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14:45:15

오재현(독립운동가)

파일:오재현(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9년 3월 21일
전라남도 무안군 三鄕 柳橋 432
사망 1941년 12월 23일 (향년 32세)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 하바롭스크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4.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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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재현은 대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재현은 1909년 3월 21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삼향면(三鄕面) 유교리(柳橋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세 아들(5세, 3세, 1세)을 두고 독립운동을 한다며 집을 나섰다.

1928년 4월 15일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朝鮮學生社會科學硏究會) 총회에서 교양부장으로 선출되었고, 중앙기독청년학관·휘문고보·고학당의 학생운동 지도를 담당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김복진(金復鎭)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김종문(金鍾文)·염양배(廉養培)와 함께 야체이카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다. 이 당시 중앙기독청년학관에 재학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8월에는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같은 달 서울 시내 학생들의 동맹휴교의 배후지도 혐의로 다른 사회과학연구회 인물들과 함께 경찰에 붙잡혀, 9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송치된 이후 계속 구금 상태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30년 11월 5일 조선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고, 1931년 12월 22일 풀려났다.
파일:오재현(독립운동가)_1.jpg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사진

이후 러시아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1940년 12월 29일 연해주 내무인민위원회 국가안전부에 붙잡혔고, 1941년 9월 15일 소련 극동전선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2월 23일 하바로프스크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1958년 2월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협의회에서 1941년 극동전선 군법회의의 선고를 취소하고, 죄목을 없는 것으로 하였다. 또한 1997년 11월 24일 러시아의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2010년 11월 19일에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였다.

공훈전사자료관

독립운동인명사전

3. 참고 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學生盟休에 關한 情報綴(鍾路警察署長, 1928. 7. 2)
  • 東亞日報(1930. 11. 7)
  • 소련에서 정치탄압 희생자들 - 고려인, 1934-1938, 9권 112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30. 11. 5)
  • 中外日報(1928. 8. 22)

4. 관련 인물



[1] 손주사위이다.