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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대 말~80년대 초 유신체제 종말과 신군부가 득세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민주화 운동과 함께 태동한 사회 변혁·비판을 위한 미술 운동을 말한다. 민중미술은 젊은 작가들이 미술의 사회적 참여를 요구하며 결성한 소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각각의 소집단 사이에는 문제의식과 활동방식이 달랐으며 이에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따라서 넓게 보면, 예술과 사회의 관계 재정립에 나섰던 다양한 예술적 실천과 실험들을 포괄한다.2. 역사
민중미술 이전인 1970년대 미술계는 단색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술계의 권력을 쥐고 있었던 단색화 화가들은 70대부터 군사정부의 미술계 요직을 겸하면서 후배들에게 '정권에 침묵'하는 것을 보여주고 뒤로는 정권을 찬양한 민족기록화를 그리고 있었다. 단색화는 주제가 없는 미니멀리즘적인 추상화였기 때문에 그 형식상 사회 변화에 무관심하거나 이에 얽히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미술대학을 다니던 미술가들 중 일부는 이런 예술계의 흐름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변화에 대해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하는 추상화가들과 달리, 시위 현장에 가서 판화를 제작하거나 걸개 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을 하며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려 했다. 당연히 형식적으로도 형상(figure)의 묘사를 극도로 꺼리는 추상화와 달리, 사실적 묘사는 물론 사진 등의 다른 매체 활용에도 적극적이었다.[1]오윤 작가의 생전 모습 / <칼노래>[2] / <아라리요>[3] (왼쪽부터).# |
한국의 민중미술은 1969년 오윤, 임세택, 김지하 등이 ‘현실동인’을 결성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79년 김정헌, 오윤, 주재환 같은 예술가들과 성완경, 최민 등 평론가들이 ‘현실과 발언’ 동인회를, 홍성담, 최열 등은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했다. 이외에도 민중미술 작가들은 1982년 ‘임술년’, 1983년 ‘두렁’ 등의 창작집단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이렇게 소규모 동아리(동인)에서 활동하던 당시 민중미술 작가들은 한국 전통 도상을 차용해 현대미술로 재풀이하는 이른바 '한국적인 것'의 구현에 중점을 두어 작업하고 있었으나, 당시 정권은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민중미술 작가들의 활동들을 끔찍히 싫어했으며 이를 제한하려 하였다. 1985년 7월 20일 아랍문화회관에서 전시 중이던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시 출품작 36점이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19명이 강제 연행, 5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미술공동체에서 기획하고 두렁회원 등 20, 30대 초반의 젊은 미술인 30명이 출품한 이 전시가 탄압을 받자 민중미술 작가들은 민족미술협의회를 결성하여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최병수 작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4] |
1987년 6.10 민주 항쟁 전후로 벌어진 학생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에서 이들은 대형 걸개그림을 걸어 저항에 참여했다. 1987년 6월 11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피격당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최병수 작가는 연세대학교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걸개 그림을 그려 다음날 학생회관 건물 외벽에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내걸었다. 이후 1988년 전국 현장미술운동집단의 연합체인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결성과 '민족미술협의회의 현장미술운동집단'이 형성되면서 그 운동의 폭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정부의 민중미술에 대한 탄압은 있었는데, 공안정국 시기인 1989년에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사건과 신학철 '모내기' 사건, 1990년 윤범모 예술의전당 미술부장 사퇴파동 등이 대표적이다.
민중미술 작가들의 작업은 199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이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대가 되면서 변화를 맞는다. 1990년대는 더 이상 군사정권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과거와 같이 '불의에 투쟁하는' 식의 예술을 진행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문화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미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상업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의 가치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사회주의 방식의 '혁명'보다 헐리우드의 영화나 일본의 애니메이션, 서태지로 대표되는 새로운 대중문화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민중미술 작가들의 관심사도 민주주의 사회 투쟁보다는 노동, 생태, 소수자 인권, 역사, 대중문화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 동안의 민중미술 성과를 회고하는 <민중미술 15년> 전시를 열었으며, 전시에 대한 비판이 많았으나 1980년대를 정의하고 구분지으려는 여러 담론들이 생겨났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1980년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미술사조로서 '민중미술'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의의와 영향
민중미술은 현실에 침묵하는 미술계의 관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사회 참여를 촉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는 생활미술운동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을 가능케 했다. 민중미술이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미술은 전문가들만이 행하고 누리는 배타적인 것이 돼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며 대중과 소통하며 완성하는 공동체적 미술로 연결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민중미술운동의 경향은 오늘날 미술로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한국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민중민족미술운동은, 단색주의로 상징되는 모더니즘 충동과 대립하면서 주체적인 토착-민속 문화의 창조, 하위주체의 편에 서는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그리고 '민중'과의 일체화와 소통을 추구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치로 삼고 있고 그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일정한 생명력과 보편성을 갖는다.
한편 민중민족미술 주요 운동가들은 한국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제도권에 편입되었고, 반독재운동가들이 새로이 집권하는 정치적 분위기에 맞추어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은 물론, 유명 상업 화랑의 러브콜을 받았다. 2016-2020년께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으로 기득권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일련의 맥락 속에서, 민중미술계파의 지대 추구 및 사회적 물의는 과거 민중민족미술의 의의를 퇴색시키고 있다.[5]
4. 관련 문서
5. 여담
[1] 이러한 경향은 외국의 사회참여적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다. 민중미술에 영향을 준 외국 작가로는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 중국의 문학가 노신, 미국의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 벤 샨 등이 있다.# #[2] 광목에 목판, 채색, 30×25cm, 1985[3] 광목에 목판, 채색, 45×38cm, 1985[4] 88년 이한열 열사 1주기 추모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5]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2016년 1월, 가나화랑과 연계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민중미술계파가 형성했다고 주장해 세력결집과 미술사 왜곡을 시도하였고, 2017년 청와대는 임옥상의 <광장에, 서>를 대여하여 청와대 본관에 디피하였는데, 이 작업이 가나화랑의 소유라는, 즉 가격 형성 수작이라는 의혹이 있다. 게다가 임옥상은 과거 임옥상미술연구소 직원을 성추행한 이후에도 박원순 시정 주도 하에서 일본군 위안소 피해자를 위한 작품을 만드는 등 왕성한 사회적 활동을 지속한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박원순 또한 성폭력 가해자로 드러나 몰락했다. 그 외에도 문재인 정부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자리에 윤범모를 낙하산 인사하여 논란을 빚었다. 그 윤범모는 정권의 비호 하에 연임은 물론 임옥상의 회고전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