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 吳潤 | |
<colbgcolor=#e7d3ba> 출생 | 1946년 4월 13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
사망 | 1986년 7월 5일 (향년 40세) 서울특별시 도봉구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호 | 개도치[1] |
본관 | 해주 오씨 |
가족 | 아버지 오영수 |
직업 | 판화가, 조각가, 화가 |
학력 |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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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판화가, 민중미술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80년대 한국 미술계의 상징. 해학과 신명이 넘실거리는 춤과 전통을, 판화만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형식으로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었다.2. 생애
부산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서울로 이사와서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조소과를 나왔다. 대학 시절부터 오윤은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민화·무속화·불화·탈춤·굿 등 한국 전통의 민중 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민족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1968년 휴학하면서 한국 무전여행을 했고, 1년 뒤 1969년 대학 복학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던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제1 선언문”을 발표했다.졸업한 후 1971년 군대에 입대했으나,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1년 뒤 의병제대 했다. 제대 후 경주에서 윤광주, 오경환과 같이 전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라시대에서 부터 내려오는 전통 흙을 다루는 기술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일산에서 임진택이 운영하는 전돌공장에서 일하면서 1974년에는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동대문지점 구의동지점 내외벽의 테라코타 부조를 제작하기도 했다. 1976년 한윤수가 운영하는 청년사가 설립되어 삽화도 제작하고, 지리산, 한탄강 등 현장 답사를 다니기도 했다. 1977년 박명자와 결혼하고 수유리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선화예술고등학교 미술과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79년 5월에 부친 오영수가 작고하고, 그해 11월 19일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 김지하의 시집 《오적(五賊)》과 이원수의 전래 동화집 《땅속나라 도둑귀신》의 판화 삽화와 표지화를 비롯하여 정치적 민주화 운동 및 투쟁을 지원한 포스터와 대형 걸개그림 제작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계속 참여하면서, 1982년 석형산, 김호득 등과 함께 서대문 미술학원을 설립하여 조소를 지도한다. 이후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83년 7월 간경화로 고려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에 퇴원하였다. 민간요법으로 치유를 했으나 1984년 10월 다시 건강이 더 악화되어 진도로 요양을 떠난다. 1985년 3월 서울로와서 1986년 5월 3일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판화집 《칼노래》를 출간하고, 화실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다가 부산에서 판화전을 개최하던 중 갑자기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1986년 7월 5일 마흔한 살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