태후의 성생활은 비난을 받기 좋은 요소였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물론 문제될 일이 아니지만. 그리고 그나마 고대라 비난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지, 유교가 본격적인 사회질서로 자리잡힌 뒤로는 태후가 애인을 두는 일은 극히 예외를 제외하면[26]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23] 조희도 마찬가지로 3명(장양왕, 여불위, 노애)와 관계를 가졌고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선태후가 그래도 소양왕을 쫓아내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에 반해서 조희는 진시황을 쫓아내고 노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왕으로 세우려다가 역관광을 당했다. 그나마 조희는 생모라서 목숨은 건졌지만 노애는 온갖 모욕 끝에 처형, 그 자식들 역시도 자루에 넣어져 몽둥이로 맞아죽었다.[24] 루이 14세도 갑작스레 후손들이 줄줄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25] 공교롭게도 진시황의 이름인 영정(嬴政)과 한국 한자음이 같다. 물론 본토 한자음은 닝징(宁静) <-> 잉정(嬴政)으로 서로 다르다. 해당 배우는 장국영, 유덕화 주연의 신상해탄(1996)에 함께 출연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